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7일 자유아시아방송(RFA)은 “김정일 사후 애도 기간이 수일째 계속되면서 북한 주민들이 ‘강요된 통곡’ 때문에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방송은 북한 소식통을 인용, “주민들이 보위부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억지로 우는 흉내를 내면서 ‘이 지긋지긋한 날들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과거 조선시대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상가(喪家)에서 곡소리가 끊겨서는 안 되었다. 유족들은 장례가 끝날 때까지 밤낮으로 울어 목이 쉬고 심지어 탈진까지 했다. 그래서 조문객들이 함께 밤을 새우며 유족의 슬픔을 덜어줬다. 그렇다고 조문객들에게 통곡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되레 고인을 욕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버이를 떠나보낸 상주(喪主)는 스스로 죄인 행세를 한다. 하여 슬퍼도 내색하지 않고 그 슬픔을 안으로 새겨야 한다. 혹시 지인들 중 문상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도 속으로만 서운해 할 뿐 내색하지 않는다. 그게 고인을 욕되게 하지 않는 효의 예다. 공자도 ‘상례(喪禮)의 근본은 형식이 아니라 슬퍼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북한은 김정일 장례를 치르면서 주민들에게 통곡을 강요했다. 우리 측에다는 조문하지 않는데 대해 앙탈을 부렸다. 왕조시대에서나 있을 법하고, 퇴행적인 전체주의 북한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결국 북한은 경망스런 행동으로 김정일을 두 번 죽게 했다. 김정은의 작위적인 효행이 불효막심한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북한의 천박스러운 경거망동은 지난 2일 국방위원회 명의로 우리 정부 측에다 그 무슨 ‘공개질문장’이란 걸 보냄으로써 극에 달했다. 질문장에서 북한은 “민족의 대국상 앞에 저지른 대역죄를 통감하고 사죄할 결심이 돼 있는가”라며 조문 앙탈로 서두를 장식한 다음, “천안호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을 걸고 우리를 더 이상 헐뜯지 않겠다는 것을 세계 앞에 공언할 수 있는가”라는 넋두리로 뒤를 이어갔다. 그밖에 대북심리전 중지와 남북교류 재개 및 활성화,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에 대한 호응, 국가보안법 폐지용의 등을 묻는 9가지 내용을 담았다.
배꼽이 웃을 일이다. 죽은 자에게 한없이 관대한 민족성정으로 우리 정부는 그나마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 조문을 허용했다. 그것만으로도 북한은 우리 정부를 향해 머리 조아려 깊이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죄인으로서의 상주인 북한이 취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다. 그런데도 북한은 한국 정부 비난에 게거품을 물다가 느닷없이 공개질문장이란 것을 발표했다.
북한의 의도는 뻔하다. 대남 강경 노선으로 내부 결속을 다지려는 것이다. 북한은 과거에도 안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면 대남 강경 자세를 보이며 내부 결속을 다지는 데 공개질문장을 활용했다. 18년 전 김일성 사망 때에도 그러했다. 그때도 북한은 우리 정부의 '조문 불허' 입장을 시비하며 상당 기간 대남 강경 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김정일 사망으로 북한은 지금 대내 전열 가다듬기에 ‘내 코가 석 자’다. 그러한 때 한국이 긴장이라도 조성하면 예정된 여러 큰일들이 하루아침에 그르쳐질 수 있다. 오는 16일 김정일 생일을 앞두고 북한은 지금 축제 분위기 조성에 정신이 없다. 북한 선전기관들에 따르면 이번 축제는 과거에 비해 그 규모와 형식, 내용에서 최고 수준으로 진행될 전망이다.
북한은 오는 4월 15일 김일성 100회 생일엔 ‘강성국가’ 진입을 선포할 참이다. 따라서 그때까지 내부 체제 안정에 주력하면서 한반도에서 긴장이 조성되지 않도록 안보 정세를 관리해야 한다. 그런 까닭으로 사전 대남 경고성 엄포 차원에서 공개질문장이란 걸 내놓았다. 가소롭기 짝이 없다.
그래도 우리가 이번 공개질문장을 경계하는 것은 그것이 대남전술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다. 예의 공개질문장은 주로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평통과 민화협 등이 남북관계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을 밝히도록 요구하는 방법의 하나로 이용돼왔다. 문제는 1998년 이후 북한이 우리 측에 보내온 10개의 공개질문장 가운데 국방위원회 정책국이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 점이다.
대북 전문가들은 북한의 이번 공개질문장을 두고 우리 측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조건을 내세워 이명박 정부를 압박하고 남북관계 경색 책임을 우리 측으로 돌리려는 저의로 분석한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 의도에 불과할 뿐, 진짜 숨겨진 의도는 오는 4월 총선과 12월 대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음모다.
북한이 대규모 한미 연합 훈련인 '키 리졸브' 훈련을 두고 지난 4일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성명을 통해 "이명박 정권이 여론을 회유해 4월 열리는 총선을 무난히 치르려는 술책"이라고 비난했다. 견강부회도 유만부동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남쪽에서 권력 재편이 있을 때마다 북한이 각종 선거투쟁 전술을 정교하게 구사해 왔음을 상기하게 된다.
북한의 공개질문장 9개 항은 사실은 한반도 적화통일 여건을 조성하도록 종북세력들에게 내린 선거투쟁 선동구호이자 행동지령이다. 북한이 공개질문장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바란다면 무엇보다 먼저 만고역적 이명박 역도와 그 패당들을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서부터 그런 냄새가 짙게 풍겨난다. 더구나 공개질문장 발표 주체인 국방위원회 정책국이 바로 대남 공작의 총사령탑인 정찰총국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북한은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이 땅의 종북세력들을 앞세워 남남갈등을 조장하면서 남측의 선거 정국에 뛰어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내 발등에 떨어진 불끄기도 급한 판국에 남의 집 잔치에 재 뿌리려고 하는 북한의 고약한 심보는 참으로 구제불능이다.
지난해 김정일 사망 이후 세계는 북한의 변화 가능성을 주시해왔다. 김정일의 3남인 김정은이 세습으로 정권을 잡긴 했지만, 그래도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북한의 태도는 전과 다름이 없다. 북한은 시대 조류인 개혁 개방에 나서 주민들의 먹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이 땅의 종북세력들은 북한의 사주를 받아 올해 총선과 대선을 사회주의혁명 불쏘시개로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북한으로 하여금 국제사회의 개혁 개방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이 땅에서 기생할 수 있다.
북한의 공개질문장 9개 항이 종북세력들에게 내린 선거투쟁 선동구호이자 행동지령이란 점에서 정부 당국과 국민들의 사려 깊은 주의와 경계가 요망된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부 당국은 종북세력의 준동 차단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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