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는 조직으로부터 나온다
파워는 조직으로부터 나온다
  • 황성준 편집위원
  • 승인 2013.12.3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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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Rules For Radicals)을 읽고
 

2008년 9월 중국 단둥(丹東). 현지 안내인이 데려간 곳은 어느 한적한 압록강변이었다. 북한 영토와 가장 강폭이 짧은 곳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실제로 강 건너 편에 위치한 북한군 초소와의 거리는 10여 미터에 불과해 보였다. 허름한 키오스크가 한 개 있었다. 인적도 드문 이곳에서 장사가 되나 생각하고 있는데, 관광버스 1대가 오더니, 중국 관광객들이 왁자지껄 거리며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키오스크에 줄을 서서 소시지와 중국제 담배를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가로 가서 소리치니 북한 병사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관광객이 소시지를 던지니 북한 병사들은 허겁지겁 주워 담기 급급했다. 낄낄거리며 좋아하는 중국 관광객들, 그들 앞에서 온갖 재롱을 부리며 싸구려 소시지를 받아먹는 북한 국경수비대 병사들. 순간 속에서 뭔가 울컥거리는 것이 쏟아 올랐다. 병사들을 동물원의 원숭이로 만들어 버린 김정일 체제에 대한 민족적 울분이었다.

입만 열면 주체와 자주를 거론하면서 저런 꼴을 그냥 보고 있다니… 더 한심한 것은 우리 일행을 알아본 북한 병사들이 “남조선 동무들, 중국 담배 말고, 한국 담배 좀 던져 주시라우”라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었다.

병사들을 원숭이로 만든 北 정권

이날 저녁 단둥 시내로 돌아와 북한과 중국을 잇는 압록강 철교 부근에 위치한 해산물 전문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압록강 철교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철교 절반이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철교 절반에만 전기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켜져 있는 중국 쪽과는 정반대로 강 건너편의 신의주에는 불빛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신의주가 분명 대도시일터인데… 마치 지리산 부근 산간마을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의 불빛 밖에 보이질 않았다. 도시 전체가 암흑에 휩싸여 있었다.

불현듯 “공산주의= 소비에트 권력 + 전기화(電氣化)”라던 레닌의 명제가 떠올랐다. 그리고 독한 중국 화주를 내장 속에 부어 넣었다.

12월 19일 북한은 국방위원회 명의로 “예고 없이 남쪽을 타격하겠다”는 전화통지문을 청와대 국가안보실 앞으로 보내왔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했을 것이다.

또 북한은 지난 16일 백령도에 “전대미문의 파괴력을 가진 타결 수단들이 목표를 확정하고 발사 준비 상태에 있다”라며 “백령도는 거대한 무덤이 될 것”이라는 삐라를 살포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우리는 한가하다. 심지어 국정원을 해체시키지 못해 안달인 세력도 있다.

민주당이 제출한 국정원 개혁안을 살펴보면 “본색을 드러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이른바 개혁안의 핵심이 ‘대공수사권 폐지’이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서 국정원의 현실 정치 개입이 문제가 된다면 정치 개입을 막는 방안이 핵심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공수사권을 폐지하고 국내 파트를 사실상 없애자는 것은 국정원의 무력화, 더 나아가 사실상 해체시켜 버리자는 주장이다. 오히려 국정원의 역할 강화론이 나와도 시원찮은 시절에 이런 주장을 하는 진짜 저의는 무엇일까?

갑갑한 마음을 달래며 서재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을 꺼냈다. 사울 알린스키(Saul Aiinsky)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Rules For Radicals)이었다. 사울 알린스키는 미국의 대표적 좌익 조직운동가로서 미국의 사회주의 작가 업튼 싱클레어(Upton Sinclair)의 대표작 <정글>(Jungle)의 배경이 된 시카고 흑인 빈민지역 조직을 건설,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특히 힐러리 클린턴도 알린스키 조직에서 조직 활동교육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알린스키는 ‘조직가 훈련 인스티튜트’라는 조직가 교육기관(정규 과정은 풀타임 15개월이다!)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좌익 조직 활동가를 양성해 냈다.

알린스키의 조직론은 노동자 계급조직에 중점을 둔 기존의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론과는 달리 도시 빈민지역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도 알린스키 조직과정 이수

또 기존의 정통 공산주의 조직론과는 달리 이른바 ‘중산층 운동론’을 강조한 조직론이기도 하다. 알린스키 이론은 이미 1969년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에서의 도시 주민선교회의 일환으로 한국에 도입됐다. 알린스키의 제자인 로버트 화이트 목사가 한국으로 파송돼 알린스키식 공동체 운동을 소개했던 것이다.

이 움직임은 1970년대 도시빈민운동의 형태로 표출되며 발전되어 나갔다. 그러나 1980년 한국 운동권의 급속한 좌경과, 특히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주체사상파의 본격 진출로 인해 주변부로 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직접 봉기론’, 그리고 중산층을 ‘쁘띠 부르주아’라며 경멸하던 문화가 지배하던 운동권 분위기에서 알린스키 조직론이 중심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른바 ‘1987년 체제’ 이후 소위 ‘그람시의 진지전론’이 확산되면서 운동권 진영에서 중심부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록 소위 ‘정통파’는 “공상적 사회주의운동”이라고 폄하했지만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이른바 “중산층과 결합된 시민운동론”이 자리매김하면서 탄력을 받게 된 것이다.

바로 알린스키의 ‘공동체 조직론’을 바탕으로 각종 공동체 조직이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협동조합’을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으로 격상시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박원순 시장의 협동조합 지원과 맞물리면서 ‘협동조합’을 ‘생활공동체’, ‘경제공동체’, ‘의식화의 실천장’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린스키 공동체론이 한국 좌익진영에서 얼마나 대표적 지위를 가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참여연대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으나 아직 ‘정통파’에서는 이를 ‘소부르주아 운동론’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알린스키 조직론과 관련, 흥미로운 사실은 최근 미국에서는 티파티와 같은 우익 진영도 알린스키 조직론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9월 미국에 갔을 때 많은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알린스키 조직론을 연구하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알린스키 조직론이 주목되는 이유는 “적 전술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원칙 때문만은 아니다. 기동전 및 봉기를 기본으로 하는 기존 ‘정통파’ 운동론과 달리 “기존 체제에서의 장기적 활동을 중심으로 한 운동론”이란 점에서 보수주의 운동 진영에서도 써 먹을 만한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티파티 운동은 <급진주의자의 규칙>을 중간 활동가용 필수 교재의 하나로 사용하고 있다.

알린스키는 “변화는 힘(power)으로부터 나오고 힘은 조직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흔히 우리는 ‘파워’라는 단어에서 좋지 않은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파워’야말로 조직의 존재 이유(the reason for being)이다. 또 우리는 ‘자기 이익’(self-interest)이란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러나 ‘자기 이익’이 “주요 운동 동력”(prime move force)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밥그룻 싸움의 중요성(?)

우리는 특정 이권 싸움을 ‘밥그릇 싸움’이라면서 폄하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자. ‘밥그릇’이 중요하지 않다면,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물론 고상한 지식인들에게는 추상적 관념이나 개념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 대중에게는 ‘밥그릇’이 더 중요하고 실질적으로 다가온다. 애국보수운동이 보다 대중운동으로 전환되려면, 바로 이 “밥그릇” 싸움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 싸움을 벌여 나가야 할 것이다.

알린스키를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가진 자들의 근시안적 내부투쟁론”이다. 알린스키는 말한다. “나는 확신한다. 나는 어느 특정 재벌로부터 토요일 혁명을 위해 금요일에 지원금을 내도록 설득할 수 있다. 월요일에 처형될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재벌은 일요일에 얻을 막대한 이권 때문에 지원금을 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가진 자들을 가진 자들 끼리 대립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알린스키 조직론 가운데 우리 애국보수진영이 배워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대중운동을 정치입법투쟁과 결합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정치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표’이다. 이 기본적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각급 풀뿌리 조직은 ‘입법 연락관’(가칭)이란 직책을 만들고, 지역구 국회의원 및 지방자치단체장, 그리고 지방의회 의원들을 감시하고 압력을 불어 넣어야 한다. 이 경우에야 비로소 정치인들이 움직인다. 또 그래야만 그 조직이 그 지역에서 힘을 받는다.

내년 한 해도 쉽지 않은 해가 될 것 같다. 북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며 박근혜 정부의 향후 운명을 판가름 낼 6월 지자체 선거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좌익 활동가 알린스키 마저도 인용하길 좋아했던 보수주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의 인용문으로 글을 마치겠다.

“악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필수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황성준 편집위원·동원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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