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과 직업에 따라 차이가 났는데 일반 사무원이나 대학교원의 경우 성인 1인당 한 달에 달걀 10개, 보드카 1병, 담배 10갑 등이었다. 돈이 있어도 배급량 이상을 구입할 수 없게 돼 있었다. (물론 암시장이나 ‘베료쉬카’라 불리는 외화상점에 가면 됐다!)
20년 전 러시아 달걀 배급소에서 생긴 일
정말 긴 줄이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줄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이날따라 날씨도 유독 춥게 느껴졌다. 거리의 수은주는 영하 2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실 러시아 겨울치고는 그렇게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한 3시간 쯤 줄에 서 있었더니, 차례가 다가왔다.
그런데 달걀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었다. 앞에 줄 선 사람 수를 헤아려 보았다. 내 차례까지 올까? 심장이 뛰는 소리가 커져만 갔다. 다행히 달걀 10개를 손에 놓을 수 있었다. 내 뒤에 두 세 사람 정도 더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에 줄 서 있었던 러시아 할머니들의 눈에 눈물이 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 같으면, 소리라도 질렀을 텐데… 벙어리 털장갑 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각자의 길로 총총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 할머니들 가족들은 앞으로 한 달 동안 달걀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한 할머니의 깊게 파인 눈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망연자실? 이 정도로는 부족한,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모르는 눈물 고인 푸르디 푸른 그 눈을.
재미(?) 있는 것은 달걀 못 받은 할머니들에 대한 동정은 정말 잠시였다는 점이다. 솔직한 심정은 환희였다. 나는 달걀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도 정말 잠시였다. 아뿔싸! 들떠서 걸음을 옮기던 중, 빙판에 미끄러져 달걀을 모두 깨트려 버렸던 것이다. 기숙사로 돌아와 화장실에서 필터 없는 담배 1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니 눈물이 나왔다.
20년 전의 일이 갑자기 떠 오른 것은 이번 구정 연휴 기간 동안, 아인 랜드의 <아틀라스>(Atlas Shrugged)라는 소설을 읽은 덕분이었다. 미국에서 성경책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고 알려진 이 책은 무려 1,170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이었다. 처음에는 다소 지루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그러나 100페이지를 넘어서자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연휴가 끝난 뒤에도 계속 손에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읽었다. 27일 새벽에나 손에서 놓을 수 있었다. 소련 사회주의에서의 개인적 경험과 이 책이 묘사한 상황이 어쩌면 그렇게 똑 같은지?! 저자 아인 랜드가 러시아 태생으로서 소련 사회주의를 경험한 뒤 미국으로 망명한 경험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은 평등주의적 포플리즘이 사회와 대중을 장악해 버린 상황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잘 나가던 기업들이 차례로 도산되는 장면에서, 평등주의의 진정한 피해자는 평등주의자들이 말하는 ‘착취자’가 아니라, 오히려 이들이 보호하려 한다는 ‘근로대중’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진짜 ‘약탈자’는 기업인이 아니라 아무 것도 생산하는 것이 없이 자본주의 경제에 빨대를 꽂고 기생하면서도 이른바 ‘공익 추구’만을 외치는 무능한 정치인과 관료, 그리고 이들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는 이데올로그들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체제 붕괴에 따른 안전 시스템 부재로 인해 터널 붕괴가 발생, 열차 승객이 몰살당하는 장면에서 이러한 체제가 들어서도록 묵인 방조한 대중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저자가 싸늘하게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전율이 느껴졌다.
한 프랑스 영화가 생각나기도 했다. 일군의 프랑스인들이 독일 게쉬타포에게 처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한 젊은이가 외쳤다. “전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라고. 이때 옆에 있던 중년의 신사가 이야기했다. “바로 당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죽으러 가는 거요”라고.
이 소설의 줄거리는 조금 황당해 보이는 이야기로 전개된다.(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미스터리 공상과학 영화’로 분류돼 있었다!) 생산 없는 분배를 추구하고 경제발전을 뺀 평등주의가 판치며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 실종되자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고자 포퓰리즘 정부가 조치를 취하지만 잘못된 진단에 의한 포퓰리즘 정부의 잘못된 대응은 경제와 사회를 더욱 절망으로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희망이 나온다. 바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되살리고 집단주의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 주인공 ‘존 골트’를 중심으로 창조적 기업인들과 지식인들이 파업을 주도하는 것이다.
재벌 해체론과 매수 타락론
요즘 좌익진영은 물론 한때 보수야당이었던 세력들조차도 ‘재벌 해체’를 입에 달고 다닌다. 이미 좌익 싱크탱크에서는 미국의 반독점법인 셔먼법과 이를 기초로 한 록펠러 석유기업 ‘스탠더드오일’의 해체 사례 등을 연구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재벌 해체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대중의 정서에 기초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기업의 대응은 안이해 보인다. 우선 ‘설마’하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김대중 노무현 때도 잘 견뎠는데…”라며, 이른바 ‘매수 타락론’을 운운하는 하는 사람도 있다. 매수 타락론이란, ‘돈 맛을 알면 변한다’는 논리로서, 좌익이 집권하면, 이들을 적당히 ‘타락’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아니 이미 이를 위한 기초작업에 돌입한 기업들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대기업 간부가 야당 의원 보좌관 출신들을 특채해 ‘줄대기’에 나서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여의도에서는 이미 뉴스도 아니다.
보수진영의 부담 중의 하나는 재벌을 옹호한다는 편견이다. 아인 랜드의 책에서도 잘 묘사돼 있듯이 모든 대기업이 시장 옹호자인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일부 대기업은 정부와의 야합을 통해 시장이 아닌 독점을 통해 ‘기생 이윤’을 창출하려 시도한다.
이 경우 이들의 주된 활동은 시장에서의 경쟁이 아닌 정치에 ‘빨대꽂기’인 것이며 이는 우리 보수주의자들의 시장 옹호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박원순의 참여연대 사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협찬’이라 불리는 ‘삥’ 뜯기기의 결과가 자신들의 도살자를 양육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직도 이른바 ‘길들이기’에 희망을 품고 있는 순진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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