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삼성전자가 경기 용인시에 향후 20년 동안 300조 원을 투자해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SK하이닉스가 용인 산업단지에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을 확정한 지 석 달 만이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클러스터가 가동을 시작할 경우 용인시는 세계 반도체 생산의 핵심기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2023년 3월 용인시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발표
지난 3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제14차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했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300조 원에 달하는 대규모 민간 투자를 바탕으로 수도권에 세계 최대 규모의 신규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의 용인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을 말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용인시 처인구 소재 부지에 2042년까지 300조 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 5개를 만들 계획이다. 삼성전자와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기업,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 등 150곳을 유치할 계획이다. 삼성전자가 용인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하면 기흥-수원-화성-평택까지 잇는 ‘반도체 벨트’를 만들게 된다. 이를 통한 간접 생산유발 효과는 약 400조 원, 고용유발 효과도 약 160만 명이 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이 많다.
두 달 뒤 산업통상자원부는 ‘전력망 혁신 전담반’ 2차 회의를 열고 ‘용인 첨단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공급 로드맵’을 연내 수립하기로 했다. 현재 용인시에 만들어 놓은 전력망만으로는 초대형 반도체 클러스터에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쉽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전력망 건설을 준비하는 것이다.
천영길 산자부 에너지 정책실장은 회의에서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수요, 전력망 여건 등을 고려해 최적화된 맞춤형 전력 공급 로드맵을 연내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영준 산자부 산업정책실장은 “신규 조성되는 반도체 클러스터는 그간 메모리에 집중됐던 우리 반도체 경쟁력을 시스템반도체 분야로 확장시킬 수 있는 메가 프로젝트”라며 “전력 인프라 적기 구축 등 클러스터의 성공적인 진행을 위해 필요한 지원 사항을 적극 검토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먼저 조성하는 곳은 SK하이닉스다. 용인시 처인구 일대 415만㎡ 산업단지 부지에 120조 원을 투자해 4개의 반도체 공장을 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2025년 초에 제1공장을 착공해 2027년부터 반도체 양산을 하고, 이어 3개의 반도체 공장을 더 짓는다는 계획이다.
경기도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SK하이닉스 외에도 50여 개의 소재·부품·장비 기업을 유치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3만1000여 개의 일자리 창출, 5000여 명의 인구 유입, 513조 원의 생산 효과, 188조 원의 부가가치 유발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삼성전자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는 우선 2029년 첫 번째 파운드리 공장을 본격 가동하는 게 목표다. 이후 순차적으로 공장을 착공, 2042년까지 총 5개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 동시에 소재·장비·부품·설계 기업 150여 개도 유치할 계획이다. 정부는 클러스터 조성에 맞춰 2027년까지 첨단 기술을 연구할 한국형 반도체 종합연구소도 설립한다. 산자부가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전담반을 만든 이유 가운데 하나다.
기존 반도체 연구·개발·생산 인프라와 유기적 연결 가능한 용인시
언론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클러스터 후보지로 용인을 선택한 이유로 사회간접자본, 유통을 위한 교통 인프라, 인재 확보가 용이하다는 점을 꼽는다. 용인은 2016년 8월 인구 100만 명을 넘은 특례시다. 그러나 면적은 약 560㎢로 수원시나 성남시보다 4~5배 더 넓어 일부 신도시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개발할 여력이 있다.
반도체 클러스터 운영에 필요한 전력과 용수 확보는 이미 충분하고, 경부고속도로와 인접해 있어 물류 고민을 덜 수 있다. 국제선 노선이 많은 인천국제공항과의 거리도 멀지 않다. 고급 인재 확보도 용이하다. 반도체 산업 발전에는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이 필수다. 국내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 다수가 서울과 성남시 분당, 판교에 몰려 있다.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존 반도체 클러스터가 용인 주변에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화성 EUV 클러스터에는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이, 용인 테크놀로지 센터에는 미국 반도체 장비 기업 램리서치, 화성 R&D 센터에는 일본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장비 기업 TEL, 경기 R&D 센터에는 미국 반도체 장비 기업 어플라이드 머터리얼즈(AMAT)가 입주해 있다. 모두 반도체 산업의 핵심 장비를 만드는 기업들이다.
산자부 관계자도 CBS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점을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한 삼성전자 용인·평택·기흥·화성과 SK하이닉스 용인·이천 시설이 메가 클러스터를 주도하는 만큼 다른 글로벌 기업의 참여 유인은 충분하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초기의 먹거리는 AI용 고대역폭 메모리 반도체
용인시의 인프라와 정부 지원은 충분히 확보한 셈이다. 문제는 용인에 지을 반도체 클러스터는 무엇을 만들어 먹고 살 것인가이다.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품목이 고대역폭 메모리 반도체(HBM), 일명 ‘AI 반도체’다.
올해 초 ‘챗 GPT’가 등장하면서 AI(인공지능) 기술이 한 단계 발전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더불어 세계 시장에서는 AI 관련 반도체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GPU(Graphic Processor Unit)다. 과거 암호화폐 채굴 때문에도 주목을 받았던 GPU는 복잡한 연산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세계 GPU 시장은 엔비디아가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GPU에는 HBM이 들어간다. HBM은 기존 메모리 반도체를 수직으로 쌓아 처리 용량을 키운 메모리 반도체다. 동시다발적으로 복잡한 연산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GPU에 HBM을 반드시 장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 HBM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서로 반분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GPU에도 국산 HBM을 탑재할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세계 시장조사업체들은 AI 기술 개발이 발전할수록 GPU와 함께 HBM 수요가 대폭 증가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서도 과거와 같은 단순 메모리 반도체로는 성장은 커녕 유지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 올해 1분기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4조5800억 원의 영업 적자를 기록했다. SK하이닉스 또한 3조4023억 원의 영업 손실을 입었다. 기존 메모리 반도체에만 매달리다가는 TSMC 등 대만 업체는 물론 국가적 지원을 쏟아 붓고 있는 미국·일본에도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때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HBM을 시작으로 차세대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를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을 것이라고 한다. 시장조사업체 프리시던스 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AI 시장은 1198억 달러였다. 그런데 2030년이 되면 1조5910억 달러로 13배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현재로서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의 미래는 밝은 편이다. 지난해 세계 HBM 시장의 50%는 SK하이닉스가, 40%는 삼성전자가 차지했다.
두 회사는 HBM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4월 SK하이닉스는 세계 최초로 D램을 12단으로 쌓아 올려 24GB(기가바이트)짜리 ‘HBM3’를 만들었다. 최근 ‘HBM3’ 양산 준비를 끝낸 삼성전자는 지난 4월 ‘스노우볼트’라는 이름의 상표권을 출원했다. 향후 HBM 제품에 붙일 이름이다.
HBM 같은 제품에만 집중하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핵심이 빠졌다는 게 ICT 업계 관계자와 기술전문매체의 지적이다. 바로 ‘팹리스’ 기업의 부재다.
반도체 클러스터의 ‘롱런’에 필수 요소는 ‘팹리스 업체’
팹리스(Fabless)는 Fabrication+less의 합성어로 제조 공장이 없는 반도체 기업 즉 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을 말한다. 이는 반도체 분야에 한정해서 일컫는 말이다. 반면 설계는 하지 않고 주문을 받아 제조·생산만 하는 업체를 파운드리 기업이라 부른다. 삼성전자, TSMC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6월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의 발표에 따르면 세계 1~10위 팹리스 기업은 퀄컴, 엔비디아, 브로드컴, AMD, 미디어텍, 마벨, 노바텍, 리얼텍, 윌반도체, 시러스 로직, 자일링스, 다이얼로그였다.
퀄컴은 스마트폰의 AP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갖고 있다. 엔비디아는 AI분야에 필수적인 GPU 시장을 90% 점유하고 있다. AMD는 컴퓨터 CPU분야에서 인텔과 맞먹을 정도의 기술을 가진 업체다. 다른 업체들은 디스플레이, 네트워크, 통신칩셋, 사물인터넷(IoT) 관련 칩을 설계하는 회사들이다.
우리나라에도 팹리스 기업이 있다. 범 LG가인 LX그룹 계열사 LX세미콘을 필두로 어보브반도체, 에이디테크놀로지, 제주반도체, 텔레칩스, 알파홀딩스, 앤씨앤, 아이에이, 피델릭스, 픽셀플러스 등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반도체 분야를 비롯해 차량, 디스플레이, 전력관리, 모바일 등에 사용하는 반도체 설계 업체들이다.
ICT 분야에서 꼽는 팹리스 기업들의 입지 조건은 주거 환경이 좋은 곳과 같다. 교육, 치안, 환경, 문화 인프라가 잘 조성된 곳을 꼽는다. 반도체 설계를 할 고급 인재들이 가족들과 잘 지낼 수 있는 곳이 팹리스 기업들의 입지 조건이다. 이렇게 보면 용인은 경기도에서는 상당히 수준이 높은 편이지만 아직 서울 수준은 아니다.
즉 용인의 반도체 클러스터가 성공하려면 우선 클러스터와 그 주변에 충분한 교육·문화·행정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주택 문제의 경우 반도체 분야 고급 인재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만큼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즉 용인시 처인구 일대의 주거 환경을 제대로 조성하고 반도체 분야 고급 인재들에게 혜택을 준다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성공 가능성은 크게 올라갈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과 도시계획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헌수 단국대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한 언론사 기고에서 이를 “직 (職·work)·주(住·live)·낙(樂·play)플랫폼 조성”이라고 표현했다. 즉 반도체 클러스터가 차세대 반도체 시장까지 석권하기 위해서는 기업과 정부는 물론 지자체와 지역 주민들까지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인재 확보, 특히 대학에서의 인재 육성이라는 지적이 있다. 김용석 성균관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중앙일보 기고를 통해 대학에서의 반도체 관련 교육 개혁을 역설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공계 기피 현상이 발생해 우수한 인재들이 부족하다는 게 김 교수의 지적이었다.
김용석 교수는 “반도체 학과라 명시된 학과만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특히 대학원 반도체 교육은 획기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과 이론만으로 반도체 설계를 배우는 게 아니라 설계부터 칩을 직접 만드는 것까지 할 수 있는 실전적 교육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지적이었다. 이런 실용적 인재 육성을 지금부터 서둘러야 20년 뒤 반도체 클러스터가 성공으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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