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일이 있는지? SBS ‘힐링캠프’까지 출연한 이른바 ‘스타 철학자’다. 그의 전매특허는 돌려 말하지 않는 소위 돌직구 상담이다. 혜민 스님의 속 편한 카운슬링은 이제 어느 정도 직분(?)을 다 했다. 성미 급한 한국인들의 취향에는 역시 직설법이며 돌직구가 더 잘 부합하는 것이다.
작년 무렵부터 차곡차곡 명성을 쌓아올린 학자 강신주가 논쟁의 한가운데로 진입한 건 크게 두 번이다. 첫 번째는 작년 7월 경향신문에 기고한 ‘냉장고 칼럼’ 때문이었다. 냉장고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이니 당장 그것을 없애자, 없애는 게 힘들다면 용량이라도 줄이자는 골자였다. 남는 음식은 이웃에게 나눠주게 될 테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안 그래도 인간다워지고 싶었는데… 이렇게 좋은 방법이 있었다니!’
라고 동조해 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인터넷은 강신주에 대한 비판과 비아냥거림으로 들끓었다. 지금 상황에서 냉장고를 없애면 1주일에 한 번만 가도 될 마트를 일곱 번 가야한다.
한국의 1천만 가정주부들을 적으로 돌린 순간 논쟁의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사한 논조의 한겨레21조차 “강신주의 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反자본주의자 눈에 냉장고가 곱게 보일 리가…
그는 왜 냉장고를 걸고 넘어졌을까? 간단하다. 그는 반(反)자본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세상의 모순과 한계를 대부분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사유재산(私有財産)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는 그가 냉장고를 곱게 볼 리 만무한 것이다.
(※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날이면 날마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문제 삼는 그의 글을 보수 성향으로 알려진 중앙SUNDAY에서 1년 넘게 연재해줬다는 사실이다. 장사 그만하고 싶다는 건가?)
최근 베스트셀러로 진입한 그의 책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읽으면서 자원의 희소성과 미래의 불확실성까지를 전부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는 그의 패기에 살짝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태어난 게 너무 좋아 죽겠는 나는 그의 견해에 털끝만큼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글을 쓰려면 이 정도 근성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은 생각은 들었다.
그런데 이 책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다르게 읽혔나 보다. 자본주의에 대한 지적에는 아무도 나처럼 열 받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은 그가 노숙자를 묘사하는 부분에 대해서 냉장고 사건 이상으로 화를 냈다.
강신주는 ‘수치심, 마비된 삶을 깨우는 마지막 보루’라는 원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노숙자들은 서울역을 지나다니는 일반 시민들의 시선은 아랑곳없다. (…) 간혹 노숙자는 강시 혹은 좀비처럼 보인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노숙자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마비되어 있는 존재다.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한 마디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politically incorrect) 발언을 한 것이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아무리 인기 많은 여자 아나운서도 ‘깜둥이’라는 단어 한 번 잘못 쓰면 곧바로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리는 세상이다. 이런 판국에 존재 자체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내 보여주는 노숙자를 수치심 없는 존재로 묘사하다니!
노숙자를 어떻게 봐야할까
노숙자에 대한 논쟁은 꽤나 규모가 크고 깊다. 이 분야에도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이 존재하는 것이다.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미국 공화당의 정책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빈부격차 문제, 재정적자 문제와 함께 거론하는 것이 바로 이 노숙자 문제다. 친(親)시장정책은 필연적으로 노숙자들을 대량 양산한다는 것이다(참고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2005년 이후 미국의 노숙자수는 감소하는 추세다).
생기를 잃고 길바닥에 나앉은 이들을 보며 마음 아프지 않을 사람들은 없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드라마나 영화는 그들을 종종 선택받지 못한 순교자나 희생자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사람들은 그런 작품을 보며 눈물 흘리는 사이 노숙자에 대한 하나의 고정관념을 형성해 간다.
문제는 픽션과 현실의 간극이다. 당신이 KTX 열차 안에서 노숙자에 대한 슬픈 영화 한 편을 보며 서울로 올라왔다고 가정해 보자. 눈물을 닦아내며 열차에서 내린 당신은 서울역 앞에 있는 ‘현실의 노숙자’들을 보게 된다. 이때, 그들에게 오직 동정심만을 느낄 뿐 털끝만큼의 위협도 느끼지 않는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겠는가?
흔히 우리는 노숙자가 불쌍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①재활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채 남은 삶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접어버린 노숙자와 ②어떻게든 다시 시작해 보려고 ‘빅이슈’ 같은 잡지판매에 나선 노숙자를 구분해야 한다.
후자는 일시적으로 삶의 난관에 봉착해 있는 ‘색다른 스토리’의 소유자일 뿐 마음은 이미 노숙자가 아닌 사람들이다. 우리의 측은지심은 그들의 삶에 기적의 블랙스완 한 마리가 날아오르길 기도하는 데 사용돼야 한다.
노숙자 문제를 논의한다고 말할 때 진짜 심각하게 거론돼야 할 존재들은 ①의 ‘만성적 노숙자들’이다. 강신주가 이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다소 거칠게 한 것이었다면 그에 대한 비난의 강도는 조정될 필요가 있다.
만성적 노숙자들은 최소한의 규율만 지키면 얼마든지 재활의 발판이 될 수 있는 각종 기관이나 시설의 도움조차 거부한다. 길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제외한 어떤 것도 거부하는 이들에게까지 ‘체제의 피해자’라는 왕관을 씌워줄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문제는 매사 피해자만을 중심에 두고서 단순하고 편협하게 생각하는 감성적 사고방식이다. 우리 삶의 문제들은 ‘노숙자=무조건 동정 받아야 하고 언제나 신사적으로 묘사되어야 할 사람’이라는 간단한 공식으로 포섭될 만큼 간단하지가 않다.
이번 논쟁은 노숙자라는 복잡한 사안을 심도 있게 논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조차도 노숙자=약자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노숙자들에게 섭섭하게 말한 강신주에게 비난의 융단폭격을 퍼부음으로써 스스로를 꽤나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은가? 만성적 노숙자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재활에 관심이 없고 한국인들은 이성적 사고에 관심이 없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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