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문제와 나의 증언, 그리고 사상적 방황
탈북자 문제와 나의 증언, 그리고 사상적 방황
  • 황성준
  • 승인 2012.04.17 08: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휘태커 챔버스(Whittaker Chambers)의 <증인>(Witness)을 읽고

황성준 편집위원·동원대 초빙교수
최근 박선영 의원의 단식투쟁과 차인표를 비롯한 유명 연예인들의 동참으로 탈북자 문제가 다시 사회 중심 이슈의 하나로 떠올랐다. 탈북자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도 뜨거워지고 있으며, 중국도 이미 단순히 외면할 수만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실제로 중국은 일부 탈북자들의 한국행을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사회 내부에서는 ‘진보’라는 허울을 쓰고 탈북자 문제를 애써 외면하는 풍조가 만연돼 있다.

탈북자라는 단어는 1994년 러시아 북한 탈출 벌목공 이야기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필자가 만들어낸 조어(造語)이다. 당시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탈출한 북한인들이 러시아를 유랑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부를 용어가 적합지 않았던 것이다. 그전에는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을 ‘귀순용사’ 혹은 ‘망명자’ 등으로 불렀는데, 이 모두가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편의상 ‘북한을 탈출한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탈북자’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후 이 조어가 일반화되면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결코 탈북자 용어의 ‘저작권’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탈북자’ 용어를 처음 사용하다

1994년 1월 필자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형적 ‘386운동권’의 한 사람이었던 필자는 1980년대 후반 골수 공산주의자였다. 굳이 다행스런(?) 점이 있었다면 김일성 주체사상파는 아니었다. 오히려 주체사상파와 ‘사상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체사상을 비판한 것으로서, 주사파보다 더 철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임을 자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에 처음 충격을 준 것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였다. 그러나 이것도 ‘과학적 사회주의의 갱신’으로 이해하려 들었으며,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1990년 12월 처음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당시 필자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되새겨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약 한 달간의 모스크바 경험 속에서 필자는 ‘다소(?) 경제적 어려움이 있지만, 노동자가 주인 된 세상인 소련이 썩어빠진 자본주의 세상보다 백만 배는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으며, 또 그렇게 한국에 있는 동지들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겉모습만 보았기 때문이며, 혹시 이념과 맞지 않는 팩트(fact)가 눈에 띄면 애써 눈을 감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1년 8월 두 번째로 소련에 들어가 본격적 생활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소련 사회주의의 실상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의 이념은 그리 쉽게 바뀌기 않는다. 눈에 보이는 부정적 현상들을 애써 무시하고 머리 속을 꽉 채우고 있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틀에 현실을 끼워 맞추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력도 압도적인 ‘부정적 팩트’의 홍수 속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대략 1992년 초 소련 사회주의는 잘못된 체제라고 결론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념적 인간은 정말 완고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이 사회주의 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 자체에 대한 포기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현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이념으로서 그리고 이론으로서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정당하다’는 것이 당시 필자의 사고였다.

이러한 사상적 방황을 겪고 있는 와중에 국내에서 조직사건이 발생, 귀국을 잠시 미뤄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러시아에 남아서 공부나 실컷 하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었으며 그리하여 1992년 3월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경제학부 대학원에 적을 두게 됐다. 소련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점의 기원과 해결책을 찾기 위해 소련 경제사를 공부해 보고자 함이었다. 당시 필자는 1920년대 소련의 신경제정책, 그리고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했으나 스탈린에게 우경분자로 몰려 처형당한 부하린의 이론에서 희망을 찾으려 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한국에서 온 맑스-레닌주의 괴물

당시 러시아 일반 학생들은 필자를 정말 신기한(혹은 괴상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자신들은 전혀 관심도 없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하려고 온 한국인(그것도 북한인이 아니라!)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던 것이다. 반대로 사회주의 경제학을 신봉하는 일부 원로교수들에게 마르크스와 레닌의 주요 저작들을 줄줄 외우는 필자의 모습은 ‘레닌의 환생’ 쯤으로 비치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논쟁을 소개하자, “한국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수준이 우리(소련)보다 훨씬 높다”라며 경탄하는 소련 아카데미 회원들의 모습을 보고, 정말로 경악한 바 있었다.(당시 소련 과학 아카데미에서 출판된 교과서들을 놓고 훈고학적으로 공부했었는데…)

아무튼 엄청난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를 느끼면서 이를 조화시켜 보려고 노력했다. 당시 러시아로 역수출되기 시작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영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영어 강사로 위장해서 러시아에서 트로츠키 그룹을 조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부하면 할수록 현실 사회주의 문제가 단순히 스탈린주의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마르크스주의 세계관, 그 자체가 현실과 부조화를 이룬다는 ‘잠정 결론’을 내리게 됐다. 이러한 결론을 내리게 된 데는 당시 러시아어로 읽었던 하이예크의 <치명적 자만>도 큰 도움을 줬다.

매우 조잡한 형태로 등사된 하이예크의 <치명적 자만>이 러시아 학생들 사이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이를 구해서 읽어 보게 된 것이었다.(한국에서 조야한 형태의 일본어 번역본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접하더니, 러시아에서 갱지에 등사된 러시아어판 하이예크를 읽게 되다니!)

그러나 이러한 ‘잠정 결론’에도 불구, 사회주의 사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이론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두뇌 속에서 해체되고 있었지만, ‘신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여전히 가슴 속에서 고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방황 속에서 생계 유지를 위해 돈벌이가 필요했으며 이러한 돈벌이의 목적으로 여러 언론기관 및 잡지에 글을 쓰고 있었다.

탈북자 문제 취재 이후 ‘변절자’로 낙인

그런데 1994년 1월 월간조선으로부터 취재 요청을 받은 것이었다. “시베리아 벌목장으로부터 탈출한 북한인들이 러시아에 많이 있다는 정보가 있는데 이에 대해 취재해 달라”는 것이었다. 북한 탈출 벌목공이라고? 이 이야기는 이미 1993년부터 러시아 언론에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줄 알고 있었다. 어느 모스크바 주재 한국 특파원과의 만남에서 북한 벌목공 이야기를 꺼낸 적도 있었다. 당시 이 특파원은 “기사거리가 안 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었다. 그런데 나보고 취재하라고? 북한사회에 대한 호기심도 작동, 취재에 응했다. 이 기사는 월간조선 1994년 3월호에 <북한 탈출 벌목공들의 러시아 유랑 25시>라는 제목으로 실렸는데 당시 한국사회의 반응은 매우 뜨거운 것이었다. 한국 최고의 언론상이라고 할 수 있는 관훈언론상이 수여되기도 했다.

이 기사가 나가고 탈북자 문제가 이슈가 되자 대학 선후배로부터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한결같이 욕하는 내용이었다. “너 같은 놈을 후배로 여겼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모대학 교수를 비롯해 “변절자의 최후는 처참한 죽음 뿐”이라는 변호사 후배의 전화까지… 한마디로 대학 입학 이후 형성됐던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붕괴하는 순간이었다. 정말 외로움과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이 과정 덕분에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됐던 것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과거의 사상적 고뇌(?)를 되씹게 된 데에는 최근 읽은 휘태커 챔버스의 <증인>도 한 몫 했다. 이 책은 지난 호에 소개한 ‘미국 보수주의 6대 경전’ 중의 하나로서 ‘반공적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책이다. 미국 매카시주의의 희생양으로 알려졌던 미국 고위 공직자 앨저 히스가 소련 간첩이었음을 증언하는 내용으로 자서전적 형태로 저술한 책인데, 공산주의의 본질과 공산주의자들의 심리 상태에 대해 매우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히스가 소련군 첩보기관의 협력자였음은 소련 붕괴 이후 소련 문서에 의해 확인됐다! 혹자는 히스의 이름이 KGB 비밀문서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히스가 소련 간첩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히스는 KGB가 아니라 소련군 첩보기관인 GRU 소속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챔버스는 공산주의를 하나의 유사 종교로 간주한다. 인간의 힘으로 신이 없는 현세에서 지상낙원을 건설하려는 신앙(faith)이라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많은 인텔리들에게 호소력을 지닌 이유도, 또 공산주의가 힘을 가진 것도 바로 이러한 ‘신앙’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신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었을 때부터 시작해 바벨탑을 쌓는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신과 신비주의를 제거한 인본주의’의 사회과학화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이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세속주의적 인텔리들이 끊임없이 공산주의 혹은 그 유사품에 현혹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와 그 추종자들은 신으로부터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를 자신들의 영웅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전향의 계기

이 책은 골수 공산주의자로서 소련군 첩보기관 협력자였던 챔버스가 자신의 사상적 오디세이에 대해 자신의 자녀들에게 들려주는 형태로 구성됐다. 챔버스가 완전하게 공산주의를 벗어난 것은 세속주의적 인본주의를 벗어나 신을 받아들이면서부터이다. 챔버스는 “신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하며 바로 신이 부정될 때 ‘현세적 신’, 즉 공산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챔버스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내 이야기를 읽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사회주의 및 그 유사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체첸, 다게스탄 등과 같은 분쟁지역을 취재하면서 인간과 신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인간이 신의 위치에 서서, 천국을 지상에 건설하려는 모든 형태의 시도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행위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미래한국)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