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 유동인구가 100만 명에 육박하는 서울 강남역 한복판. CGV가 입점한 스타플렉스 건물의 지하 1층 좁은 계단으로 내려가면 넓은 크기의 지하서점에 도착하게 된다.
이문열, 김 훈, 이문구 등의 캐리커처가 그려진 통로는 책방의 분위기를 물씬 내지만, 알라딘의 마술램프가 그려진 서점 안의 풍경은 색다르다.
깔끔한 인테리어와 책장은 여느 책방과 같지만 새 책 특유의 종이냄새는 덜하다. 서점보다는 도서관에 가까운 느낌이 앞선다. 더 인상적인 것은 ‘매입 코너’다.
번호표를 뽑고 20여 분을 대기한 뒤 가져온 책의 상태를 검토 받으면 헌 책이 현금으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만족해서 돌아가는 매입자들의 표정. 이곳은 알라딘이 운영하는 중고 책 서점이다.
새 책방 못지않은 폭풍 야기
알라딘이 처음으로 중고책방을 연 것은 2011년 9월 종로에서였다. 강북지역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으로 꼽히는 종로2가 지오다노 사거리에 위치한 1호점은 알라딘 중고서점의 지향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담한 뒷골목에서 뽀얀 먼지와 함께 운영된다는 헌책방의 전형적인 이미지에서 탈피, 중고책방이 대로변에 위치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알라딘은 신촌, 분당, 강남, 대학로, 광주, 울산, 부산 번화가에도 매장을 열며 이와 같은 흐름을 지속해 나가고 있다. 주황색 바탕에 파란색 글씨로 ‘알라딘 중고서점 책 삽니다-오늘 들어온 책 0000권’이라는 간판이 있어 혼잡한 인파 속에서도 알아보기가 쉽다.
책을 파는 방법은 간단하다. 알라딘에 회원가입이 된 상태에서 책을 들고 매장으로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매입 창구의 직원이 최상-상-중 등으로 책의 등급을 책정한 뒤 매입가를 제시한다. 동의의 의미로 서명을 하고 나면 곧바로 정산이 이뤄진다.
매입이 불가능한 경우는 5쪽이 넘는 볼펜메모, 제본 탈착, 구성품 누락 등의 사유가 있을 때다. 참고서, 수험서, 잡지, 전집 등도 매입이 제한되며 보유 재고량이 알라딘의 판매능력을 초과한 경우에도 매입이 거부되거나 매입가가 낮아진다.
예를 들어 2013년 2월 5일 현재 <안철수의 생각>은 재고수량이 너무 많아 아무리 새 책이어도 1,000원 이상으로는 받을 수 없다.
책을 팔러 온 사람들은 대기하는 시간동안 ‘고객’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매장별로 하루에도 수천 권의 책이 들어오는 알라딘 중고서점은 새 책방 못지않은 보유고를 자랑한다.
더군다나 베스트셀러의 경우 50~55%의 매입가 인센티브가 있기 때문에 신간 물량이 많다. 즉, 알라딘의 중고서점은 헌책방의 ‘수집’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철저히 수급 중심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집중한다.
알라딘 중고서점이 헌책방 시장에 일대 지각변동을 가져온 것은 일면 당연하다. ‘헌책방 명가’ 신촌 일대의 서점들은 알라딘 신촌점의 출현과 함께 작지 않은 폭풍에 휘말려들었다.
빠른 회전율과 깨끗한 시설로 잘 꾸려진 알라딘의 신무기는 장기불황 속에서 싼 값으로 책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욕구와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알라딘이 도서정가제에 ‘나 홀로 반대’한 이유
알라딘이 고집하는 ‘고객지향 노선’은 얼마 전 도서정가제 반대 입장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도서정가제는 한 마디로 책의 가격을 제한하는 법이다. 이 제도가 처음으로 시행된 것은 2003년 2월이었고 2007년 한 차례 개정되어 출간 18개월 미만의 새 책은 19% 이상 할인할 수 없다.
이 법률이 다시금 조명을 받은 이유는 최재천 민주통합당 의원이 도서정가제와 관련된 개정안을 발의했기 때문이다. 현 제도를 ‘유명무실한 것’으로 단언한 그는 출간 시점과는 관계없이 정가의 10% 이내에서만 할인 판매할 수 있고 도서관에 판매하는 간행물, 전자출판물 등에 대해서도 도서정가제를 적용하도록 개정안을 마련했다.
애초 도서정가제가 시행될 때 대다수 온라인 서점들이 반발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개정안에 대한 반대는 거의 없었다. 오직 알라딘만이 홈페이지에 반대성명을 내고 반대여론을 모으기 위해 나섰다.
“신간에 대한 할인 제한을 구간에까지 확대하면 독자의 손해는 물론이고 판매권수 감소로 저자의 인세 수입도 감소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알라딘의 ‘나 홀로 반대’는 즉시 출판업계의 뜨거운 반발을 야기했다. 급기야 김영사, 사회평론, 양철북, 창비, 돌베개, 마음산책, 뜨인돌, 현암사, 산지니 등의 출판사들은 알라딘에 책 공급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전에 없는 출판사들의 단체행동으로 핀치에 몰린 알라딘은 결국 1월 30일 출판사 쪽에 사과의사를 표명했다. “출판계 다수의견을 받아들여 도서정가제에 협조하겠다”는 것으로 의견을 바꾼 것이다.
책은 '특수 재화'인가?
도서정가제에 찬성 입장을 표명하는 사람들은 주로 책이라는 재화의 특수성을 언급한다. 책이란 단순히 하나의 상품이 아닌 그 사회의 문화와 의식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발간한지 오래된 책이라 해도 가격할인의 범위를 자율에 맡겨서는 곤란하며 도서정가제와 같은 보조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선진국의 사례를 들어가며 주장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견해는 지난 10년 간 시행된 도서정가제에도 불구하고 도서시장이 전혀 살아나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황폐해졌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가계의 월평균 도서구입 비용은 2003년 2만 6,346원에서 2005년 2만 1,087원으로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오히려 떨어졌다. DMB TV, 태블릿PC, 스마트폰 등의 활성화로 이 수치는 2011년 2만 570원까지 떨어진 상태다.
여기에 덧붙여 중고 서점이 활성화되면 도서정가제의 유명무실은 더욱 가속화될 소지도 있다. 2012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보자. 출간한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책이지만 중고 서점에 가면 새 책이나 다름없는 헌 책을 50%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
중고 서점이 흥행하는 현재의 상황은 도서정가제 강화가 과연 찬성자들의 생각대로 도서시장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
시장은 고객들의 요구사항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먼저 열리는 것이고 보면 지금 필요한 것은 책의 고매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고민하는 ‘고객지향 노선’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그 행렬의 가장 앞줄에 서 있는 것은 알라딘이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