닉슨을 재평가한다
닉슨을 재평가한다
  • 미래한국
  • 승인 2014.02.2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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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게이트 40주년·닉슨 사망 20주년
 

“그는 11명으로 구성된 대통령 직속의 ‘첩보조직’을 두었는데 이 조직의 운영 재원은 국무부의 ‘특별 긴급사태’ 자금이었다. 한편 그는 FBI와 법무부를 동원해 특히 언론계의 반대자들을 괴롭히고 전화 도청을 일삼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싫어했던 한 언론사를 법정으로 불러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는 법무부 장관으로 하여금 FBI 요원을 시켜 어느 기업 경영진의 집을 급습하게 했다. 대통령의 정책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라디오와 TV 방송국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위 경우에 해당되는 미국 대통령은 누구일까? 대개 닉슨을 떠올릴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사람, 불법적이고 음험한 행태로 보아 딱 이라는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위 사례는 두 민주당 대통령의 경우다. 첫 번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두 번째는 존 F. 케네디.

두 사람은 20세기 미국 민주당을 대표하는 정치적 영웅이다. 한국인에게도 둘은 미국 민주주의의 표상처럼 기억되고 있다. 반면 닉슨의 이미지는 마치 ‘공작정치’의 대명사다.

닉슨의 위법이 민주당 출신 두 대통령보다 훨씬 심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루스벨트와 케네디의 문제는 재임 당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닉슨의 가장 큰 죄는 ‘들통이 났다는 것’이었다. 속된 말로 재수가 없었다. 더 정확히는 당시 미국의 리버럴 엘리트들이 닉슨을 재수 없게 생각했다는 게 진정한 불운이었다.

그는 뛰어난 대통령이었다

미국 제37대 대통령 닉슨(1913년 1월 9일~1994년 4월 22일), 올해는 공교롭게도 그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지 40주년임과 동시에 사망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그는 미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대체로 불명예스럽게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닉슨은 사실 1960~70년대를 거쳐 간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 업적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의 전임 존슨이나 나중의 카터에 비춰보면 존재감은 더 선명하다.

존슨의 이른바 ‘위대한 사회’는 초라한 결말을 넘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물가는 치솟고 실업은 급격히 확대되는 등 2차 세계대전 후의 경이적인 호황의 성과가 거의 다 잠식된 터였다. 닉슨은 그 같은 경제적 위기를 상당 정도 수습했다. 한편 1969년에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돌파구를 열었다.

1970년에는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으로 동서 데탕트의 물꼬를 트고 1972년 2월에는 전격적으로 북경을 방문해 미중수교를 이끌어냈다.

닉슨 대통령 (1913~1994)

닉슨 독트린은 당시 한국의 입장에선 재앙이었다. 긴 역사적 안목에서 볼 때 ‘세력균형과 데탕트’로 대표되는 닉슨의 일련의 대외정책이 과연 적절했는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오늘날 중국이 패권 야욕을 노골화하는 것을 보면 당시 중국의 숨통을 틔어 준 것이 오히려 부메랑이 된 것은 아닌지 따져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에는 닉슨의 대외정책은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72년 이런 안팎의 성과를 바탕으로 닉슨은 재선을 향해가고 있었다. 닉슨은 선거전에 집착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직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선거 전략으로 삼고자 했다. 내심 신경을 쓰지 않았을 리 없지만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1968년에는 근소한 차로 겨우 당선됐지만 이번에는 국민들의 지지가 전에 없이 높았다. 선거전 와중에 ‘사소한 소동’이 있었지만 대세에 지장은 없었다. 1972년 11월 닉슨은 민주당 후보에 19%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워터게이트 히스테리

그런데 그 사소한 소동이 사소한 게 아니었다. 선거전이 한창이던 1972년 6월 19일 워싱턴 포스트에 사건 하나가 보도됐다. 6월 17일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종합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닉슨 재선 운동본부 소속 5명이 침입했다 체포됐다는 내용이었다. 6월 20일 민주당은 닉슨 측을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제기했다. 한편 워싱턴 포스트는 딥 스로트(Deep Throat)의 제보라며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 명의로 연일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

이 사건은 선거 결과가 보여주듯 그 당시에는 여론에 거의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그런데 닉슨의 재선 직후부터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워싱턴 타임스뿐 아니라 뉴욕 타임스 등 수많은 언론들이 앞다퉈 선정적 보도를 쏟아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일례에 지나지 않으며 그 외에도 엄청난 불법행위를 저질러왔다는 것이었다. 이제 사법부가 뭔가 보여줄 차례였다. 존 시리카(John Sirica)라는 판사에게 운이 돌아갔다.

그는 별 볼일 없는 지방판사에 불과했다. 법률적 실수가 잦아 능력도 의심받던 인물이었다. 사건을 맡게 된 것은 워터게이트 건물이 관할 구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성을 갈망하던 시리카 판사는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그는 워터게이트 피고들에게 잠정적으로 전원 종신형을 구형했다.

형량을 줄여주는 대가로 백악관이 배후라는 자백을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사법거래를 거부한 피고에겐 징역 20년에 4만 달러의 벌금을 선고했다. 그냥 무단침입에다 아무 전과도 없었다. 폴 존슨의 평가를 빌리자면 이것은 거의 사법적 테러리즘이었다. (덕분에 시리카 판사는 1973년 타임스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는 전국적 명성은 얻었다.)

마치 ‘국정원 댓글 사건’을 무리하게 몰아간 채동욱을 연상케도 한다. 물론 차이는 있다. 시리카는 명성을 갈구했지만 채동욱은 약점 때문에 야당과의 정치적 거래를 계산했었다. 워터게이트의 경우는 그나마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국정원 댓글 사건은 애초에 성립조차도 되지 않는 억지였다. 하지만 워터게이트로 인한 여파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슬아슬한 문제였다.

월남전

워터게이트 소동이 계속되던 1973년 전쟁권한법이 통과됐다. 대통령의 미군 해외 파병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워터게이트에서 비롯된 일종의 히스테리요 자기 기만이었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깊게 개입해 들어가게 한 장본인은 케네디, 존슨 두 민주당 대통령이었다.

오히려 닉슨은 불필요한 군사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독트린을 이미 천명해 놓은 터였다. 그런데도 민주당 지배하의 의회는 마치 닉슨이 전쟁광이며 자신들은 평화의 사도이기나 한 듯이 굴며 파병 제한법을 통과시키고 말았다. 힘이 빠져 있던 닉슨은 그것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중대한 실수였다. 무엇보다도 베트남전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쳤다. 닉슨이 베트남전의 소모적 수렁에서 발을 빼려고 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남베트남이 공산화되도록 내버려두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목표로 한 것은 현상동결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선 북베트남에 미국이 언제든 재개입할 수 있다는 전략적 모호성의 여지를 남겨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권한법은 그 모호성의 안개를 제거하고 말았다. 기회를 노리던 공산군은 닉슨의 사임 이후 본격적인 총공세를 폈다. 후임인 포드는 그것을 막을 힘이 이미 없었다. 1975년 결국 사이공이 함락됐다.

폴 존슨은 “워터게이트 히스테리는 인도차이나 전역의 자유주의 제도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과한 얘기가 아니다. 그런데 정략적 히스테리로 눈이 멀어 안보마저 함부로 하는 게 워터게이트의 경우만일 것인가?

우리의 국정원 댓글 사건도 사실 그랬다. 야당과 종북세력들은 댓글을 핑계로 국정원의 무력화를 겨냥한 대대적인 공세를 폈고 어느 정도는 그 목적을 달성했다. 만약 채동욱이 중간에 낙마하지 않았다면 국정원은 그 이상으로 망가졌을 것이다.

도청과 녹음은 전임자 관행

워터게이트 소동의 막바지, 백악관에 집무 중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법원과 의회는 테이프 제출을 요구했고 1973년 5월부터 상원에서 청문회가 개최됐다. 테이프 일부가 제출되고 여러 가지 민감한 내용들이 드러났다. 언론과 민주당 그리고 사법부는 더 거세게 닉슨을 몰아붙였다.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건 난센스였다. 녹음과 도청은 닉슨의 전임자 모두가 행하던 것이었다. 원조는 루스벨트였으며 트루먼도 아이젠하워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특히 케네디, 존슨은 비밀 녹음과 도청의 마니아였다. 만약 모두 들춰보고 닉슨에 대한 기준을 적용한다면 루스벨트에서 존슨까지 무사할 수 있는 대통령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닉슨은 1969년 2월 대통령이 되자마자 존슨이 설치한 녹음장치를 제거했다.” 그가 다시 녹음장치를 설치토록 한 것은 리버럴 역사가들의 잘못된 평가, 특히 베트남전 정책에 대한 평가를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테이프에선 워터게이트가 닉슨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는 결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1974년 7월 하원은 닉슨 탄핵을 결의했다. 상원이 승인하면 끝이었다. 1974년 8월 8일 닉슨은 먼저 사임을 했다. “탄핵 사태로 장기간의 국가적 동요가 일어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과거 케네디의 부정선거 혐의를 “미국을 위하여” 그냥 넘어간 것처럼 이번에도 닉슨의 명분은 “국가를 위해서”였다. 그게 닉슨이었다.

백악관

리버럴 명문대 vs 지잡대 반공주의자

닉슨의 책임이 있다. 대처도 서툴렀다. 그러나 당시 언론들은 닉슨에게 공정하지 않았다. 루스벨트 케네디 존슨 등 민주당 대통령들은 위법은 물론이요 여자문제와 같은 사적 결함도 상당했다. 존슨은 뇌물까지 받았었다. 기자들은 그 점을 알면서도 넘어갔다.

닉슨은 오히려 그들에 비해선 매우 깨끗했다. 여자문제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치자금 수수에 문제가 없지 않았지만 전임자들은 물론 당시 그런 문제가 없는 정치인은 없었다. 하지만 닉슨은 전임자들과 같은 관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언론에서 민주당에 이르기까지 포진한 미국의 주류 리버럴 지식사회와 닉슨의 근원적 불화였다. 닉슨은 서부 변방 캘리포니아에 ‘지잡대’ 출신이었다. 동부 엘리트들의 입장에선 ‘듣보잡’이었다.

게다가 닉슨은 앨저 히스의 간첩활동 폭로를 주도한 강경 반공주의자였다. 리버럴의 시대,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동부 아이비리그 출신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닉슨은 그야말로 정나미 떨어지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닉슨에 대한 높은 지지는 이들 동부 리버럴 엘리트들에겐 더 기분 나쁜 일이었다. 닉슨의 주된 지지 기반은 ‘침묵하는 다수’였다. 히피들이 날뛰고 지나간 직후였다. 그 방만함에 염증을 느낀 미국의 보수적인 중산층은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닉슨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진보적 리버럴들의 입장에선 닉슨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반드시 꺾어야 할 상대였다. 워터게이트가 찬스였다. 결국 정쟁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경과는 위선과 아집에 사로잡힌 정쟁이 국가에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를 보여준다. 타산지석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 더욱이 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정쟁에도 ‘불순한 의도’가 쉼 없이 개입을 노린다. 이렇게 되면 이미 생존의 문제다.

정쟁 자체는 아무리 소모적이라 해도 그에 머물기만 하면 당장 존망의 위험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내외적 환경은 그런 정치적 여지가 매우 협소하다. 이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이강호 편집위원·역사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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