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달러의 부활... 영원 불멸할 것인가, 먼지처럼 사라질 것인가
[서평] 달러의 부활... 영원 불멸할 것인가, 먼지처럼 사라질 것인가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20.08.29 13: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책을 한 줄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20세기 달러의 역사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을 배경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그 시기가 미국이 글로벌 리더로 자리매김하면서 자국의 통화인 달러가 전쟁으로 파괴된 곳곳을 복구하는 지원금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달러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의 첫 번째 장에서는, 1944년 7월에 전후 통화시스템을 결정하기 위해 미국 뉴햄프셔 주 브레튼우즈에 있는 화이트 마운틴즈 리조트에서 열린 동맹국 회의에서 미달러화를 축으로 하는 ‘조정가능한 고정환율제’를 도입하는 합의문이 도출되는 상황을 생생하게 다룬다.

전후 브레튼우즈 체제 하에서 달러의 위상은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당시만 해도 달러는 기축통화(基軸通貨, key currency)로서의 요건을 충족하는 듯 했다. 국제외환시장에서 금융거래 및 국제결제의 중심이 되는 기축통화의 발행국은, 전쟁으로 국가 존립이 문제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해야 하고, 고도로 발달된 외환 및 금융, 자본 시장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자유로운 대외거래가 보장된 곳이어야 하는데, 그런 나라는 미국이 유일했다.

하지만 달러의 위상이 삐걱거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달러는 분명 기축통화로서 지배적인 국제통화이지만, 동시에 미국이라는 한 나라의 화폐이기도 하다. 달러의 가치에 미국의 이권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1965년 2월경 한 기자회견 자리에서 대놓고 달러를 공격했다. ‘달러 시스템’이 미국에게 ‘터무니없는 특권(exorbitant privilege)’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즉, 달러 덕분에 미국은 전 세계로부터 거의 공짜로 돈을 빌릴 수 있으며, 국제수지 적자를 내고서도 금을 잃는 대신 달러를 무한정 발행해 메운다. 부당하게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린 미국의 기업들이 유럽에 대거 투자하면서 경제적 지배를 늘린다는 분노에 찬 발언도 빼놓지 않았다. 기축통화 달러의 가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을 유럽의 한 부유한 나라의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터트린 것은 매우 이례적이면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국제사회에서 달러를 향한 비판이 다양하게 터져 나왔다.

“달러는 우리의 통화이지만, 문제는 당신들의 것이다!” 1971년경 존 코낼리 미국 재무장관이 유럽의 재무장관들에게 한 이 도발적인 발언은, 달러의 위기감을 미국 스스로가 인정해버린 셈이 되었다. 이 폭탄선언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금태환 정지와 수입관세 부과를 골자로 하는 ‘신경제 프로그램’을 전격 발표한 직후에 터져 나왔다.

이 책을 국내에 소개해 번역한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은 코낼리의 이 발언에 담긴 함의를 찾는 과정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고 한다. 20년 가까이 ‘전 세계 중앙은행 관찰자(central bank watcher)’로 활동해온 역자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당시 코낼리 장관의 발언은 달러가 갖고 있던 두 가지 중요한 속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달러는 지배적인 국제통화이지만 그 가치가 만성적으로 불안정하다. 즉, 달러는 기축통화이기에 미국 바깥에서도 누구나 보유해야만 하는 통화이고, 불안정한 달러의 가치는 그래서 거의 항상 미국 바깥이 짊어져야 하는 문제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태생적으로 이러한 ‘달러의 위기’를 잉태하고 있었다. 미국의 달러만 금에 고정시키고 다른 통화들의 가치는 달러에 고정했다. 브레튼우즈의 실체는 변형된 금본위제였던 것이다. 그렇게 달러는 ‘20세기의 금’이 되었고, 미국 바깥의 여러 나라들은 달러를 준비금으로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달러가 미국 바깥으로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다면, 세계경제는 화폐 부족으로 인한 성장 저하, 심지어 디플레이션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결국 브레튼우즈 체제는 구조적으로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를 필요로 하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이 주도했던 통화시스템이 미국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것이다. 세계경제의 원활한 성장과 달러의 안정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트리핀의 딜레마’를 극복하지 못한 채 브레튼우즈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후 미국이 선택한 것은 통화정책의 완화와 변동환율제였지만, 순조롭게 연착륙할리 만무했다. 전 세계적으로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통화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갈수록 달러의 불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베트남전쟁과 오일쇼크까지 이어지면서 미국 경제는 어마무시한 인플레이션 괴물에게 치명상을 입고 만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판한 인물이 이 책의 저자인 폴 볼커다. 1979년 카터 대통령의 지명으로 미 연준 의장에 오른 볼커는, 연방준비제도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통화긴축정책의 칼을 빼어든다.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면 금리를 올려야 하지만 그럴 경우 경기는 더욱 위축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커의 선택은 인플레이션 퇴치였다. 볼커는 1981년 기준금리를 19세기 남북전쟁 이후 최고 수준인 연 21%까지 끌어올렸다.

그 여파로 실업률이 치솟았고, 경기침체는 더욱 심화했다. 농민들이 트렉터를 끌고 연준 본관 에클스빌딩을 봉쇄하는 등 연준을 향한 강력한 시위가 이어졌다. 카터에 이어 집권한 레이건은 이러한 민심을 등에 업고 경기부양을 이유로 금리인하를 압박했지만 볼커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락가락한 통화정책을 펴다 혼란만 가중시켰던 전임 의장들과는 분명 달랐다. 머지않아 볼커의 과단성 있는 판단은 틀리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다. 1980년 3월 14.8%까지 올랐던 인플레이션이 1983년 3.2%까지 떨어지면서 미국의 장기 호황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볼커에게 ‘인플레이션 파이터’라는 닉네임이 붙여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책에는 저자 볼커의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의 면모와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볼커 스스로 자신의 업적을 상찬하는 내용은 없다. 이를 두고 런던 파이낸셜타임스는 이 책의 서평에 붙여, “그 어떠한 거만함의 흔적도 없는 무결한 역작”이라고 평가했다.

이 책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달러가 흥·망·성·쇠하는 역사적 변곡점들을 심도 있게 다룬 한편의 다큐멘터리인 것이다. 저자 볼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브래튼우즈 체제에서부터 달러의 금태환 정지, 변동환율제 도입, 오일쇼크, 인플레이션 전쟁, 플라자합의와 루브르합의, 블랙먼데이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국제통화 무대의 중심에서 직접 관여했거나 목도했던 거대한 사건들을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했다. 미국 고위직 관료의 사적인 소회가 아닌 ‘국제통화에 관한 현대사 정본’으로서의 가치를 획득하기에 이 책은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이 책이 발간된 지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미래의 국제통화 질서에 적지 않은 울림을 주는 이유다.

역사는 운율을 달리해 반복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중남미를 비롯한 지구촌 곳곳에서 경제위기들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오일쇼크’와 ‘팬데믹’, ‘미-일 긴장관계’와 ‘미-중 대립관계’ ‘블랙먼데이’와 크고 작은 금융패닉 사태들은 묘한 데자뷰를 이룬다. 수십 년 전 저자가 이 책에서 설파한 것들은 지금의 현실을 진단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미래를 전망한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