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연가’로 엿보던 대한민국
‘겨울연가’로 엿보던 대한민국
  • 미래한국
  • 승인 2013.07.25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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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탈북민 이영희 씨 (2009년 입국)


나는 17살 때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여군에 입대했다. 우리 가족 중에는 간부가 아예 없다. 옛날 해방 전엔 잘 살았다고 한다. 고향은 함흥이고, 해방 전 외증조부가 함경남도 순사부장이셨다.

함흥시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 살았다고 한다. 해방 이후 공산화되면서 우선적 타도 대상으로 추방됐고 재산도 몰수당했다. 이렇게 출신성분이 나빴으니 집안에 공산당 간부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 때부터 너무 남이 시키는 일만 하고 산다는 데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서 군대에 입대했는데 학생 시절부터 운동신경이 좋아서인지 많은 땀을 흘리지 않고도 남들보다 잘했다. 그렇게 2년 10개월 만에 부소대장 상사가 됐다.(북한 말로는 사관장이라고 함) 그리고 장교가 되려고 서류가 올라갔는데 3번의 신원조회 끝에 결국 실패로 끝났다.

입당 역시 어려웠다. 특출난 공로를 세우면 심사 없이 그 자리에서 입당이 허용된다. 그렇게 해서 겨우 입당이 성사됐다. 이후 함흥에 있는 지방대학인 함흥 경공업대학에 당의 추천을 받아 입학했다.

300만명 이상의 아사가 시작된 고난의 행군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결국 생활고로 인해 다니던 4년제 대학을 중퇴했다. 먹고 살길을 찾아야 해서 어느 날 북·중 인접지역에서 무역업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중국 밀수업자와 같이 일하면서 몰래 중국을 드나들며 장사했다.

그게 1998년이다. 한국에 살다 중국에 가면 그리 초라해 보이는데, 북한에서 중국에 처음 가니 깜짝 놀랐다. 그것도 중국의 변방인 연길에서 그랬다. 시골집 창고를 우연히 봤는데 쌀이 있는 걸 보고 부러웠다. 어느 날 밀수업자가 내게 VCD를 줬는데 ‘모래시계’였다. 이어 내가 가장 좋아하던 드라마인 ‘겨울연가’를 보면서 대한민국이 이렇게 산다는 걸 알게 됐다.

밀수업자는 우선 중국에 오라고 권유했지만 쉽게 발걸음을 못 떼고 10년이나 고민했다. 그래도 북한이 고향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2007년 결국 탈북했다.

2년간 중국에서 고생을 하다가 한국에 가는 길이 보였다. 대사관에 진입하는 것도 생각했지만 중국 공안들을 보고 무서워 포기했다. 결국 브로커들의 안내를 받아 태국을 통해 2009년 12월 한국에 왔다.

북한에선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했다. 중국에서의 2년은 먹고 싶은 건 먹었지만 항상 불안했다. 경찰차가 집 근처에 오면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집도 도망가기 쉽고 경찰을 미리 탐지하기 쉬운 곳으로 얻었다.

또 한가지 불안했던 건 가족들이었다. 1년간 돈을 모아 준비했다가 연길에서 동생을 만나 돈을 건네줬다. 한두번은 줬는데 큰 도움이 안 됐고, 세번째부터는 돈을 구하기 어려워 더 걱정이 됐다. 보내지 못하면 괴로워 잠을 못 잤다.

결국 어머니를 먼저 데려오고 그 후에 남동생네 가족을 데려왔다. 지금 다들 서울에서 살고 있다. 어머니는 6·25 때 먼저 월남한 외삼촌을 만나는 게 소원이었다. 외할머니의 유훈이기도 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극적으로 만났다. 60여년간의 분단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아픔을 주는지를 내 가족의 사례에서 절실히 느꼈다.

세이브엔케이 7월 제175회 월례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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