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25일 23시 육군본부는 영남관구 편성사령관 채병덕 소장에게 ‘긴급 작전명령 72호’를 하달했다. 긴급명령 내용은 간단했다.
① 하동 방면으로 남하한 적은 1개 대대 규모이며 약간의 장갑차를 동반하고 있음.
② 영남관구 편성사령관은 지체없이 하동으로 약진하여 동침하는 적을 격퇴하라.
③ 행정사항: 장갑차 공격 시에는 휘발유병(휘발유 충전)을 사용할 것.
④ 전투지휘소의 위치를 보고하라.
그러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병력이 채병덕 소장에게는 없었다. 수도서울을 빼앗긴 책임을 지고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됐다. 영남관구 편성사령관에 다시 임명된 것은 7월 24일이다. 채병덕 소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군 연락장교 역할에 불과했다. 채병덕 소장은 미 24사단 예하 29독립연대 3대대장 헤럴드 무어 중령과 긴급하게 하동지역으로 투입되었다.
섬진강을 건너 하동지역으로 넘어오는 적은 1개 대대 규모가 아니었다. 북한 인민군 최정예사단 중 하나인 6사단 주력이었다. 인민군 6사단은 일명 방호산 사단이라고 불리는 부대로 중국 공산당 팔로군 166사단이 그대로 인민군으로 편입된 부대였다. 1949년 7월 초 방호산이 인솔해 북한으로 들어와 1949년 7월 25일 인민군 6사단으로 재편된 부대였다. 한마디로 유격전에 닳고 닳은 부대가 섬진강을 건너 하동으로 밀려들어온 것이다.
인민군 6사단 방호산부대의 우회기동 공격에 국군과 미군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대구와 왜관 등 낙동강에 치중된 상태였기 때문에 섬진강 일대는 사실상 방어병력이 없다시피했다. 하동전투에서 초대 육군참모총장이던 채병덕 소장은 34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
국군 1개 대대는 궤멸되었다. 하동이 뚫리자 바로 진주도 인민군 6사단의 수중에 떨어졌다. 진주 다음은 마산이다. 마산까지 함락되면 부산은 바로 지척이다. 중국 대륙을 누비던 방호산 사단은 유유히 마산의 길목인 진동지역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워커 사령관은 상주에 있던 미 25사단 예하 27연대를 마산으로 긴급 이동시켰다. 6·25전쟁에서 진동리지구 전투로 불리는 마산 서부지역 전투는 1950년 8월 2일부터 9월 14일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한국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유격전에 특화된 팔로군 출신 인민군 6사단은 미군의 공중폭격과 막강한 포병화력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부산 코앞인 마산에서 인민군 6사단의 진격은 차단되었다.
이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인민군 6사단은 전장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런데 그 세력은 유격전의 명수답게 지리산으로 숨어들고 태백산맥을 타고 북한으로 돌아갔다. 미군에게 인민군 6사단은 유령부대로 불릴 정도였다. 방호산의 인민군 6사단이 마산을 공격했을 때가 6·25전쟁에서 가장 위태로웠던 시기였다고 전사가들은 말한다. 우리로서는 패전에 가장 근접했던 시기였다.
김일성이 극찬했던 ‘이중영웅’ 방호산
방호산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은 축구로 비유하자면 ‘’라이트 윙’에 해당하는 포지션이었다. 상대방의 좌측방을 깊숙이 침투해 센터링을 날려주는 그런 역할을 방호산의 6사단은 수행했다. 방호산은 한국전쟁 당시에도 교과서적인 소련군의 전술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전술을 펼쳤다. 6·25전쟁 발발 당일 개성 점령 시 한국군의 수비대를 기만전술로 묶어놨다.
이미 폐선되었던 철도를 연결해 전투 병력을 손실 없이 개성 시내로 무혈입성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한강을 최초로 넘어 김포로 건너온 부대 역시 방호산의 6사단이었다. 이들은 팔로군 시절 항일 유격전과 장개석 군대와 싸운 경험을 그대로 6·25전쟁에서도 발휘했다. 북한 인민군의 ‘라이트 윙’을 담당한 방호산의 6사단은 김포반도를 통해 단숨에 충청도 천안을 점령했다. 특유의 기동 우회전술을 국군과 미군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방호산의 6사단은 팔로군의 전술에 맞게 서해안을 따라 은밀히 남하했다. 미 24사단은 인민군 주력 3사단과 4사단에 연파당했다. 미군은 북한 인민군 6사단의 위치조차 알지 못했다. 1950년 7월 11일부터 방호산 6사단은 말 그대로 ‘노마크 찬스’를 누리고 있었다. 방어 병력이라고는 경찰 병력뿐인 호남지역을 무혈입성하다시피했다.
7월 12일에는 공주를 그리고 7월 19일에는 금강을 도하하고, 사단을 3개로 나눠 7월 20일 김제, 같은날 전주를 점령했다. 7월 24일에는 인민군 6사단 예하 13연대가 목포항을 점령하고 또 다른 연대는 25일 여수항을 점령했다. 방호산은 각각 1개 대대씩 항구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전 병력을 28일 하동에 집결시켰다. 8월 2일 마산진동리 지구 전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방호산의 인민군 6사단은 발빠른 ‘라이트 윙’의 역할은 부산 코앞인 마산 진동리까지 깊숙이 파고 들어왔던 것이다. 느닷없이 섬진강을 건너 하동에 들이닥친 인민군 6사단의 기습에 국군과 미군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그래서 미군은 경북 상주에 있던 25사단 일부를 급하게 마산지역으로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인민군 6사단의 전공을 높게 사서 사단 병력 전체에 1계급 특진과 방호산 소장을 중장으로 특진시키고 영웅 칭호까지 줬다. 아울러 사단 명칭에 ‘근위 서울’이라는 북한군 부대 최고 명칭까지 부여했다.
지리산 빨치산 남부군에 영향을 준 인민군 6사단
인민군 6사단은 한달 간 충청 전라도 전역을 휩쓸었다. 호남지역에서 방호산부대가 보급에 제약 없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는 토착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이 컸다. 6·25전쟁 기간 중 호남과 지리산 일대의 극심했던 빨치산 활동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전라도 지역에서 인민군 6사단에 부역하던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은 극에 달했다. 경찰과 그 가족들의 피해는 막심했다. 이들 토착 공산주의자들은 우익진영을 탄압함과 동시에 인민군 6사단에 보급대 역할까지 수행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후 대부분의 북한군이 와해되었지만 방호산 6사단만큼은 대오를 유지하면서 태백산 줄기를 따라 북으로 올라갔다. 김일성은 이 점을 극찬했다. 중국 연안파 지휘관은 부대를 유지하면서 후퇴했는데 그중에서도 방호산의 6사단은 남한 각지에 파견되었던 북한 관리 8000명과 자생 빨치산까지 수용해 월북한 것이다. 그래서 김일성은 방호산에게 최고훈장인 ‘이중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전쟁 기간 중 이중영웅 훈장을 받은 이는 5명에 불과하다.
북으로 올라가지 않은 일부 잔존세력은 지리산 일대에서 암약하면서 유격전을 펼쳤다고 보는 전사가들도 있다. 이들과 연계된 것이 일명 ‘남부군’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방호산의 6사단은 팔로군의 유격전을 그대로 한국전에서도 실행한 부대였다.
후세 전략가들은 대전에서 부산으로의 최단거리인 영동-김천-대구-부산으로 나가는 주공격 축선에 방호산 6사단이 아무런 역할을 못한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인민군 3사단과 4사단의 ‘백업’을 못했기 때문에 낙동강 전투에서 북한군 주력이 와해되었다는 지적이다. 그 결과 미군과 한국군이 낙동강을 방패 삼아 재편성의 시간을 줬다는 이유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론적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설사 방호산의 6사단이 김천지구 및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었다 하더라도 미 공군 B-29의 전략폭격 앞에 뾰족한 수단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워커 장군조차 “북한군 6사단의 기동은 이제까지의 한국전쟁을 통해 가장 훌륭한 기동이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휴전 후 방호산은 김일성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연안파였던 방호산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에 연루되어 모든 칭호와 공훈을 박탈당하고 숙청당했다.
김일성의 요청으로 모택동이 북한군에 편입시킨 조선인 팔로군은 10개 연대 규모였다. 이는 북한군 전체 병력의 거의 절반 규모였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 21개 보병연대 중 거의 절반인 10개 연대가 중국에서 건너온 조선족 팔로군부대였다.
이들 10개 연대가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 주력부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6·25전쟁은 사실상 중국 팔로군의 남침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휘관도 마찬가지다. 6사단장 방호산뿐만 아니라 1군단장인 김웅은 중국 팔로군 연대장 출신, 2군단장 김광협, 10사단장 이방남, 4사단 이권무, 5사단장 김창덕, 12사단장 최인 등 모두 중국 팔로군 출신이었다.
북한 인민군 1사단은 1946년 1월 11일 철도보안대로부터 시작하는데 구 일본군 19사단 사령부였던 함경도 나남에서 13개 경비중대로 시작했다. 그 중 3독립 혼성여단은 1948년 9월 9일 인민군 3사단으로 재편되는데 그 중심 부대는 모두 조선의용군이라 불리는 중공군 팔로군 출신들이 주축이었다. 6·25전쟁에서 수도 서울을 함락시킨 주력부대였던 인민군 4사단은 1948년 10월 15일 완편 사단이 되는데 그 중 1개 연대는 중공군 팔로군이 그대로 북한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인민군 5사단은 조선인으로 구성된 중공군 164사단이 북한 인민군으로 재편된 사단이다. 1949년 7월 부사단장 김창덕이 인솔해 북한으로 들어왔다. 6·25전쟁 기간 중에는 동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특히 포항지구 전투에서는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3사단과 학도의용병이에 인민군 5사단의 공격이 저지 당했다.
인민군 7사단 역시 조선인으로 구성된 중공군 중남군구 독립 15사단이다. 부사단장이던 전우가 인솔해 1950년 4월 북한 원산으로 들어와 북한 인민군 7사단으로 개칭되었다.
6·25전쟁에서 북한의 선봉 근위부대
6·25전쟁에서 북한의 선봉 근위부대는 서울을 함락시킨 ‘류경수 105 땅크사단’과 인민군 3사단 그리고 4사단이다. 국군에게 북한군 T34탱크라는 충격을 준 부대가 류경수 105 땅크사단이다. 이 사단은 북한 최초의 기계화 사단이었다. 초대 사단장 류경수는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1년 전인 1947년부터 전차부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1948년 8월 20일 정식으로 ‘제15땅크련대’로 명명하고 류경수가 연대장으로 취임했다. 현재 북한 기계화군단인 ‘제820기계화군단(820훈련소)’의 대호가 바로 이 8월 20일에서 따온 명칭이다.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넘겨받은 T-34 240여 대와 SU-76 자행포(자주포) 170여 대를 주축으로 남침을 감행했다. 제15땅크련대는 1949년 4월 26일 ‘제9 땅크려단’이라는 단대호가 변경되었다.
류경수의 제9땅크려단 예하 4개의 전차연대는 북한군 남침 주력사단인 1, 3, 4, 6사단에 1개 연대식 배속시켜 작전에 투입되었다. 서울을 점령할 당시 북한 인민군 3사단과 4사단의 선방부대로 107, 109 땅크련대가 국군 방어부대를 돌파했다.
서울 점령 당시 중앙청을 가장 먼저 점령했다는 ‘제9 땅크려단 소속 312호 땅크’는 현재도 북한의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근위 류경수 105 땅크 사단’ 소속의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사람은 총 9명이다.
북한 인민군 근위 3보병사단은 6·25전쟁 당시 서울 침공의 전과로 ‘서울’ 칭호를 받았다, 인민군 3사단은 금강 도하 전투, 포천 침공, 대전 침공 등의 전과로 1950년 7월 26일 근위 칭호를 수여받고 근위대로 승격되었다. 6·25전쟁에서 인민군 3사단 소속 ‘공화국 영웅’ 칭호 수여자는 8명이다.
특히 인민군 3사단은 대전지구 전투에서 4사단과 협공으로 미 24사단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포로가 되었다. 인민군 3사단은 105 땅크여단의 지원 하에 미 24사단 정면을 공격했다. 인민군 4사단은 공주를 거쳐 1950년 7월 15일 논산을 점령하고 19일 유성을 거쳐 대전 외곽 미군 24사단의 측면을 공격했다.
인민군 4사단 중 1개 연대는 금산 방향으로 우회 기동해 미 24사단 배후를 공략하면서 미 24사단은 패닉에 빠졌다. 미 24사단 34연대는 철수 도중 북한 인민군 4사단의 매복에 걸려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대전지구 전투에서 미 24사단은 총 1150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근위 서울 김책 4보병사단은 6·25전쟁 개전 당시 북한 인민군 1군단 산하의 부대였다. 북한 조선로동당 창당 이후 이북 지역의 당세포들에서 추천된 골수 당원들과 국공내전 이후 중국에서 북한으로 건너온 팔로군 부대로 구성된 북한군 혼성 보병사단이었다.
주력 연대는 팔로군 출신들이었다. 인민군 4사단은 오산지구 전투에서 미 스미스부대를 격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 전투는 한국으로 급파된 미군과의 최초의 교전이었다.
중공군 본진 투입과 인해전술
이 전투에서 미군은 북한군의 전투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대전지구 전투에서도 인민군 3사단과 협공으로 미 24사단을 격파했다. 인민군 4사단은 전쟁 발발 이후 서울 침공으로 ‘서울’ 칭호를, 대전 침공과 금강 도하 전투, 낙동강 도하 전투의 전과로 1950년 8월 19일 ‘근위’ 칭호를 수여받았다.
중공군 팔로군이 주축이 된 북한 인민군 주력은 낙동강 전투에서 사실상 와해되었다. 후속 부대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맥아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했다. 그러자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압록강을 넘어왔다. 모택동 군대 30만이 한반도로 밀려들어왔다.
1950년 6월 25일이 북한군으로 옷을 갈아입은 팔로군의 1진의 남침이었다면 1950년 12월 겨울 인해전술은 중공군 본진의 남침이었다. 흔히 북한과 좌익세력은 민족공조를 외치면서 미군을 외세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작 중국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 대한민국을 친 것은 바로 김일성이었다.
6·25 때나 현재나 중국은 대한민국의 주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민족을 가장 위협하는 군대는 중국군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민한다는 현 정권의 군사 외교적 스탠스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직도 방호산부대의 후손이 남한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일성이 중시했다는 사상 유격전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거의 성공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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