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와 국운 개척 시나리오
한미 FTA와 국운 개척 시나리오
  • 미래한국
  • 승인 2011.06.3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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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7월 1일을 기해 지구상에서 가장 큰 단일경제권인 유럽연합(EU)과 한국의 자유무역협정(FTA)가 발효됐다. 그런데 지구상에서 가장 큰 단일경제국인 미국과 한국이 체결한 FTA는 아직도 서랍 속에서 먼지만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 한미 FTA는 2007년 상반기에 체결된 반면, 한-EU FTA는 2007년 상반기에 협상을 시작했음에 비교하면 한미 FTA는 지각생인 셈이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국내정치 탓이지만 한국 정치권의 전략 부재와 파당적 대립도 한몫 했다. 2007년 6월 서명된 한미 FTA는 정치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현실정치의 벽을 넘으려는 한국과 미국의 의지도 부족했고 전략도 없었다. 사실 2007년 6월 한미 FTA가 서명될 때 미국의 비준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견됐다. 의회를 장악했던 민주당은 한미간 자동차무역의 불공정이 해결되지 않았다면서 한미 FTA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천명했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한미 FTA를 추진했던 공화당이 정권을 내주고 보호주의 색채가 농후한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한미 FTA의 앞날은 미궁에 빠졌다. 게다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시작되고, 미국의 자존심이었던 GM이 파산하는 등 미국 자동차산업이 궤멸하는 상황에서, 보호주의 분위기가 미국을 뒤덮고 FTA는 잊혀졌다.

미국의 경제위기가 어느 정도 수습된 2010년에 와서야 미국은 한미 FTA에 관심을 돌렸다. 한미 FTA가 미국경제의 수출과 고용을 증대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국내자동차 산업계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자동차분야 재협상 가능성에 대해 한국정부는 “협정문의 한 글자도 못 고친다”는 강경 발언으로 배수의 진을 쳤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수용할 만큼 미국은 순진하지도 호락호락 하지도 않았다. 한국은 미국의 막무가내식 공세를 막아내느라 힘든 협상을 해야 했다.

2010년 11월, 12월 한국과 미국 양국은 추가협상을 진행했고 12월 초 합의에 이르렀다. 합의 내용은 기존 한미 FTA의 자동차 분야 협정보다 관세철폐 시기를 뒤로 미루고, 자동차 분야에 긴급수입제한조치를 도입하는 등 미국의 요구를 수용했고, 반대급부로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제도 시행 기간 유예, 미국 내 한국지사 파견근로자의 비자유효기간 연장, 돼지고기 관세철폐기한 연장 등을 얻어냈다. 주고 받기식 협상을 하긴 했지만, 한국이 양보를 한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2007년 협정은 이익의 균형이 있었는데 2010년 추가협상에서 한국 측이 일방적인 양보를 해 이익의 균형이 깨어졌기 때문에 재재협상을 해야 한다면서 비준 반대를 주장한다.

일견 그럴듯한 주장처럼 들린다. 한국정부 스스로 한자도 못고친다는 명분을 저버리고 2010년 미국의 요구에 끌려 추가협상을 했기 때문에 다분히 독립국가의 자존심을 구긴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은 그러하지 않다.
지금 와서 재재협상으로 반대론을 펴는 정치인들은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지금 야당이 주장하듯이 2007년 협정이 이익의 균형을 맞춘 것이었다면 왜 그들이 다수당이었던 17대 국회에서는 한미 FTA의 비준동의에 부정적이었는지, 또 그들이 소수 야당으로 밀려난 18대 국회 초기인 2008년 하반기에는 왜 그토록 폭력적인 방법으로 극렬하게 비준동의안 처리에 저항했단 말인가. 철저한 자기기만이고 자가당착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2007년 균형, 2010년 굴욕은 자신의 과거 말과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정치인의 몰염치하고 뻔뻔스럽고 옹색한 주장일 뿐이다.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도 이러한 책임 소재 규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요란법석을 떨며 국회를 활극이 난무하는 검투장으로 만들면서까지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상정하고 상임위까지 통과시켰으면 왜 본회의 통과는 시키지 않았는지 아리송하다. 만약 한국 국회가 한미 FTA를 비준동의했더라면, 한미 FTA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한국과 미국 어느 쪽도 비준하지 않고 있는”이 아니라 “한국은 이미 비준 절차를 완료하고 미국의 비준을 기다리고 있는”으로 이야기 되면서 미국에 상당한 압박을 가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협정문의 한 글자도 못 고친다’는 말은 신빙성 있게 미국 측에 전달됐을 것이고, 미국은 기존협정문 바깥에서의 창조적인 해법을 모색했을 것임은 협상의 논리를 이해하는 전략가에게는 기본에 속한다.

2007년 협정 그대로를 지켜내지 못한 아쉬움은 크지만, 막히면 때로는 길을 돌아 갈 줄도 알아야 한다. 때를 놓친 명분에 집착해 한미 FTA를 무용지물로 만들기 보다는, 어느 정도 양보를 하더라도 한미 FTA를 발효시키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이번 합의를 가능케 했다. 외견상으로는 이번 합의로 인한 최대 피해자는 한국자동차업계인 것 같지만, 이들은 관세 혜택이 지연됐을 뿐 불확실성이 제거돼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일본 정부와 민간연구소는 한미 FTA 발효로 일본이 자동차, 기계, 전자 분야에서 수출에서 한국과의 경쟁에 밀려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는 다급한 불은 껐지만 회복세는 더디고,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경쟁국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과 교역을 하게 된다는 것은 한국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서 만들어낸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이다. 한미 FTA가 발효된다면 한국은 선진공업국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미국과 EU를 무관세로 연결하는 FTA 허브국가로 도약하게 된다. 향후 중국, 일본, 아세안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결속하는 동아시아 경제동맹 논의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잡게 된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한미FTA를 금년 8월 초까지 비준한다는 일정을 설정해 놓고 있다. 지난 몇 달간은 정부예산을 둘러싼 공화당과 민주당간의 갈등이 첨예했으나, 무역조정지원제도 연장에 합의하면서 한미FTA비준동의안이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한-EU FTA가 발효되고 미국이 한국시장을 뺏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미국 의회의 초당적인 협력을 이끌어 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한국 정치권은 바깥세상의 움직임과는 동떨어진 파당적인 대립만 할 것 인가. 

야당은 자가당착적인 옹색한 재재협상론 속에 숨지 말고 진정성 있는 국내산업 피해보완책 마련에 집중해야 마땅하다. 집권여당은 다수당의 책임을 져야 한다. 민주적 제도가 정한 절차적 규정에 따라 비준안 처리에 머뭇거림이 없어야 한다. 그만한 용기도 없다면 다수당이길 포기하는 것이 옳다.  국회는 미국의 비준처리 동향을 예의주시하면서 적절한 시기에 한미FTA를 비준동의하여 스스로 국운을 개척할 수 있는 한미FTA역전시나리오를 쓸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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