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수록하는 것은 합당할까? 당연히 의견은 찬반으로 갈린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지난해 5·18 기념식에서 ‘오월 정신 헌법전문 수록’에 강한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최근에는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기도 했다. 김 최고위원은 이 사단으로 당원권이 1년간 정지되는 중징계를 받았다.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수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먼저 찬반의 입장을 따져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대체 5·18 정신이 무엇이고 헌법전문은 또 무엇이길래 이 문제가 그렇게 정치적으로 첨예한 갈등을 불러오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수록하는 데 찬성하는 주장들을 살펴보자. 정태호 경희대 교수는 ‘개정헌법 전문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추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한국민주화에 결정적 기여 △5·18민주항쟁의 독자성 △헌법의 교육·통합효과 제고, 이 3가지를 꼽는다.
또 송기춘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5·18항쟁은 국가권력의 폭력적 지배에 맞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고, 헌정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민주주의’와 ‘저항’의 헌법적 가치를 지닌다”라고 주장한다.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는 “헌법전문은 헌법 제정의 역사적 의의와 주체, 헌법제정 과정과 목적 및 헌법의 목적과 지도 이념을 규정하는 것으로 인간적 존엄성 회복과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이었던 1979년 10월 부마 민중항쟁, 1980년 5·18 광주민주항쟁, 1987년 6월항쟁은 헌법전문에 명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5·18 헌법전문 수록 찬반 논리
이처럼 대부분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넣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한국 민주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따라서 3·1만세운동과 4·19 정신을 헌법전문에 수록한 맥락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 문제에 대한 반대 진영의 논리나 입장은 분명하지 않다. 대부분 ‘시기상조’를 내세우는데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당내 의견 수렴’으로 정리했다. 이에 보수 시민단체들은 좀 더 적극적인 반대 이유들을 제시한다. △5·18진상조사 미흡. △북한군 개입 가능성 △유공자 선정 불투명 등이 그것이다.
일단 반대의 주장이 찬성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리가 아니기에 먼저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수록해야 하는 이유들부터 그 논리에 따라 검증해 보는 것이 유용하다. 다시 말해 5·18이 대한민국 민주화에 기여한 공이 결정적이라면 왜 5·18만 넣어야 한다는 걸까. 홍윤기 교수의 주장처럼 10월 부마항쟁은 5·18의 정신적 모태가 된 사건이다. 그리고 87체제를 불러온 6월항쟁은 오히려 5·18보다 민주화에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한국 민주화에 5·18만을 헌법전문에 수록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오히려 정파성과 편협성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5·18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10월 부마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영남 민주화 세력의 맹주 YS를 당시 박정희 정권의 여당인 공화당이 국회에서 제명함에 따라 영남권에서 항의해 일어났던 것이고 5·18의 도화선은 전두환 정권의 호남 민주화 세력의 맹주, DJ 구속에 항의로 발발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YS는 문민정부의 대통령으로서 광주 5·18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하고 특별법 제정을 했지만 이어서 대통령이 된 DJ는 부마항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정부 차원에서 시행하지도 않았고 5·18처럼 특별법을 제정하지도 않았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결정판인 87체제를 결단한 주인공은 노태우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대한민국 영호남 지정학적 대결 구도와 정파간 주도권에 대한 셈법이 5·18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 주장에는 정녕코 없다는 것일까. 일단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논하기로 하고 그렇다면 도대체 헌법전문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 효력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헌법전문이 의미하는 것
헌법전문에 법적 효력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긍정설과 부정설로 갈린다.
헌법전문이라는 것은 헌법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헌법제(개)정의 동기나 목적 및 이념, 그리고 헌법제(개정)의 주체나 절차에 관하여 밝히고 있는 부분으로서 성문헌법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이론적으로는 헌법전문의 규범성 (법률성)을 부인하는 학설과 이를 긍정하는 학설로 나뉘는데, 규범성 부인설에 따르면 헌법전문은 헌법의 유래라든가 헌법제정의 목적 또는 헌법제정에 있어서 국민의 결의 등을 기술한 것에 불과하며, 선언적인 것일 뿐 명령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로 안슈츠, 마이어 등 19세기 독일공법학자들과 웨어, 코인 등 영미헌법학자와 미국 연방대법원의 견해가 그렇다.
반면 규범성 긍정설에 의하면 헌법전문은 헌법제정권력의 소재를 밝히고 헌법이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에 대한 국민의 결단을 밝힌 것이므로 이는 헌법 본문과 일체를 이뤄 법적 효력을 가진다고 한다. 형식적으로도 실정헌법의 일부를 구성하고, 실질적으로는 헌법규범의 단계구조에서 최상위의 규범이라는 것이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우리 헌법의 전문과 본문 전체에 담겨 있는 최고 이념은 국민주권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입헌민주주의 헌법의 본질적 기본원리에 입각하고 있다. 기타 헌법상의 여러 원칙도 여기에 연유되는 것이므로 이는 헌법전을 비롯한 모든 법령해석의 기준이 되고, 입법형성권 행사의 한계와 정책 결정의 방향을 제시하며, 나아가 모든 국가기관과 국민이 존중하고 지켜야 하는 최고의 가치규범이다’라고 하여 규범적 성격을 가진다고 판시하고 있다.
우리 헌법재판소가 헌법전문을 법적 효력이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기에 5·18 정신이 헌법전문에 수록된다는 것은 5·18에 대한 정당성 의문이나 의혹 자체를 원천 차단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법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은 오늘날 실패한 혁명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
이승만의 단정 수립과 박정희의 5·16은 당시로서는 국민적 지지를 받았지만 87체제 후에는 비판적 해석들이 등장했다. 이를 수정주의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헌법에 수록된 역사적 사건들도 어느 때에 이르면 그 해석과 평가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역사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재와 끊임없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역사를 불변의 헌정 정신을 표방하는 헌법전문에 수록한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로는 낭만주의적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기에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1968년에 기본권을 개정하여 기본법 제20조 제4항에 최종적인 헌법수호수단으로서 저항권을 명문화했다. 즉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폐제하려고 기도하는 어떠한 자에 대하여도 다른 구제수단이 없을 경우에는 모든 독일인은 저항할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함으로써 나치의 전체주의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 헌법의 ‘국민 저항권’
저항권이란 국가권력이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중대한 불법을 행한 경우에 국민들이 스스로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 인간의 존엄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합법적인 구제수단이 불가능할 때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러한 저항권은 국가권력보유자에 의한 헌법의 불법적 폐제(‘위로부터의 정변’)에 대한 저항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을 탈취하고자 하는 혁명세력에 의한 헌법의 불법적 폐제(‘아래로부터의 정변’)에 대한 저항도 포함된다.
이러한 독일의 개정 헌법정신을 따른 국내 사례가 있다. 즉 87년 헌법 개정시안에서 통일민주당은 3·1운동과 4·19에 이어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넣었던 것에 반해 신한민주당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헌법전문에서 모두 삭제하고 <그림1>처럼 ‘국민 스스로 저항할 권리’로 대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4·19와 5·18은 국민 저항권이었던가?
헌법학자 권영성 교수에 따르면, 헌법전문에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한 부분은 불의에 항거함으로써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한 국민적 저항권 행사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반면, 헌법전문의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부분이 저항권에 관한 규정이라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홍성방 서강대 교수에 의하면 4·19혁명은 저항권의 발동에 의해 헌법질서가 복구된 것이 아니라, 제2공화국이 들어선 것이기 때문에 ‘헌법수호수단으로서의 저항권’의 행사가 아니라 철학적 의미의 저항권, 즉 ‘인권으로서의 저항권’의 행사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5·18은 국민 저항권인가? 이 부분에 대한 공론적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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