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공생경제 따뜻한 자본주의는 또 다른 포퓰리즘
[이슈분석] 공생경제 따뜻한 자본주의는 또 다른 포퓰리즘
  • 미래한국
  • 승인 2011.09.0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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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에 ‘승자독식’이란 없다. ‘따뜻한 자본주의 4.0’은 금송아지 우상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우리가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 ‘우상(Idola)’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상은 그래서 어리석음과 동의어이며 그 이름대로 실체가 없다.
하지만 우상을 만든 사람들은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민속학자들은 종교의 초기단계에서 우상이 등장한다고 생각했으나 최근의 보고서는 우상이 사람들의 고유한 신관(神觀)이 퇴화할 때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 흔들릴 때 우상을 만든다는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도 사회적 우상이 등장했다. 바로 ‘따뜻한 자본주의’, ‘공생(共生)적 시장경제’와 같은 것들이다. 최근 한 보수 유력 일간지가 내세우는 ‘자본주의 4.0’도 그러한 퇴행적 우상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 배경에는 ‘승자독식’, ‘양극화’라는 잘못된 개념들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개념은 베이컨이 말한 ‘동굴의 우상’(편파적이고 왜곡된 지식)이 ‘극장’(지식인의 권위)과 ‘종족’(좌파)을 거쳐 ‘시장’(대중과 미디어)으로 나온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시장경제에 ‘승자독식’이란 없다   

흔히 좌파 지식인들은 자유주의 경제원리를 ‘승자독식’이라고 폄훼한다.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모든 걸 다 차지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영국의 가난한 무명작가였던 조앤 롤링이 쓴 해리포터는 1997년부터 2007년까지 67개국 언어로 4억5,000만부가 넘게 팔렸고 지난 10년간 영화수입만 74억 달러(7조4,000억 원)를 벌어들였다. 롤링이 억만장자의 반열에 오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원고가 당시 영국의 대형 출판사 12곳에서 모두 거절됐다는 사실이다. 출간을 결심한 곳은 불름즈 버리라는 작은 출판사였다. 해리포터로 돈을 번 사람에는 롤링만 있었을까? 해리포터는 전세계 출판계에 활력을 주었고 그와 비슷한 아류(亞流)의 ‘미 투(Me too)’ 소설작가들에게도 돈을 벌 기회를 주었다.

문구와 팬시상품 제작자와 유통자, 판매자들에게도 부를 안겨줬다. 해리포터의 캐릭터를 부착한 상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이 모든 것은 지구촌의 출판시장과 문화시장, 유통시장이 개방됐고 세계화됐기에 가능했다.
과거에 셰익스피어도 글로브라는 극장에 대한 수익지분이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롤링보다 문학적 성취가 뛰어 났지만 그녀 만큼 돈을 벌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지 않은가? 지금과 같은 자유화, 개방화, 세계화된 시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글은 어떤가. 구글이 IT업계의 1위가 됐다고 해서 다른 IT업체들은 모두 도산했는가? 구글과 새로운 협력을 맺은 중소기업들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자유주의경제 하에서‘승자독식’이란 없다. 모든 경쟁을 물리치고 누군가가 승자가 됐을 때 이미 그 승자를 둘러싼 주변에는 또 다른 얼굴의 동반 승자들이 넘쳐나는 것이 자유주의경제 시스템인 것이다.

삼성전자가 국내 1위가 됐을 때 삼성전자만 부유해졌던가? 삼성과 거래한 중소기업들과 대리점들은 모두 피해를 입고 나락으로 떨어져 갔던가? 자본주의에 있지도 않은 승자독식이 문제가 된다면 현대자동차 노조는 왜 호주에서 점유율 1위를 목표로 경쟁하는 현대차 판매전략에 반대하지 않는가? 
 
중산층 가구 소득은 소가족과 노령가구 증가로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자유주의경제 시스템을 공격하는 논거에 중산층 붕괴가 있다. 우리 경제에 신자유주의가 도입되면서 중산층이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통계상의 문제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중산층 소득이란 총가구 중, 소득순으로 순위를 매긴 후 정확히 가운데를 차지한 가구의 소득을 말한다.

그런데 지난 20년간 우리의 가구 구성비는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예를 들어 서울시 통계자료를 보면 서울의 가구당 가족수는 1960년대말 평균 5.47명에서 2010년2.48명으로 줄었으며, 65세 이상 고령자는 5만4354명에서 94만2946명으로 늘어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취업한 자녀들과 함께 살며 직장을 가진 부모가 있는 중위소득 가구의 경우 자녀가 독립하고 부모가 은퇴하면 당연히 이 가족들은 저마다 중위소득 이하의 가구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역으로 중위소득가구가 감소함을 뜻한다. 이러한 통계문제는 현재 미국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중산층이라는 개념 자체가 경제적으로 의미를 갖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지난 8월 15일 서울시가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자료를 분석해 발표한 '2010 서울 가구구조 변화'에 따르면 서울 전체가구 수는 2000년에 비해 40만 가구 이상 늘어났으나 전통 핵가족은 10년 새 153만5514가구에서 132만8186가구로 13.5% 줄었다. 이에 비해 부부로만 구성된 가족은 같은 기간 47.2% 늘었고, 한부모와 미혼 자녀가 함께 사는 경우는 30.2%, 1인 가구는 무려 70.2% 증가하는 등 ‘소핵 가족’ 증가율이 높았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최근 한 보수 일간지가 연속기획으로 보도하는 자본주의 4.0특집기획물 중 ‘우리나라 최하 20%의 가구소득과 상위 20% 가구소득 간의 격차가 사상 최대’라는 기사의 오류 가능성을 지적할 수 있다. 즉 하위 20%의 가구는 대개 노령으로 은퇴한 가구거나 미취업 가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소득의 비교는 소득의 유형별로 비교해야 타당성이 있다. 즉 근로소득은 근로소득끼리, 자산소득은 자산소득끼리 비교할 때만 불평등의 의미와 구조를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1인당 GDP는 97년 IMF 위기 이후로 급속히 증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1998년 7754 달러에 달하던 1인당 GDP는 2009년 최고치인 2만1653달러에 달했다. 10년만에 약 3배에 달하는 수치다. 1인당 GDP가 늘었다는 것은 그만큼 국민들의 구매력이 증가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중산층 가구가 줄고 있다는 것은 근로인구를 포함하는 가구 구성원의 변동과 관련지어서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좌파와 더불어 국내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보수일간지마저 덩달아 문제 삼는 것이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다. 양극화란 엄밀하게 정의된 개념이 아니다. 어느 사회든 부의 양극화는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했다. 모두가 부자로 살거나 모두가 가난하게 살지 않는 이상, 최고의 부유층과 최저의 저소득층간에 소득격차로 그 사회의 건강성을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득 양극화는 고용시장 경직과 사상최대 한계기업이 주범

어느 사회든 대부분 최상류 부유층의 소득은 근로소득이 아닌 자산과 금융소득으로 구성된다. 그런 소득을 가난한 저소득층의 근로소득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한 비교라면 대한민국은 이제까지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사회주의를 할 때까지 양극화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만큼 소득의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여기에는 철학적 사고를 필요로 한다. 소득 불평등의 원인이 능력의 문제라면 정의란 각자의 능력에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 옳다. 하지만 동등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소득에 차별을 받는다면 그 사회의 시스템에 하자가 있다고 판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이러한 경우로 ‘88만원 세대’를 거론한다. 비정규직과 정규직간에 차별을 없애라는 것이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정규직 노조는 이에 반대한다. 지난 4월, 현대차 노조는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정규직 고용승계를 올해 단협 요구안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 회사가 직원을 새로 뽑을 때 정년퇴직자와 25년 장기근속자 자녀를 우선 채용하도록 단협안에 명시한 것이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고용세습’이라는 비판이 터져나왔지만 정작 노조 내부에서는 찬성이 압도적이었다. 현대차 근로자의 생산직 평균 연령이 1980년대에 36세였다가 2010년에 43세로 고령화된 점은 우리사회의 고용시장이 노조에 의해 얼마나 닫혀 있는지 보여준다.

또 현행법에 의하면 기업은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아니면 근로자를 해고할 수 없으며 비정규직의 경우 3개월 이상 연속근무하면 정규직에 준하는 대우를 해야 한다. 금번 한진중공업 사태가 여실히 말해 주듯, 기업은 돈이 없으면 정리해고마저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다. 당연히 기업은 근로자를 가능한 적게 유지하려 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고용 없이 버티려 한다.

 

비정규직보호법안이 오히려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고용시장의 경직은 외국인 투자 급감의 중요 원인으로도 작용한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순외국인 직접투자(투자액-유출액)는 1980년대 이후 첫 마이너스(-1억5000만 달러)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인들은 국내에서의 사업 어려움으로 정부의 지나친 규제와 강성노조로 인한 고용 경직성을 꼽는다. 이러한 사태의 본질을 이명박 정부와 조선일보는 ‘따뜻한 자본주의’라는 말로 외면하고 있다.

불량고용 67만개 한계기업 정리해야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가장 유효한 방법은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는 일이다. 그러려면 기업들에게 투자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자본주의4.0’은 우리나라 고용의 90%를 중소기업이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본질을 보지 못한 소치다. 우리나라의 한계기업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빠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계기업이란 보통 3년간 영업이익을 통해 이자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부실기업을 말한다. 2010년 지경부의 조사에 의하면 그러한 한계기업이 전체기업의 19%선에 이르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기업 가운데 10곳 중 2곳의 비율로 버는 돈으로 이자도 내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러한 기업들의 고용조건이 좋을 리 없다. 편법적 저임금의 주범이고 고용이 되더라도 임금체불은 일상사이다. 대개가 중소기업이다. 지난 해 노동부에 접수된 임금체불과 부당임금의 80%가 바로 이 한계기업들로 인해 발생했다. 한계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돼야 할 존재이지 정부가 세금으로 지원할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한계기업들은 시장에서 자원분배를 왜곡하고 불량 고용을 창출하며 소득 불평등을 확대한다. 한마디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주범이 바로 이들이다. 따뜻한 자본주의, 공생적 시장, 자본주의 4.0은 전국 67만개, 180만명이 고용된 한계기업들을 정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자신이 없다면 소득의 양극화라는 말은 차라리 꺼내지 않는 것이 옳다. 

‘따뜻한 자본주의 4.0’은 금송아지 우상     

경제적 측면에서 포퓰리즘을 구별하는 하나의 방법론이 있다. 생산성이 낮은 집단이 생산성이 높은 집단에 비해 동등하거나 더 많은 재원을 분배받는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생산성이 낮은 집단에 재원이 초과 배분되면 그 사회의 경제적 효율성은 감소한다. 다시 말해 고비용사회가 초래되고 그만큼 실질 소득이 감소하며 궁극적으로는 복지도 감소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이유는 市場이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며 인위적으로 가한 왜곡에 자가치유라는 방식을 가동하기 때문이다. 종종 그 결과는 엄혹한 경제적 재앙으로 다가온다. 2000년 미국 연준위의 인위적인 초저금리 정책과 주택건설 규제는 부동산 버블을 가져왔다. 여기에 페니미에와 프레디 맥과 같은 국책 모기지회사들에 美의회는 압력을 가해 저신용자의 주택융자자금을 강요했다. 그리고 거품이 붕괴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신자유주의의 시장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정부의 인위적인 정책에 시장이 반응했을 뿐이다. 시장은 자기 밭에 심어진 낱알이 악마의 씨인지, 천국의 열매인지 차별하지 않았다. “일이 그렇게까지 갈 줄은 몰랐다”라고 한탄한 앨런 그린스펀의 후회는 정부의 인위적 공개시장 조작의 실패를 인정한 것이지 시장의 실패를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자유주의 경제와 시장에는 표정이 없다. 월가의 탐욕이 금융위기를 불러왔다는 것도 진실이 아니다. 월가는 이전에도 탐욕스러웠다. 왜 하필 2008년에만 그랬다고 보는가? 그전에 월가에는 착한 사마리언들만 존재했었던가? 

따뜻한 자본주의, 공생적 시장경제, 자본주의 4.0은 현실 개혁의 능력과 의지가 없는 우파의 포퓰리즘이다. 삼라만상의 주재자인 神을 보기 좋은 금송아지로 바꿔 놓고, 그것에 엎드려 기도하면 복 받을 것이라는 꼬드김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대가는? 당연히 표와 헌금이다. .

한정석 편집위원·前 KBS PD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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