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미 일리노이주의 한 신문에 기이한 기사가 등장했다. 한 중소도시에 근무하는 경찰관이 자기 돈으로 경찰 차량에 휘발유를 넣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유는 도시의 재정이 바닥나 경찰서가 유류비를 댈 수 없었기 때문. 희한한 사건은 시카고에서도 일어났다. 약국을 경영하는 마이어 쇼라는 약사는 시카고시로부터 약 2억원에 달하는 수개월치의 의료보험비를 받지 못했다. 시카고시가 민간에 외상을 지고 있는 셈이다.
富의 상징인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아리조나주는 도청(都廳)과 대법원, 州의회 건물을 민간에 매각하고 월세로 들어앉았다. 아리조나주의 재정 부채는 2009년 기준으로 17억 달러. 재정 수입의 53%에 달한다. 그러나 이는 그나마 양호한 편에 속한다. 경찰이 자기 돈으로 기름을 넣는 일리노이주는 이제까지 공공지출이 세수의 2배에 달했고 2010년 기준으로 지불해야 할 부채는 우리 돈으로 약 5조 원에 달한다. 문제는 주정부에 더 이상 돈이 없다는 사실이다.
“6개월째 주정부가 외상을 지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몇 만 명, 많게는 수십 만명이 지불을 기다리고 있죠. 하지만 뭐라고 답을 할 수가 없어요. 시민들은 돈을 빌려 살아가고 있죠.”
일리노이주 감사관 겸 재무부장 댄 하인즈는 C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는 지금과 같은 재정난에 대해 “난리도 아니다. 한마디로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무덤을 너무나 깊게 팠다”
미국 지방정부의 재정난은 아리조나와 일리노이만의 것이 아니다. 미 50개 주 중에서 노스다코다와 알래스카를 뺀 48개 주의 올해 예산적자는 1,091억 달러. 전체 주정부 예산의 약 30%를 차지했다. 2개 주까지 합친 내년 적자는 1,600억 달러로 더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2008년 금융위기를 정확하게 예언해 명성을 날린 월가의 여성 애널리스트 메레디스 휘트니는 지난 3월 C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올해 안에 50개 정도의 크고 작은 지방도시들의 파산을 피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것은 그녀와 분석팀들이 지난 2년간 미국 51개 주의 재정 상황을 약 2만 시간에 걸쳐 조사해 내린 결론이었다. 휘트니 씨는 인터뷰에서“2008년 금융위기와는 또 다른 형태의 위기가 12개월 안에 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그녀의 예언은 불과 6개월만에 현실화되고 있다.
미 신용평가사 S&P는 9일, 미 국채의 신용등급 강등에 이어 주정부와 시가 발행한 채권 등 미 연방정부와 관련 있는 1만1,500여개의 채권에 대한 신용등급을 종전 ‘AAA’에서 ‘AA+’로 한단계 하향 조정했다. 강등 대상 채권에는 텍사스주의 어빙시, 캘리포니아주의 오션사이드시에서 발행한 채권 등이 포함됐다. 강등당한 채권의 규모는 총 2조9,000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의 언론들이 주정부의 재정 위기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것은 바로 뉴저지 주지사 크리스티의 말,‘Day of Reckoning’(심판의 날)이다. 지난해 11월 선거 때 공화당 후보로서는 12년 만에 뉴저지에서 당선돼 관심을 끌었던 크리스티 주지사는 부임하자마자 6,000명을 고용할 수 있었던 뉴저지주의 맨하튼 지하철 연결사업을 접었다.
당시 뉴저지주의 재정적자는 10억 달러에 달했고 연기금 지급액마저 모자랐던 것. 검사 출신의 크리스티 주지사가 경악했던 것은 이전의 민주당 후보들이었던 주지사들이 무려 10여년 넘게 연기금을 붓지 않고 재정지출로 모두 써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크리스티 주지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기금이든 빌린 돈이든 미친 듯이 써댔다”라고 말한다.“이제 연기금은 역사에서 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그는 주민들과 만남을 통해 향후 10년간‘연기금의 포기’를 설득했고 대부분의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주정부들의 의료보험 지급 중단과 대학 지원금 삭감, 연기금 지불유예 등은 마지막 날에 닥칠 디폴트를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연방정부의 사정은 어떨까.
지난해 미 연방정부의 재정적자는 GDP의 10.5%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에 달한다.
2007년 GDP의 62%에 달했던 국가채무는 2010년 92.8%에 달했다. 일반적으로 국가채무가 GDP의 90%에 달하면 경제성장 기조가 무너지고 불경기에 빠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그것은 미국이 거대한 채무국으로 전락하면서 글로벌 주도권이 새로운 채권국으로 옮겨 가게 되는 시나리오다. 실제로 영국은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미국에 거액의 채무를 졌고 그 채무로 인해 미국에 국제사회의 리더십을 양보해야 했다. 이동원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의 말을 들어보자.
“아이젠하워는 영국에 빌려준 채무를 이용해서 영국으로부터 다양한 정치적 양보안을 이끌어 냈습니다. 아울러 달러화가 영국의 파운드화를 제치고 국제 기축통화로 자리잡는 계기가 마련됐죠. 2011년 현재 미국의 최대 채권국은 중국입니다.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돈을 빌려 중국에 대항할 무기를 만들고 있는 상황이죠. 아마도 중국의 대미 영향력은 점점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동원 연구원의 말을 뒷받침하는 사례가 있다. 지난 4월 미 합참의장 마이클 멀린은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는 중국의 군사력이나 테러리즘이 아니라 바로 미국의 국가채무”라고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이 지속적으로 군사력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하고 그 달러는 미국의 국채로 발행되며 중국이 지속적으로 달러화 채권을 사주지 않는다면 미 국방력에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다. 중국은 이러한 기회를 충분히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일 S&P사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강등하자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달러가 지배하는 세계 통화 시스템에 경종을 울렸다”며 미국을 비판했다. 관영 신화통신도 6일 논평에서 “미국이 빚 중독을 치료하려면 ‘누구나 능력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상식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비판하면서 중국은 미국에 달러화 자산의 안전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흐름은 미국의 국가채무가 단지 금융시장의 혼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주도권 질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 올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러한 재정적자를 타개해 나갈 방안이 있을까?
미 재정위기 타개위해 자유주의 확대해야
지난 6월 발행된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는 2010년 미국은 80년대처럼 무역과 재정이 모두 악화되는 쌍둥이 적자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현실은 미국의 재정난이 무역을 통한 달러화 확보로도 만회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실제로 미국은 80년대 쌍둥이 적자에서 탈피하는 데 거의 1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미국이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위안화 절상에 강한 압력을 행사하는 점 외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초긴축 재정을 통해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맬 수 밖에 없는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공화당이 승리한 미국의 주들은 교육과 의료, 복지 전반에 대대적인 긴축재정을 실천하고 있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너무나도 깊이 무덤을 팠다“고 말한다. “지금이라도 당장 이 무덤에서 기어나오기 위해 젖먹던 힘을 다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공감을 얻는 것은 최근 실업과 복지축소가 폭동으로 확산되는 영국과 유럽의 현실이 말해 준다.
복지란 일단 시작하면 축소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 주 월스트리트지에는 흥미로운 두 개의 칼럼이 나란히 수위를 다투었다. “오바마는 영민한가(Is Mr.obama smart?)”라는 칼럼이 오바마 행정부의 무능함과 이를 중우(衆愚)적인 포퓰리즘으로 커버하는 정치적 영악함을 되묻고 있다면 “우리도 한 때는 카터를 사랑했다”라는 칼럼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쓰였다.
미국 정부는 이제 돈이 없다. 현재의 재정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더 이상의 양적완화조치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는 2008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번에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에 돈이 쌓여 있다는 점이다. 7천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기업의 유보금은 이제 미국 경제회복의 유일한 희망이다. 결국 미국은 과거 레이건 정부가 취했던 자유주의 경제로 되돌아 가는 수 밖에 없다. 자유주의라는 판도라의 상자 그 마지막에 남았던 희망이라는 이름을 꺼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자유기업원 포럼, 그리스 석학 하치스 교수 주장 “한국, 국가부도 그리스의 길을 가고 있다” 그리스의 석학 아리스티데스 하치스(Aristides N. Hatzis) 교수가 그리스 재정위기 사태의 원인에 대해 “정치권이 복지 포퓰리즘을 경쟁적으로 남발했기 때문”이라며 “한국은 놀랍게도 그리스의 길을 가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테네 대학 철학·과학사학부 부교수인 히치스 박사는 9일 민간경제연구소 자유기업원(원장 김정호)이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주최한 ‘그리스 국가부도, 그 원인과 교훈’ 제하 강연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자리에 조은희 서울 정무부시장이 강연에 앞서 축사를 했으며 김무성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하성근 연세대 교수 등이 참석, 토론을 했다. 김정호 원장은“개인이나 국가나 베짱이처럼 벌지 않고 쓰기만 한다면 개인과 국가 모두 망할 것”이라며“그리스의 고통스런 경험과 비극의 전철을 밟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날 하치스 교수는 “복지국가문제는 현대 선진 부유국이 마주한 가장 중요한 문제”라며 복지 포퓰리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아무리 많은 비용이 들어도 복지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국민들에게 안정감을 제공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에 중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하치스 교수는 그리스의 예를 들며 반박했다. 따라서 하치스 교수는“그리스에 가장 시급한 것은 과도한 규제를 없애 시장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혁신을 이루고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면서“이익은 특정 단체가 아닌 다양한 국민들에게 돌아가야 하며 복지정책은 빈곤 계층에게 집중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하치스 교수는“끝으로 그리스 국민들은 경제발전은 차입과 정부지출이 아닌 투자와 시장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토론자로 참석한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은 “우리나라가 그리스와 매우 비슷한 상황에 있고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 아닌가 걱정스럽다”면서 중진의원으로서 한나라당이 걷고 있는 정체성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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