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주주의는 참으로 만성적인 발달장애 증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권력만능주의, 독선주의, 당파적 대결주의, 기회주의 등의 온갖 고집과 아집에 매몰되어 있다.
국민의 실망과 분노가 한계를 넘은 지 오래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민주주의의 게임이 룰을 규정하고 있는 정치제도가 문제이고 제도의 운영이 문제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과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인가? 너무나 자명하고 누구나 답을 안다고 생각하는 질문을 왜 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이 땅에 민주화를 자신들이 이뤄냈다고 위세 부리는 민주화 세력 그리고 ‘이게 나라냐?’고 항변하며 촛불을 들어 탄핵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을 축출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세운 촛불부대 두 집단의 두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다.
우리는 민심이 천심이고 이 민심 천심이 곧 민주주의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대중이 거리로 나와 광장에서 모든 결정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빌미로 정치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으며 민주화 세력이라 자칭하는 집단들이 반(反)민주적 행태를 일삼고 있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모르면서 민주주의를 하고 있고, 민주주의를 알면서 권력을 잡기 위해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있다. 일부 진보 좌파 세력들은 ‘민주화’나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전용 특허인양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서도 3대에 걸친 진짜 비민주 독재국가인 북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민주정치체제는 가장 나쁜 국가 형태, 즉 전제정치나 독재정치를 피하는 수단이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관심의 초점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이룰 것인가’에 있었으며, ‘왜 민주주의이어야 하는가’는 관심의 주된 대상이 아니었다. 민주화를 위한 열렬한 투쟁이 있었지만, 정작 민주정치체제의 본질과 정당성에 대한 고민에는 그만큼의 열정이 바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폭민주의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과 논의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추구했는가? 두 견해로 나뉠 수 있는데 우파는 자유민주주의를 순수하게 원칙대로 구현하라는 요구이고 좌파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한 사회민주주의나 인민민주주의 등 같이 공동체를 강조하는 요구이다.
국토 분단이라는 상황에서 우익 이승만 대통령의 고민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립해 놓고도 동시에 이와 모순되는 반공주의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 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좌파적 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밖에 없었으나 한국 좌파는 인민민주주의로 경사되어 있었는데 인민민주주의의 혁명이 달성된 동구나 아시아 제국에서는 정치체제로서 독재가 있었을 뿐 민주주의가 실현되어 본 일은 없는 상태에서 좌파는 진퇴양난에 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좌파에게 민주주의는 혁명이란 극한적인 수단을 통해 사회주의나 민중주의 같은 급진사상을 실현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소수였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좌파는 언제나 투쟁적이었다. 1987년의 6·29선언 이후 자유선거와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되었는데도, 좌파는 민주주의를 계속 요구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는 자유선거와 의회정치 이상의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건국 초기 시점에서는 물론이고 지금에 봐서도 자유민주주의는 당시 한국적 맥락에서는 매우 전대미문의 급진적 사상과 제도였다. 불로흐(Ernst Bloch)가 개념화한 이른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전개되었다. 조선왕조와 일본 식민지를 거친 오랜 전통적 질서가 시민의식으로 성숙되기는 커녕, 아예 없는 상태에서 급속하게 수입된 자유민주주의 제도가 요구하는 질서가 병렬적으로 공존하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북한에 공산주의 이념에 기반을 두는 정부가 수립되고 그들로부터 치열한 도전에 직면하면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세력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는 새 질서를 수호 유지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반공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반공이 곧 자유민주주의라는 역설을 낳는 상황에 처한다. 반공이라는 수단적 가치가 때때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본질적 가치를 훼손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민주화의 주역은 누구인가?
한국 민주화를 특정 세력들이 자신들의 전유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큰 문제이다. 한국 민주화는 각기 다른 시점에서 많은 다른 집단이나 사람에 의해 진행된 것이지 80년대 민주화 세력의 기여는 일반적 인식보다는 작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외형만 관찰하면 한국에서의 민주화는 첫 번째 건국한 해인 1948년, 두 번째 4·19민주혁명이 발생한 1960년, 세 번째 5·16 후 2년여 지속된 군정이 마감되는 1963년, 그리고 네 번째 6월 항쟁에 뒤이어 6·29선언이 발표된 1987년 등 네 차례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실질적으로 봤을 때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이승만 대통령, 4·19 학생의거, 80년대 민주화 세력의 노력으로 성취되었다.
건국과 전쟁의 와중에서 이 나라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분들의 노력이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기초로 해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자체가 우리의 5천년 역사에서 첫 초석이고 가장 큰 민주화 작업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정점(頂點)에 달했던 2차 세계대전 직후 그 극심한 혼란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한 위업이 없었다면 1980년대 민주화가 가능했겠는가?
정부 수립 후 3년이 안 된 시점에서 공산세력이 6·25 사변이란 무력 도발을 했을 때 이를 격퇴시킨 그 고군분투가 건국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의 두 번째 초석이다. 이승만 시기의 반공주의가 없었더라면, 민주주의는 커녕 과연 대한민국 자체가 수호될 수 있었을까?
80년대 민주화는 세 번째 방점이다. 유신체제로 대표된 굴곡된 비(非)민주적 통치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우리는 ‘민주화 운동’이라 불러왔다. 이 과정에서 ‘닭장’과 ‘철장’을 오간 사람들을 ‘민주화 투사’라 부르고 이들에 의해 민주화가 완성된 것으로 생각들 한다. 80년대의 민주화 투사들은 참으로 고생을 했으며 그들은 큰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는 만능인가?
민주정치체제를 놓고 우리나라에서의 문제는 민주정치체제를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제도, 하나의 절대적 가치로 신격화되어 숭앙한다는 것이다. 사실 보다 더 나은 다른 대안이 없기에 민주정치체제를 버릴 수 없지만 이에는 치명적 결함이 존재하며 매우 문제가 많은 제도이다. 처칠(Winston Churchill)은 “민주주의란 가장 나쁜 정부의 형태다. 모든 다른 정부 형태를 제외한다면”이라고 했다.
성숙한 개인들의 독립적 판단이 뒷받침되지 않는 경우 ‘떼’의 정치, ‘폭도’ 정치가 되며 우중정치로 쉽게 흘러감을 많은 역사가 보여준다. 홉스(Thomas Hobbes)는 “민주주의는 당파투쟁, 선전선동, 폭민정치 따위로 변질될 우려가 가장 많은 최악의 정치체제이다”라고 설파한 적이 있다. 투표에 의한 민주주의의 결과로 파시즘-나치즘이 탄생했고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가 등장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추구해야 할 정치적 가치는 자유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인도와 홍콩이 좋은 예시이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정치체제 국가지만 인도인들은 자유를 제한하는 수많은 보호적 규제 속에 살아 왔다. 홍콩은 영국의 지배를 받던 옛날이나 중국의 지배를 받는 현재나 시민들이 통치자를 선출할 권리가 없기에 민주정치체제가 아니다. 그러나 지구상의 그 어떤 곳보다 가장 광범위하게 선택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한심한 민낯들
첫 번째 민낯은 촛불혁명을 민주혁명이라 우기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촛불혁명에 의해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음을 숨기지 않으며 해외 순방에서 자랑을 일삼았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프랑스혁명과 촛불혁명이 같은 것이라 했을 때 핀잔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프랑스혁명은 절대왕정에 대한 시민혁명이나, 촛불혁명은 정당한 합법적 정부를 광장정치가 뒤엎은 폭도혁명이다.
민주공화국은 헌법을 최고규범으로 삼는다. 헌법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 공화국이고, 공화국에서는 국민도 헌법에 따라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 헌법이 제정된 뒤에는 이처럼 민주주의가 공화주의에 근거하게 된다. 따라서 민주공화국에서 국민은 제한권력을 가진다. 국민주권 또는 주권국민은 선험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헌법과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두 번째 민낯은 민주주의의 기본인 입법 행정 사법 3권의 분립이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 대통령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상징이다. 헌법이 규정한 3권 분립에 반하고 공무원의 정치 중립 의무를 위반하면서까지 업무 협의를 핑계로 사법부와 행정부의 직원이 국회에 파견되어 있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사법부 소속의 법원청사와 행정부 소속의 검찰청사가 가까이 인접해 있다.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이 국회인데 입법부의 여당은 행정부의 시녀가 된 지 오래이다. 탄핵소추가 국회의 고유권한인데 사법부 소속 판사들이 다른 동료 판사들에 대한 탄핵소추 검토를 결의하는 나라다. 사법권 독립이 풍전등화 위기에 처해 있다.
세 번째 민낯은 최근 제왕적 대통령의 탄생과 빈번한 위헌 현상의 발생에서 관찰된다. 특히 문재인 정부 탄생 이후 대통령과 여당의 헌법위반과 법률위반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김경수와 드루킹의 여론 조작, 특별재판부 설치,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 평양공동선언, 남북군사합의, 제왕적 탈원전, 법관 탄핵,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협력 이익 배분 등은 모두 헌법 위반 사례이다.
네 번째 민낯은 민주주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일당독재 전체주의 북한을 칭송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지구상 어느 나라 국민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면서 일당독재 공산주의 전체주의를 찬양하는 경우가 있는가?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돈을 받아 챙기는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면서 국가 유공자가 되는 희극은 도대체 무엇인가?
다섯 번째 민낯은 국회의원들의 위법 탈법이 도를 넘는 현상이다. 국회의원들은 국회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버렸다. 국회법에 근거해서 개원 일정이 정해지는데도 불구하고, 등원 여부가 정치협상의 대상이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회 회의장에서 주먹질이 오가는 것은 비일비재하고, 불법점거하거나 또는 이를 풀기 위해 도끼나 전기톱이 등장하기도 했다. 불법 시위 현장의 맨 앞줄에는 국회의원이 서 있기가 일쑤이다. 개개 의원이나 정당이 여야 입장이 바뀌면 같은 사안에 대해 정반대의 논지를 펼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여섯 번째 민낯은 유령선거가 빈번히 이뤄지는 현상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당의 대통령 후보나 당 대표의 선출에 여론조사 결과를 반영하는 것이 관례 아닌 관례로 되어 왔다. 선거에서 여론조사 활용은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훼손시킨다. 선거라고 하는 것은 자격 있는 유권자가 투표소에 직접 들어가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는 행위이다. 여론조사는 아무리 정치하게 이뤄지더라도 유권자의 자격 여부나 정체성이 확인되지 않는 절차이다.
일곱 번째 민낯은 정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여론조사 결과가 활용되는 것이다. 국가의 주요 정책을 여론조사로 결정하면 선거를 할 필요가 없고, 대통령과 국회의원도 필요 없고, 국가 정책을 논의하고 집행하기 위한 정부 부처들도 필요 없다. 국민의 민의는 국회를 통해 수렴되는 것이지 청와대 청원을 통해 수렴되는 것이 아니다.
경기 규칙을 새로 만들자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뒤엎으려는 주장과 시도가 줄기차게 전개되고 있다. 오래 전에 사라졌던 ‘독재’란 말이 최근 되살아나고 있다. 3대에 걸친 진짜 1인 독재국가인 북한에 대해서 침묵을 넘어 찬양하는 희극이 서울 한복판에서 공공연히 연출되고 있다. 민주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지 말자. 민주정치체제의 본질과 정당성에 대해 기본에서부터 다시 논의하자. 기본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운영의 경기 규칙을 새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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