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림사건을 계속 취재 중이다. 발단은 물론 영화 ‘변호인’이다. 논란 초반에만 해도 부림과 불임을 구분 못하던 내가 이제는 나름대로 사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길 할 수 있게 됐으니 감사한 일이다.
영화 개봉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요약하면 ‘폭력적 무지의 만발(滿發)’이다. 한 마디로 ‘모르는 게 자랑’이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면 최소한의 것들은 수용해 주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촌스러운 사람 취급’ 뿐이다. 영화를 영화로 봐야지 왜 쩨쩨하게 현실에 집착하느냐는 거다. 하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재미 있는 영화가 좋다.
그런데 내 앞에선 “영화는 영화”라고 쿨하게 말한 사람들이 정작 ‘변호인’의 흥행을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로 치환하는 걸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영화를 영화로 봐야지 왜 쩨쩨하게 그걸 현실에 투사하나? 본인들에게 불편한 사실관계는 전부 외면하면서도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이중성은 부림사건의 진실을 더 깊게 파고들도록 자극하는 동인이 된다.
지금까지 추적한 부림의 진실들만으로도 충무로가 사건을 잘못 골랐다는 판단이 선다. 차라리 가상의 불임사건을 극화해서 임산부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는 변호인을 영화화했다면 어땠을까. 뭣도 모르는 서른 두 살짜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사건에 기자정신을 발휘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폭력적 무지의 만발’
취재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80년대 당시의 운동권 선수들 - 이른바 ‘전직 붉은 악마들’이다. 그들 중에서 부림사건의 피의자들이 공산주의자였음을 확언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추측이 아니라 확언이다). 물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잠시 억울하게 체포돼 조사받고 폭행당했을 가능성이 제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기소된 사람 중에서 ‘그냥 국밥집 아들’은 없었다는 데 진술이 일치한다.
당시 그 바닥의 선수들 사이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지금의 ‘일베충’ 같은 비하의 표현이었다. 부림사건 피의자들이 反정부를 표방했을지언정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결코 현재의 대한민국이 지지하고 있는 자유체제가 아닌 것이다.
당시의 그들을 종북으로 볼 수는 없겠으나 그들이 꿈꿨던 이상향이 남한보다는 북한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부림사건 피의자들을 민주화 투사로 미화하는 건 마치 뒷걸음으로 쥐를 잡은 소에게 위생 공로훈장을 포상하는 것만큼 어이없는 일이다.
전직 운동권 다음으로 큰 도움을 준 것은 당시 피의자들을 조사했던 공안검사들이다. 지금까지 법무법인 케이씨엘 고영주 변호사와 최병국 前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전화로 인터뷰했다.
이들은 이미 인터넷에서는 ‘악마’가 돼 있는 상태다. 왜? 영화 ‘변호인’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이 꾸준히 그렇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라는 말은 허울 좋은 레토릭일 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솔직히 말하면 공안검사를 인터뷰 하는 게 나도 겁났다. 그들은 과거 누군가를 고문한 적이 있는 사람들일 것 같았고, 매우 권위적일 것 같았고, 취재에 적극적으로 응해주지도 않을 것 같았다. 사실에 대한 취재를 한다면서도 나 역시 세간에 떠도는 풍문의 함정에 빠져 있었음을 고백한다.
실제로 만난 것이 아니라 전화 인터뷰이기 때문에 인상평에 한계는 있겠으나, 결과적으로 그들과의 인터뷰가 다른 어떤 취재보다 용이하고 협조적이었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했고 실수나 착오는 깨끗하게 인정했으며 전화를 걸어 시간을 빼앗는 내 쪽에 오히려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부림사건 피의자들이 세상을 뒤엎으려는 반체제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건 ‘입장’의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직접 겪은 건데 여기에 무슨 입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고영주 변호사 발언)
진짜 악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공안검사들이 오히려 ‘변호인’의 왜곡에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최병국 前 의원은 “공안검사를 나쁘게 묘사하고 사실을 왜곡해야 흥행이 되니까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오히려 영화를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 노무현 변호사에 대해 “그래도 붙임성이 있는 사람이었고 열심이었다는 기억은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 최 前 의원은 “나중에 대통령 되실 줄 알았으면 제가 더 잘 하는 거였는데…”라면서 웃기도 했다.
공안검사들은 피의자들을 고문한 게 아니라 그들과 토론을 했으며 그 토론에서 오히려 수세에 몰렸다고 술회한다. 한쪽 진술에만 근거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가설도 한 번 세워보고 싶어졌다. 다른 사건은 몰라도 부림사건 조사 과정의 실제 모습은 ‘변호인’이나 ‘남영동1985’보다는 ‘공동경비구역 JSA’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피의자들을 ‘철없는 청년들’로 생각했던 그때만 해도 부림의 인연이 30년 뒤 스스로를 악마로 만들 줄은 천하의 공안검사들도 몰랐을 것이다.
영화 속 악마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놓고 마음껏 분노하고 있는 이들에게 묻는다. 악마는 어디에 있는가? 진짜 악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불완전함은 인식하지 못하고 영화 몇 편에 타인을 절대악으로 단죄하는 사람들의 입술 위에서 악마는 노래할 뿐이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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