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불빛이다”
체코 여기자의 목소리에 감격이 묻어 나왔다. 도요타 4륜구동 픽업 화물칸에 앉아 있던 우리 다국적 기자단은 일제히 일어나 체코 여기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서 보이는 인공의 불빛! 드디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도착한 것이었다. 우리는 함성을 질렀고 옆에 있는 동료들과 서로 부둥켜 안았다. “저곳에 가면 전기가 있겠지!” 해발 3,848m 힌두쿠시 산맥 카박 패스(Khawak Pass)를 넘어 오면서 얼마나 전기에 굶주렸던가?
가져온 소형 발전기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노트북 컴퓨터와 위성 전화기 배터리 충전 정도였다. 그나마도 발전기를 작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가솔린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해야만 했었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만난 전기의 반가움
힌두쿠시 산맥의 별빛은 정말 화려했다. 시인이 보았더라면 아름다운 노래가 만들어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화약 냄새에 찌들어 있던 필자의 눈에 비친 자연의 별빛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리운 것은 ‘인공의 불빛’이었다. 아니 ‘문명’이었다. 관심이 있는 별빛은 남십자성뿐이었다. 당시 위성 전화기를 작동시키려면 안테나를 남십자성 방향으로 맞춰야만 했기 때문이다.
2011년 11월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민가를 빌려 취재본부로 삼았다. 가장 시급한 일은 전기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타지키스탄 국경을 넘어 가져온 소형 발전기를 설치했다.
다행히 가솔린을 충분히 구입할 수 있었기에 조금 사정이 나았지만 용량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힌두쿠시 산중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전기가 들어오는 지역이 있었으나 이는 정부 혹은 군기관 등에 한정돼 있었다.
나머지는 자가 발전으로 해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금 사정이 나은 곳이 카불 인터콘티넨탈 호텔이었는데 유엔 등 국제기구 관계자들과 여러 외국 정부기관, 그리고 미리 들어온 언론팀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전기 다음으로 시급한 문제는 물이었다. 수도는 작동하지 않았으며 결국 우물물을 길어와야만 했다. 아프가니스탄 현지 청소년 몇 명에게 ‘알바’를 시켜 물을 구입했다. 식수도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목욕 같은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겨우 이빨만 닦을 수 있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TV방송 마이크를 잡아야 하는 여기자들에게만 세숫물을 제공하는 ‘특혜’를 베풀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막 진주해 진지를 구축한 러시아 비상사태부 본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취재를 마치자 러시아 비상사태부 관계자가 도와줄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한 유럽 여기자가 대답했다. “샤워할 수 있을까요?” 러시아 비상사태부는 샤워시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가동되는 것은 아니었다. 물을 데워야만 했다. 물이 데워지자 기자단 일행은 일제히 웃을 벗고 쏟아지는 더운 물에 몸을 맡겼다. 남녀 구별도 없이 모두 발가벗고 샤워를 즐겼다.
최근 대니얼 예긴의 <탐색>을 읽었다. 부제 ‘에너지, 안보, 그리고 현대세계의 재구성’(Energy, Security, and the Remaking of the Modern World)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21세계 에너지 위기와 현황 그리고 그 대책 및 전망에 관한 책이다.
즉 석유(Oil)로 구성된 현대 문명세계와 이에 관련된 국제안보 질서 그리고 국제정치경제 상황에 대해 기술한 책이다. 현대 에너지문제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에너지가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문제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환경 문제와 새로운 에너지 개발 현황에 대해서도 놀라울 정도의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고 있다.
물론 ‘지구온난화’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껄끄럽게 느껴질 대목도 적지 않다. 그러나 예긴은 균형감을 상실하지 않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인정하지만 일부 극단론자들의 말세론에도 공감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또 강경 시장자유주의자 눈에 거슬리는 지적도 없지 않다. 예긴은 시장질서가 기본이란 자세를 취하면서도 환경과 에너지 문제에서는 정부의 개입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탐색>은 브루킹스연구소의 지원 하에 오바마 미 대통령의 에너지 정책에 ‘조언’하기 위한 책이다.
에너지 문제는 국가들의 ‘게임’
이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결론 부분에 나오는 예긴의 ‘기술 낙관주의’에는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에너지 문제의 시급성이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현대 문명세계는 에너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국가와 전쟁의 운명도 에너지에 좌우돼 왔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에너지 없이는 대소변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현대 문명의 현실이다. 특히 에너지 자급률이 거의 제로 지점에 가까운 대한민국에게 에너지 문제는 생존의 문제이다. 사실 북한의 위협을 제외한다면 대한민국의 최고 현안은 에너지의 안정적 수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정치인들과 이른바 지식인들의 담론을 살펴보면 에너지 문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에너지는 공기처럼 원래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그냥 거저 주어질 것인 것처럼 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고 있다.
에너지 문제는 ‘국가들의 게임’(a game of nations)이다. 어렵게 산업화를 이룩해 세계선진 문명세계에 진입한 대한민국은 IT분야가 지배하는 정보화시대에 앞서가는 데 성공했다. 이제 또 다시 에너지 문제가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 세계 문명의 주역이 될 것인가 아니면 변방으로 주저앉을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악무한적으로 탁상공론만 일삼고 있는 ‘현대 주자학자’들을 담론의 주류에서 몰아내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황성준 편집위원·동원대 초빙교수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