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회사나 마찬가지겠지만, 언론사에 처음 들어가면 선배들로부터 이런 저런 얘기를 듣는다. 기사를 잘못 쓰거나 꼼꼼한 취재를 못해 쓴소리를 듣기도 하고 소위 ‘물 먹었다’는 낙종을 해 낭패를 당하기도 부지기수다.
좀 더 윗어르신으로 올라가면 이른바 언론인의 사명감에 대해 종종 듣게 된다. 이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진실 보도를 추구하는 ‘정론직필(正論直筆)’이나 취재원과 친교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고도의 투명함을 요구하는 소위 ‘불가근(近)불가원(遠)’의 원칙 등이다.
1966년 매일경제신문 공채 1기로 입사해서 기자 생활만 48년. 소시적 기자 경력을 무기로 이런저런 칼럼과 방송에서 기자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여느 젊은 기자 못지않게 양질의 기사를 여전히 양산하는 원로 기자가 있다. 시사경제 월간지 <경제풍월>의 배병휴 대표.
매일경제신문 편집국장, 논설주간, 편집인을 거치며 경제 전문기자로 필명을 떨치다 경제풍월을 창간한 배 대표는 아직도 300페이지 가량의 이 잡지를 거의 혼자 만들다시피 하고 있다.
1999년 발행 이후 지난 14년 동안 휴일도 없이 회사에 나와 기사 쓰고 편집하며 살아 온 배병휴 대표를 <미래한국>이 만났다. 정론직필이나 투명함을 몸으로 실천한 그가 말하는 언론인의 사명은 ‘지사(志士)의 길’이었다.
1960년대 전방 GOP에서 느낀 대한민국의 실상
- 기자로서 외길을 걸으셨는데 처음부터 기자를 꿈꾸셨나요?
그렇게 거창하게 시작하진 않았습니다. 1960년대 초반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 복무를 마쳤는데 이력서 넣을 곳이 많지 않았어요. 정치외교학과 출신을 받아주는 데가 은행이나 언론사 밖에 없었거든요.
- 그래도 줄곧 최고의 경제기자로 이름을 날리셨는데 계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전 군대에서 경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느꼈습니다. 1960년대 초 한탄강 어귀에 있는 GOP 소대장을 했는데 당시에는 우리가 북한한테 이기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불안해서 밤에 잠을 못 잘 정도였죠.
우린 전기가 안 들어와서 호롱불을 켜놓고 지내는데 북한군은 전기를 사용했어요. 그리고 북한군은 콘크리트 막사에 있고 우린 토막사에서 주둔하는 식이었죠. 그래서 우리나라의 최우선 문제는 경제라고 생각했어요.
- 경제 기자로서 지켜본 박정희 정권은 어땠습니까?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이나 구미공단, 포철 준공식 등 정부의 경제개발 현장에 거의 매일 따라다니며 취재했어요. 이때 박정희 경제에 대해 신뢰감이 생겼죠. 박정희 대통령이 반공과 경제에 올인하는 것을 보고 ‘아, 이러면 김일성을 이길 수 있겠다’고 확신이 들었어요.
- 당시 기자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았나요?
아무래도 정치부 기자들은 독재라는 반감이 있었어요. 반공정책도 독재나 정권 연장을 위한 수단이라 여겼죠. 하지만 저나 다른 경제부 기자들은 ‘수출 100억 달러’ 목표 같은 것을 달성하는 것을 보면서 거의 전폭적인 지지를 했어요. 종합무역상사를 만드는 데 지원하고, 기업들의 아프리카나 남미 지사에 자금을 지원하는 식이죠.
한번은 고속도로 공사 현장에 있는데 갑자기 헬기가 오는 거예요.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온 것인데 와서는 폭파 방식을 바꾸라고 명령을 했어요. 본인이 해외 전문가들로부터 듣고 공부해서 얘기한 거죠. 그런데 그게 맞았어요.
- 당시 경제인들과 교류가 매우 활발했을 것 같습니다. 기업인들 사이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어땠나요?
쉽게 말해서 경제부 기자로서 제가 사는 세상의 99퍼센트가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경제정책을 지지했어요. 무역협회나 상공회의소, 전경련 모임에서 기업인들을 만나면 대통령이 경제에 친화적이고, 국가를 발전시키고 있다고 말했거든요.
이대로만 하면 배고플 걱정 안하고 일본도 따라가고 선진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제 개인적으론 대한민국의 자존심과 국격의 기본 골격을 형성한 공헌이 결코 작지 않다고 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현재 국격의 초석 다져
- 박정희 대통령을 이은 전두환 대통령은 최근까지 불법재산 추징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기업인들이 박정희 대통령에 자발적 신뢰를 보였다면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끌려간 경우인 것 같아요. 전 대통령에 대해선 인정을 안했다고 할까요. 개인적으로는 처음 전 대통령이 등장했을 때 순리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하나의 악업이 생기나 하고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 현재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분은 사실 용맹한 무인이었잖아요. 북한의 땅굴을 가장 먼저 발견하기도 했고 베트남전의 무공도 상당했죠. 그리고 역사에서 판단할 문제지만 10·26의 위기를 관리한 면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너무 옹졸해요. 무인이 이래서 되나 싶어요.
- 전직 대통령의 불법 재산을 추징하는 소위 ‘전두환 법’이 다른 전직 대통령들에게도 영향을 줄까요?
글쎄요. 현재 정국 상황에서 다른 과거 정권에 손을 대기는 쉽지 않죠. 특히 김대중 대통령 아들의 재산에 대한 의혹이 있기는 하지만 쉽게 조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호남 민심이 걸림돌이죠.
게다가 박근혜 현 대통령이 아버지의 정치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을 처리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엄청난 정치적 역풍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 대표적인 경제기자로서 본인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전 다른 건 모르겠고 글을 빨리 쓰는 밑천 하나로 장수했어요. 옛날 얘기지만 선배 기자들 대필도 많이 했죠. 예전에 매일경제 정진기 사장님 시절에 퇴근할 때 종종 다른 선배 기자의 원고를 고치라고 주셨어요. 그럼 전 무교동 맥주 집 같은 데서 빨간 펜으로 다시 쓰고, 다음날 새벽에 출근해서 사장실에 놓으면 그게 선배 이름으로 신문에 나왔어요. 옛날 얘기죠.
- 다른 기자들 보면 정치권이나 관계, 혹은 기업체로 진출을 많이 하시는데 기자만 고집한 이유가 있나요?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정부 대변인하라는 제의가 있었는데 전 그런 것 할 생각을 전혀 안해봤어요. 노태우 대통령 때는 제 고향인 경북 김천에서 국회의원 출마 권유도 있었죠.
- 경제인 초청 골프모임을 주관하시면서도 정작 본인은 골프를 못 치셨죠.
당시 제가 매일경제신문에서 하나의 브랜드로 어느 정도 인정 받았어요. 그래서 회사에서 주관하는 골프모임에도 당시 이건희 삼성 부회장, 박태준 포철 회장, 구자경 LG 회장, 김우중 대우 회장 등을 초청했죠.
그런데 저는 막상 골프를 배울 시간이 없었어요. 일요일에도 출근해서 기사 쓰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리고 돈도 없었고요. 부장 넘어서야 겨우 월급 가지고 먹고 살 수 있어요. 여유가 없었죠.
- 경제기자들이 기업체 후원으로 골프 치고 촌지 받는 것이 보편화돼 있지 않나요?
전 당시 이건희 삼성 부회장이 재계 총수들 신년인사 골프모임에서 ‘머리 올려주겠다’고 몇 차례 얘기해도 사양했어요. 청와대 주최 골프 모임도 마찬가지고요. 간부들도 스포츠 기자 시켜서 골프 부킹 민원 넣다 저한테 걸리면 혼났어요.
- 그런 식으로 혼자 고고하면 불이익도 당했을 텐데요.
청와대나 정보기관에서 저에 대해 조사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뭐 가진 게 있어야죠. 전 아파트도 없고 주식이나 땅, 회원권 같은 걸 사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재벌들과 그렇게 친했어도 한번도 돈을 받은 적이 없어요.
룸살롱이나 골프장을 안 가는데 어떻게 돈을 받겠어요. 논설주간 때 ‘북한은 왜 대우를 편애하는가’ 라는 칼럼을 썼는데 친한 사이였던 김우중 회장이 사무실로 뛰어 왔는데도 안 고쳐 줬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보수언론의 길
- 매일경제신문 퇴직하시고 월간 <경제풍월>을 창간하셨습니다.
퇴직금이 정상적으로 한 3억여 원 되는데 실제 받고 보니 1억6천만 원이었습니다. 제가 IMF 때 퇴직금 깎자고 주장했거든요. 그 퇴직금으로 경제풍월을 만들었어요. 기자 원로의 말을 사회에 전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읽고 젊은 사람한테 전해 주라는 취지로 이름도 풍월이라고 지었어요.
- 보수 경제지의 경영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네. 처음에는 기자도 두고 필진들 원고료도 줘 가면서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자도 없어요. 김동길 박사 같은 분들 원고료도 못 드리고요.
몇 번 문 닫으려 했는데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서 14년 동안 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이제 접겠다고 하니 김동길 박사가 주머니에서 강연료 100만원을 내놓으면서 조금 더 해 보자고 한 적도 있어요. 물론 지금도 적자입니다.
- 기사 작성이나 편집을 거의 혼자서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힘들지 않으세요.
지난 세월 토요일, 일요일 만근하다시피 했어요. 그리고 예전에는 이곳저곳에 부탁할 사람도 많았는데 지금은 우리 세대가 현역에 없다보니 그것도 힘들어요. 특히 DJ 노무현 정부 시절 말도 못했죠.
김대중 정부 시절에 농어촌부채 탕감 정책 반대했다가 사람들이 몰려와서 집에 못 간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나라당 초청 연사로 나가서 ‘지금 대한민국이 먹고사는 건 박정희 전 대통령 덕분이다’고 했다가 광고가 다 잘리기도 했어요.
- 경제풍월 대표로서나 개인적으로 앞으로 계획은 어떠십니까?
원래 고서점을 하고 싶었어요. 일제 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6·25전쟁과 경제개발계획 등 대한민국 근대화 관련해 역사를 조명하고 대중화하는 책을 내고 싶습니다.
- 대표님은 매일경제신문 공채 1기시고 직선 편집국장 출신입니다. 언론인 선배로서 후배 기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저는 손으로 쓰는 기자로 시작했고 아직도 손으로 써요. 그러니 지금과는 많이 다르죠. 굳이 말하자면 지금 기자들은 자기 위주인 게 좀 흠인 것 같아요. 우리 때는 우국충정이나 희생 정신 같은 게 몸에 배 있었습니다.
- 그렇다면 대표님이 생각하신 언론인의 길은 무엇인지요.
옛날 우리 선배들은 일종의 지사였습니다. 시대정신에 어긋나지 않고 앞서가는 마인드와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죠. 특히 투명 윤리 부분에서 일반 사람보다 뛰어나야죠.
인터뷰/김범수 발행인 www.kimbumsoo.net
정재욱 기자 jujung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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