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씨 모녀는 역사적, 정치적 인물들을 재평가하는 기준점이 되고 있다. 한국 음악의 대부로 인정받던 윤이상에 대해 ‘(신 씨의 남편인) 오길남 박사의 월북을 회유한 친북인사’라는 비판이 가해지고 있으며, ‘통영의 딸’ 구출 시민네트워크는 지난 18일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에게 ‘친북인사들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며 입장을 밝히라는 질의 행사를 벌였다. 향후 대선의 향방을 가르는 데 ‘통영의 딸’ 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북한인권 문제가 이처럼 크게 이슈화된 것은 이례적인 사건이다. 그동안 크게 주목 받지 못했던 북한인권 문제가 전 국민적인 관심을 모으게 된 배경과 신 씨 모녀 구출운동의 확산 과정을 <미래한국>에서 분석해 보았다.
전문가 및 관계자들은 호응의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먼저 기구한 가족사가 시민들의 감성을 터치했다는 점이다. 신 씨의 남편 오길남 씨가 우리 곁에 살고 있는 한국 시민이라는 점 또한 ‘남 일이 아니다’는 위기의식과 함께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다.
‘남의 일 아니다’ 공감대 확산, 배경은…
경남 통영 출신의 신 씨는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시절, 유학생이던 오길남 씨(69)와 결혼했다. 이후 1985년 작곡가 윤이상과 송두율 교수 등의 월북 권유를 받은 남편 오 씨와 함께 독일을 떠나 북한으로 가게 된다.
1년 만에 북한체제의 모순을 깨닫게 된 부부는 탈북 작전을 세우지만 1986년 독일 유학생 포섭 지령을 받고 독일로 가던 오 씨만이 성공하고 신 씨는 두 딸 혜원(35) 규원(33) 씨와 함께 북한 통제구역에 억류됐다. 현재 남편 오길남 씨는 시민단체와 함께 구출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가족들 탈북을 위해 악착 같이 돈을 모았다” “과거의 실수를 후회하며 술로 버틴 세월이었다”는 고백으로 시민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정 베드로 목사(북한정의연대 대표)는 본지와 통화에서 “통영의 딸 문제는 한 개인이나 단체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람의 가족이 북한에 있다는 자체가 시민들 마음에 심금을 울렸다”고 말했다. 김규호 목사(기독교사회책임 사무총장)는 “신 씨 모녀 문제는 북한인권 문제를 국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피부에 와 닿는 사례”라며 “일개인의 슬픈 사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고통과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귀한 예시로 사용돼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저작권 없는 전시회’… 대학생과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
두 번째로 대학생이 시작하고 시민과 단체가 협력했다는 점이다. ‘통영의 딸’ 구출운동은 객체가 주체가 되면서 점화된 사건이다. 사실 구출운동은 18년 전 오길남 박사가 책을 출판한 뒤 일부 참여자들과 함께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벌여온 운동이다. 백만 엽서 운동을 비롯해 무고한 신 씨의 자녀들을 ‘안나 프랑크’와 같은 아이콘으로 만들어 북한인권의 실상을 알리려는 노력도 있었다.
하지만 한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 2011년 2월 세이지코리아와 한동대 북한인권학회가 인사동에서 개최한 ‘그곳에는 사랑이 없다’ 전시회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첫 전시회는 한동대 내에서 열렸다. 학생들과 함께 전시회를 담당했던 김미영 전 한동대 교수는 본지와 통화에서 “사실 전문가 입장에서는 별로 새로울 게 없는 북한 정치범수용소 자료였지만 대학생 수준에서 소화하면서 일반인들의 감각 속에 타고 들어올 수 있게 됐다”며 “북한인권 이슈가 생각보다 일반화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의외로 괜찮은 반응을 얻자 학생들은 ‘서울에서도 해보고 싶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고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빌릴 수 있는 설 연휴 기간에 가나아트센터3층을 대여했다. 마침 1층의 전시회가 취소돼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1층에 전시할 수 있게 됐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충격적인 사진에 끌린 시민들이 하나 둘, 전시장을 찾기 시작했다. 호기심에 들어온 시민들은 처참한 사진을 보고 글로 확인한 후 눈물을 흘리며 나갔다.
스마트폰으로 찍어 올린 사진을 보고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전시 기간 내에는 물론, 이후에도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사진 제공자들의 승낙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작권 없는 전시회’는 이후 신 씨 모녀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슈화된 통영 전시회를 여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이때만 해도 신숙자, 오혜원, 오규원의 사연을 담은 사진은 작품 80여점 중 대여섯 점이 포함돼 있었을 뿐 메인 주제는 아니었다.
전시를 관람한 수용자들이 전시를 주관하는 적극적인 주체로 바뀌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운동의 불길이 번져갔다. 당시 관람자 중에는 부산 동아대 입학을 앞두고 인사동에 들른 새내기 대학생들도 있었다. ‘입학 축하 기념’으로 여관방에서 밤을 지새우며 술이나 마시던 대학생들이 우연히 들른 인사동 전시회에서 술이 확 깨는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이후 관람자들은 대학 당국을 설득해 부산 동아대 박물관에서 이 전시회를 이어나가게 된다. 한동대 학생들이 전시물과 세팅 작업을 도왔고 나머지 진행비 100만 원 정도는 이곳저곳에서 후원을 받아 모았다고 한다.
‘통영의 딸’의 유래
부산 전시회는 또 다른 ‘자발적 운동가’를 낳았는데 바로 현대교회의 방수열 목사 부부다. 부산을 방문한 방 목사 부부는 우연히 들른 전시장의 80점 그림 중 유독 신 씨 모녀 관련 사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따로 표기되지는 않았지만 방 목사는 신숙자 씨가 같은 통영사람인 것을 기억해 냈던 것이다.
이어 경상대 통영캠퍼스에서 5월과 6월에 걸쳐 전시회가 열리게 됐다. 이때부터 ‘통영의 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름에 관련 된 에피소드가 있다. 오길남 박사가 18년 전 출간한 책에는 신 씨가 통영이 아닌 사천 출신으로 돼 있었다고 한다. 통영여중을 졸업한 것으로 돼 있어 오길남 박사에게 알아보니 그의 착각으로 잘못 기재된 것이었다. 확인 후 ‘통영의 딸’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됐다. 전시회가 알려지면서 통영 지역에서는 신숙자 모녀를 구하기 위한 서명운동이 번져 나갔고 훌쩍 10만 명의 서명자를 넘어섰다.
아울러 오길남 박사 가족을 북한으로 회유한 음악가 윤이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됐다. 통영시는 지난 2002년부터 매년 13억여 원을 들여 윤이상을 기념하는 통영국제음악제를 개최하고 있다. 2006년부터는 480억 원을 들여 ‘윤이상 음악당’건립을 추진 중이다.
‘윤이상 음악당’이란 이름의 건물이 평양에도 설립돼 있는 등 문제가 돼 지난 2009년 '통영국제음악당'으로 명칭이 변경돼 오는 2013년 완공될 예정이다.
방수열 목사는 "전시회를 둘러본 시민들이 '윤이상이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며 실망하거나 노골적인 반감을 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10월 13일에는 통영시 도천테마공원 내 윤이상 동상 앞에서 “윤이상 기념사업을 즉시 중단하라”는 피켓을 든 시민이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구출운동은 통영, 마산 뿐 아니라 오길남 씨의 고향인 의성에까지 번져나갔다. 의성에서는 ‘통영의 딸’이라는 이름 대신 '의성 며느리’라고 불린다.
일부 지방에서는 신 씨 모녀 문제가 여론화되고 있었지만 이름 그대로 ‘통영’의 딸이었을 뿐이다. 지난 여름까지만 해도 신 씨 모녀의 존재조차 모르는 서울 시민이 대부분이었다.
서울의 여론을 모으는 조직력이 결집된 장은 ‘혜원아 사랑해, 규원아 너를 못 잊겠어’라는 타이틀로 8월 20일 서울광장에서 개최된 ‘8월의 편지’ 행사다.사단법인 세이브엔케이, 한동대 LANK, 한국대학생포럼, 북한인권학생연대, 바른사회대학생연합, 북한인권탈북청년연합 등으로 구성된 시민단체 및 대학생 조직은 ‘북한인권 개선을 위한 청년모임'이란 이름으로 행사를 기획했다.‘8월의 편지’행사, 서울 여론화의 분기점
청년들이 모여 아이디어를 짜고 순서를 기획하자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서명 발표와 구호 제창 등으로 이어지던 기존의 딱딱하고 정치적인 스타일이 북한인권에 대한 시민들의 무관심을 부추겼다고 판단, ‘편지쓰기 공모전, 문화 공연’ 등 시민 참여가 가능하고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했다.
행사는 시민들에게 북한인권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심어 주었고 ‘혜원, 규원’의 이름을 알리는 데 일조했지만 주최 멤버들은 일회성 이벤트로만 끝낼 수 없다고 결심했다.
‘8월의 편지’ 기획팀은 9월 27일 청계천 광장에서 신 씨 모녀 구출을 위한 촛불집회를 열었다. 10명도 안 되는 조촐한 규모였다. 당시 행사를 이끌었던 인지연 LANK 대표는 “기자들에게 보도 자료를 보냈지만 별다른 반응도 없고 저희끼리 소꿉장난처럼 조그맣게 벌인 일이었어요. 그런데 마침 동아일보 건물에서 창밖을 내다보시던 한 기자님이 저희를 발견하신 거에요. 바로 달려오셔서 취재를 하셨고 다음날 동아일보 1면에 톱기사로 나갔어요. 저희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동아일보에 나가자 점점 취재 열기가 더해졌고 이제는 시민들도 알아보시고 먼저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고 계세요.”
퍼즐 조각처럼 모인 기독교인들
이어 인지연 대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며 “누구 한 사람이 나서서 한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움직인 기독교인들의 힘이 퍼즐 조각처럼 딱딱 맞물렸다”고 말했다. 이번 운동의 원동력으로 분석되는 세 번째 원인이다. 이번 신 씨 구출운동에는 불교도를 비롯해 다양한 이들이 종교의 구분 없이 참여했지만 초창기부터 시작한 멤버와 전체 구성 비율을 놓고 보면 기독교인이 많다.
박성현 한국인터넷문화협회 회장은 “나는 하나님을 안 믿지만 이번 운동에 기독교인이 주축이 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전시회의 물꼬를 튼 김미영 교수는 “모든 일에 기도대로 응답됐다”며 이렇게 밝혔다.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열기 전 서울 시민의 10%가 전시회를 인지하고 1%가 관람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엘리사의 요청에 의해 과부가 기름 그릇을 많이 구해 두는 믿음을 얘기해주며 우리도 큰 그릇을 구하자고 했던 겁니다. 결국 기도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1층에 전시회장을 구하게 된 것도 그렇고 ‘전시회장에 하나님의 눈물이 고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서 그런지 관람자들이 다들 울면서 나가시더라구요.”
한편 당사자인 신숙자 씨의 경우 신실한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앞으로 신 씨 모녀 구출운동은 ‘통영의 딸’ 구출 시민 네트워크가 중심이 돼 활동할 계획이다. 정 베드로 목사는 “이전의 북한인권 문제와는 달리 각 시민단체가 이익을 떠나 하나 되고 있다”며 “인터넷, 국제 청원 등 각계 분야의 역할이 적절히 분담돼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활발한 활동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한동대에서도 신 씨 모녀 구출 서명운동을 비롯해 북한인권 행사가 꾸준히 개최될 예정이라고 한다.
(미래한국)
조진명 기자 jaduj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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