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주년] 새롭게 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 ‘대한국민의회’(노령·만주지역 한국인들)의 건국 구상
[임시정부 100주년] 새롭게 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 ‘대한국민의회’(노령·만주지역 한국인들)의 건국 구상
  • 박명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19.06.27 10: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운동 당시 러시아와 만주지역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어떤 국가를 만들고자 했을까? 1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 세계는 두 가지 이념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하나는 미국 대통령 윌슨이 내세운 민족자결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이었다. 윌슨은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했지만 볼셰비키는 공산주의 혁명을 꿈꿨다. 당시 러시아와 그 주변 지역에 살던 한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이 지역의 한인들의 상황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한다. 원래 러시아와 일본은 앙숙이었다. 따라서 한인들은 이런 러시아의 반일 감정을 이용해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영국·일본과 연합하여 독일과 싸웠다. 반일 감정을 이용한 독립운동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러시아에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났고, 황제가 물러나고 부르주아·지주계급이 중심이 되는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당시 이곳에 귀화해서 살고 있던 한인들은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하지만 11월에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하는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고 임시정부는 무너졌다. 여기에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들은 큰 관심을 가졌다. 이제 러시아에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소련)이 세워진 것이다. 소련은 연합국에서 탈퇴했다.

미국·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은 이것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연합군은 1918년 초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군대를 파견하여 볼셰비키 혁명의 확산을 막았다. 당시 체코군이 서부전선에서 극동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연합군이 1918년 봄부터 극동에 진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9년 말 경까지 극동에는 볼셰비키가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1919년 이 지역에서의 3·1운동은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에서 최재형(1858.1. 20~1920. 4. 7)의 역할은 매우 컸다.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에서 최재형(1858.1. 20~1920. 4. 7)의 역할은 매우 컸다.

3·1운동 당시의 러시아와 한인사회 독립운동

그러면 이런 국제 정세 가운데서 한국인들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었는가? 당시 러시아의 한인들은 귀화인과 비귀화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자는 러시아에 귀화해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 한인사회를 위해 일하고 있었는데 그 지도자는 최재형과 문창범이었다. 후자는 당시 러시아에서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음으로 볼셰비키 혁명에 경도되었고 그 지도자는 이동휘였다. 전자는 전로한족중앙총회를 만들어 활동했고 후자는 한인사회당을 만들었다.

이런 가운데 1918년 11월 11일 독일은 미국에 항복했고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먼저 미국에서 파리에 이승만을 비롯해 대표를 파송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일본의 학생들은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한민족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는 믿음을 갖고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상해에서도 미국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파리에 김규식을 대표로 보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 같은 소문을 들은 노령 한국인들은 이런 상황 가운데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19년 2월 25일 기존의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중심으로 간도와 국내 그리고 상해에서 대표자들이 참석해 전로국내한인총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이것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민의회를 모방해 대한국민의회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노령에 있는 한인들을 중심으로 만주와 국내, 그리고 상해의 한인들이 모인 전민족대회였던 것이다.
 

대한국민의회의 독립선언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기독교정신

대한국민의회는 3월 17일 러시아 니콜라스/우수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이것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와 훈춘에서 다시 발표되었다. 이것은 당시 볼셰비키 혁명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에서 한국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 준다.

무엇보다 이 독립선언서가 강조하는 것은 현재 세계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통해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호라, 천하에 어찌 강권만 있고, 공리는 없는가. 지난 유럽의 4년 전쟁은 실로 이를 위하여 피를 흘린 것이며, 현재 파리대회 또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개최된 것이다. --- 이른바 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은 결국에 영원히 소멸하고, ---. 환언하면 오늘의 세계는 곧 윌슨 씨가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시대이다.” 이것은 놀라운 선언이다. 왜냐하면 볼셰비키의 혁명이 진행되는 현장에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미국 윌슨과 그가 주도하는 파리강화회의에게서 찾은 것이다.

또한 이 문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일본이 아시아의 평화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다른 연합국과 함께 민주주의 국가라고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일본의 본질은 군국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일본은 끊임없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국가로서 1868년 홋카이도, 1895년 대만, 1910년 조선, 1916년은 중국에 산동반도를 요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체코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러시아를 침공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 근본에는 조선이 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시아에서 평화가 주어질 수 없다.

대한국민의회는 한국 역사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선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의 조선에서 기독교는 국민적 종교라는 의의를 획득하였다. 자유에 굶주린 조선인들에게 기독교의 가치는 거대하다. 기독교가 서구 민주사상, 곧 자유와 동포주의 사상의 가장 뛰어난 전파자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당연하게도 조선에서 기독교 역시 박해의 대상이 되었으며, --- 온갖 고문들 중 가장 잔혹한 종류의 고문을 당하였다.” “어두운 가운데 수입한 문화의 한 줄기 광맥은 예수교뿐이라.” 이들은 기독교적인 민주주의에서 소망을 찾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최재형과 문창범을 중심으로 하는 전로한족중앙총회 인물이며 이동휘는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심 인물은 아니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러시아와 만주에 살고 있는 한인들도 볼셰비키의 혁명보다는 윌슨의 주장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교포들도 볼셰비키 혁명보다는 윌슨의 기독교적인 민주주의를 원했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대한국민의회가 기독교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독립선언서는 기독교를 서구 문화와 민주주의를 소개한 국민적인 종교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파리강화회의의 주요 국가들이 기독교국가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동시에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하고 있는 인물들 가운데 상당한 수의 기독교인들이 있으며, 특히 이들 교포사회의 교육기관은 기독교가 60% 이상 차지하고 있다는 점도 참고해야 할 것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