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회식자리에서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남자들이 모여 수다를 떨었다. 주제는 ‘첫’이었다.
첫사랑과 첫키스의 풋풋하고도 아련한 추억을 회상하는 순정파(혹자는 이를 ‘주책파’로 분류하기도 했다!)도 있었으며, 첫 해외여행에서의 잊혀지지 않는 감흥을 시(詩)로 읊는 낭만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설렘과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정말 엉뚱하게도 ‘첫 가두시위’였다.
만 30년 전인 83년 9월 어느 날 저녁 종각 부근의 종로서적 앞. 지금은 폐업으로 없어졌지만 80년대만 하더라도 대학생들의 대표적 미팅 장소이기도 했던 이곳은 평상시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간데없고,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 와서 고백하지만 이날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정말 두려웠다.
대학 시절, 첫 가두 시위의 추억
지금이야 시내에 모여 시위하는 것이나 야유회에 놀러가는 것이나 심리적 준비 차원에서 별반 다를 바가 없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가두시위에 참여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상당한 결의를 요하는 것이었다.
시위 주동자는 무조건 구속돼 징역 1년에서 3년에 처해졌으며 단순 가담자도 강제징집되거나 정학 등의 학사처벌을 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징역살고 나오면 그만이고, 또 그러한 경력을 정치적으로 활용해 출세(?)한 사람들도 많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반정부 혹은 반국가 사범으로 찍히면 인생에 금이 간다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대학 1학년이었던 필자는 시위장소나 시간을 모른 채 2학년 선배를 따라 나왔다. 솔직히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나 겁쟁이 소리를 듣기는 죽기보다 싫었으며 따라서 태연한 척하려고 애썼다.
1학년 3명을 데리고 나온 2학년 선배는 “겁먹지 마! 괜찮아. 잡혀도 너희는 1학년이니까 훈방 정도로 끝날 거야. 아니더라도 까짓것 구류 3∼4일일거야”라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왜 이리 시간이 안갈까? 언제 시작하는 거지? 초조하게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와”하는 함성이 터졌다.
“어서 함께 모여 하나가 되자”라는 데모송이 울려 퍼지면서 인도에 있던 학생들이 박수를 치면서 차도로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전달! 전달! 청계천 방향으로!”라는 외침이 이어지고 시위대는 종로 1가 골목을 통해 청계천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미 청계천 방향에서는 시위 대열이 형성돼 있었다. 종로 방향은 이른바 ‘가짜 텍’(전술을 의미하는 tactic에서 나온 말)이었다. 경찰의 주의를 종로 쪽으로 유인한 다음 진짜 시위는 청계천에서 벌였던 것이다. 필자가 따라 나온 조는 ‘가짜 텍’ 유인조였던 것이다
이날 시위는 성공적이었다. 83년 최대 가두시위였다. 이날 시위 주제는 “일본 교과서 왜곡 규탄”이었다. 일반 시민들의 호응도 제법 좋았다. “아니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도 반대하지 못하나”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었던 것이다.
시위를 마치고 신림동에 위치한 한 자취방에 모였다. ‘세미나팀’이라 불리던 지하 서클 학습조직에서 이날 시위를 평가하는 자리였다. 첫 가두시위에 참여해 본 1학년들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긍지로 가득 찬 분위기였다.
3학년 선배가 입을 열었다. “수고들 했다. 이번 투쟁은 ‘한미일 3각 공동안보체제 저지 투쟁’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주부터 학습을 시작하겠다.” 이날만 하더라도 이 말에 주목한 1학년 학생은 없었다. 들뜬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무용담’을 늘어놓기에 바빴으며 ‘한미일 3각 공동안보체제’가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이해는 차후 이른바 ‘학습’을 통해 깨달아 가게 됐다. 학습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장기적으로 미국은 쇠퇴한다. 문제는 일본이다. 미국은 일본을 재무장시켜 약화되는 자신의 힘을 보강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미일 3각공동안보체제가 수립되면 한반도 해방(?)은 매우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따라서 어떠하든 저지해야 한다.”
최근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보수계 인사들로부터 “왜 한국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에 그토록 반대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때마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시아 패러독스’를 열심히 설명하면서 한일관계의 역사적 특수성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곤 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을 설득하기엔 역부족인 것으로 보였다.
도마에 오른 한국의 친중 스탠스
이들의 주장은 간단명료했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이란 동맹국, 즉 미국이 공격을 받으면 일본이 도와주겠다는 것인데 왜 반대하느냐”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셧다운’ 사태가 잘 보여주듯 미국의 국방비 삭감은 피할 수 없으며 태평양에서의 제해권 유지와 떠오르는 중국에 대한 견제를 위해서는 동맹국의 안보 분담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 이에 반대하고 친중적(?) 스탠스를 보이고 있어 미국의 동북아 안보 전략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일본을 대체할 정도의 안보 분담을 할 의사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서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한국을 배제했던 과거 애치슨라인의 경우와 달리 이른바 ‘신(新)애치슨라인’에서는 한국이 자발적(?)으로 바깥에 서려고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최근 한국에서는 이른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본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망해가는 명나라와 떠오르는 신흥세력 청나라에 대한 중립외교로 화를 면하고 있었는데 인조반정 이후 수구세력들의 명나라 사대정책으로 말미암아 병자호란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광해군은 정말로 ‘자주적 중립외교’를 추구할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광해군은 쿠데타를 막을 정도의 수도방위군 조차도 육성하지 않았던 것일까? 또 명나라를 미국에, 청나라를 중국에 비유하는 것이 현재의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은 것일까?
이 점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어설픈 ‘중립 자주외교’의 운명을 제2차 세계대전 직전 폴란드에서 본다. 폴란드는 소련과 독일 사이에서 이른바 ‘균형자’(balancer)를 자처했다. 그 결과는 분할 점령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로버트 케이건(Robert Kagan)의 <역사의 귀환>(The Return of History)을 다시 읽어 보았다. 케이건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역사가 끝났다는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종말론’, 그리고 이제 경제적 통합 및 경쟁 속의 ‘지구촌’이 형성됐다는 토머스 프리드먼의 ‘평평한 세계론’에 반대한다.
이러한 전쟁이 없는 ‘새로운 시대’(new era)에 대한 환상은 무너지고 잠시 휴가 떠났던 역사는 다시 ‘귀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강대국 내셔널리즘의 회귀’(the return of great power nationalism)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케이건은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정상으로의 복귀’(a return to normalcy)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는 ‘독재자들의 클럽’(the club of autocrats) 대(對) ‘민주주의 축’(the axis of democracy)의 대립구도로 전환돼 나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힘의 정치’로의 복귀
9·11 테러 이후 국제정치의 중심축을 형성했던 ‘테러와의 전쟁’은 현실성을 상실해 갈 것으로 예측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의 도전은 계속되겠지만 7세기로 돌아가자는 이들의 이념과 전망은 무슬림에게도 대안적 전망으로 다가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테러공격을 넘어선 ‘문명 간의 충돌’ 내지 ‘대립’으로 전환되기는 불가능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2010년 12월 시작된 ‘재스민 혁명’과 ‘아랍의 봄’이 시작되기 이전인 2008년에 출판된 책이라는 점에서 케이건의 통찰력은 매우 뛰어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케이건이 전망하는 세계는 ‘역사가 종말되거나 세계가 평평화된’ 새로운 시대도, ‘문명의 충돌’이 중심이 되는 세상도 아닌 ‘힘의 정치’(power politics)가 중심이 된 ‘역사의 계속’(혹은 ‘복귀’)이다.
케이건은 미국이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하더라도 상당한 기간 동안 ‘하나의 초강대국과 여러 강대국’(one superpower, many great power) 시대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즉 미국 1국의 우위성은 유지되지만 과거와 같이 혼자만의 힘이 아닌 다른 강대국과의 동맹을 축으로 세계질서를 유지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지점에서 동북아 문제는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은 떠오르고 일본은 ‘정상으로 복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선택은 명료하다. 중국을 견제하고 일본과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케이건은 적어도 이 책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최근 호주와 영국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중국과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필리핀·베트남·인도네시아 등도 일본의 대미(對美) 안보 협력 확대에 긍정적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한국은 어디에 설 것인가? 신애치슨라인 안쪽에 설 것인가? 아니면 바깥에 설 것인가? 왜 한국의 좌익세력은 그토록 ‘한미일 3각 공동안보체제’에 반대하고 있는 것일까? 나토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가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한미일 3각 공동안보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오히려 일본의 헛된(?) 야심을 애초에 제어할 수 있지 않을까?
만 30년 전 ‘일본 교과서 왜곡’을 명분으로 한 ‘한미일 3각 공동안보체제 저지 투쟁’에 참여했던 첫 가두시위에 대한 추억 속에서 한반도 안보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황성준 편집위원·동원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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