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토머스 맨켄은 현재 미국의 싱크탱크인 전략예산평가센터(CSBA)의 회장이다. 존스홉킨스대학교 폴 H. 니츠 고등국제학대학원 필립 머릴 전략연구센터의 수석 연구교수이며, 미 해군전쟁대학 전략학 교수로 20년 가까이 일했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미 국방부 정책기획실 부차관보로 근무했다.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역사와 국제정치를 공부했고, 존스홉킨스대학교 고등국제학대학원에서 국제 문제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 및 편저로 『국제정치의 군비경쟁: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Arms Races in International Politics: From the Nineteenth to the Twenty-First Century)』, 『아시아에서의 전략: 지역 안보의 과거, 현재, 미래(Strategy in Asia: The Past, Present, and Future of Regional Security)』, 『비밀과 책략: 중국의 전략 문화 이해(Secrecy and Stratagem: Understanding Chinese Strategic Culture)』 등이 있다.
격변하는 현대전 양상에 발맞춰 진화해온 미군의 모든 것
냉전 이후 걸프전쟁과 코소보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과 이라크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군은 늘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고 세계 최강의 군대임을 증명해왔다. 그리고 미군의 승리에는 언제나 최첨단 군사기술이 함께했다. 미군은 어떤 경로로 ‘궁극의 군대’가 된 것일까? 미군이 자랑하는 최강의 무기는 어떤 맥락에서 탄생했으며 오늘날 미군은 이 무기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미군은 어떻게 조직을 혁신하고 전략을 개발해왔을까?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며, 특히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전략폭격기와 전투기, 미사일방어시스템, 스텔스 기술, 정밀유도기술, 무인항공기 등 최첨단 무기들의 등장 순간을 소개한다.
핵 혁명이 초래한 미군의 변화
핵무기가 등장하자마자 미군에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 1947~1952년 핵무기 제조 기술의 혁신이 일어나는 가운데, 미국 정치인과 군인들은 서서히 ‘핵 전쟁’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3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미군은 본격적인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아이젠하워는 핵무기를 통해 미국의 안보와 군축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고 적극적으로 핵무장을 추진했다. 그의 국방 정책의 중요한 축은 유사시 적국에 압도적인 핵 보복을 가한다는 내용의 ‘대량 보복’ 전략이었다. 그는 각 군에 핵무장에 나서도록 요구했다.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의 도입은 각 군에 혁명적인 변화를 전제했다. 각 군은 처음부터 새로 자신들의 역할을 모색해야 했다. 공군은 유인폭격기 중심의 부대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미사일 중심의 부대가 될 것인가? 해군의 주력은 여전히 항공모함일 것인가 아니면 탄도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일 것인가? 육군과 해병대의 경우에는 조직의 존립 자체가 의문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핵 혁명은 위기이자 기회였다. 각 군은 예외 없이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발맞춰 변화를 모색했으며 새로운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얻었다. 핵 혁명 시대의 가장 큰 수혜자는 공군이었다. 핵 투발의 주체로서 미군의 중심으로 부상한 공군은 전략공군사령부를 창설해 B-52 전폭기를 구비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 아틀라스를 개발하였다. 해군은 핵잠수함을 얻었으며, 육군은 핵무기의 포병 전력화 개념에 천착하여 280밀리 원자포와 여러 중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얻었다. 이 시기는 각 군이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은 시기였으나 동시에 냉전과 그 후에 등장할 무기들을 위한 기술적 지향이 대거 모습을 드러낸 시기이기도 했다.
다시 재래식 전력의 건설에 집중하다
아이젠하워에 이어 대통령이 된 케네디는 합동참모단의 존재와 군의 관료제 때문에 국방예산이 비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믿었다. 이에 그는 군을 문민통제 아래 두기 위해 포드자동차 사장 출신의 맥나마라를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맥나마라의 취임은 군 관련 조직에 민간인들이 대거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케네디는 재래식 전쟁과 핵전쟁을 공히 억제할 수 있다는 ‘대량 보복(상호 확증 파괴)’의 논리에도 동의하지 않았고, ‘신축적 대응’이라는 전략 기조를 새로 마련하였다. 이것은 유사시 자동으로 핵무기를 사용하는 ‘확증 파괴’를 거부하고 그보다는 위협의 수준에 맞게 대칭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당연하게도 이 새로운 전략 기조는 미국이 바르샤바조약 국가들의 전력에 대응하는 ‘재래식 전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명제로 이어졌고, 군은 다시 고강도 재래식 전쟁을 강조하게 되었다. 1961~1975년은 여러모로 미군에서 과거로의 회귀 경향이 나타난 시기였다.
베트남전쟁에서 일어난 혁신
베트남전쟁은 미국 패권의 한계를 보여준 전쟁이자 특히 기술에 대한 의존만으로는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전쟁이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미군이 원래 소련과 싸우기 위해 준비되고 무장한 군대였음을 지적하며 패배보다는 예기치 않은 전장에서 미군이 어떤 혁신을 이루었는지에 주목한다.
비록 패배했지만 ‘기술’은 베트남전쟁에서도 중요했다. 공군은 해를 거듭하며 북베트남군의 레이더망과 지대공미사일을 무력화하는 기술을 손에 넣었고, 향후 중요한 항공 지원 전력이 될 기관포 무장항공기(gunship)를 개발하였다. 육군은 기존의 공수부대 개념과 다른 공중기동부대를 만들었는데 이들을 위한 헬리콥터의 광범위한 사용은 베트남전쟁에서 육군이 이룬 가장 중요한 혁신이었다. 또한 미군은 지휘통제소에 연결된 레이더와 공격기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는데, 이는 나중에 아프가니스탄전쟁에 이르러 위력을 발휘하는 ‘정찰-타격 복합체’의 효시가 되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베트남전쟁은 무인항공기와 정밀유도무기가 최초로 등장한 전쟁이기도 했다.
기술 전쟁으로서의 냉전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했지만 미국은 냉전에서는 승리하였다. 미국의 승리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우선 베트남전쟁에서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단련된 장교단의 존재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강력한 적인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기구 국가들을 상대로 한 ‘능동적 방어’와 ‘공지전’ 교리를 고안하였고 이로부터 신세대 무기들의 개발이 촉진되었다. 한편으로 미국 정부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카터와 레이건 행정부는 기술 부문을 냉전의 주요한 격전지로 여겼고, 특히 레이건은 과감한 기술 전쟁을 시도했다. 실제로 미국은 소련을 상대로 다방면에서 기술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과정에서 오늘날 미 육군 재래식 전력의 근간을 이루는 ‘빅 파이브’, 즉 M1 에이브럼스 전차와 M2/M3 브래들리 보병 전차, 고등 공격 헬리콥터, 병력 수송 헬리콥터 그리고 방공 체계가 탄생했다. 해군 또한 소련 해군에 맞서는 과정에서 해군 전력을 보존하는 정점의 기술인 이지스 체제를 탄생시켰다.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 발표는 냉전 후반기에 일어난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다. 우주에서 고에너지빔 무기로 소련의 탄도미사일을 요격한다는 내용 등이 담긴 이 구상은 미국이 기술력으로 소련의 산업 능력을 옥죈 가장 훌륭한 사례가 되었다. 기술이 냉전 종식에 직접적인 기여를 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은 기술적 우위를 활용하여 소련으로 하여금 강박을 자아냈으며 그들의 산업 역량을 뒤틀었다.
걸프전쟁, 첨단 무기의 시연장이 되다
냉전 말에 기획되고 개발된 무기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계속 미군의 근간이 되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전쟁 방식이 한계를 드러냈다면 걸프전쟁에서는 그 정당성을 입증하였다. 걸프전쟁은 그야말로 차세대 정밀유도무기들과 스텔스 같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기술들의 화려한 시연장이 되었다. 전쟁의 양상을 목도한 많은 사람들은 ‘군사 혁명’을 운위했고 혹자는 ‘새로운 미국의 전쟁 방식’이 출현했다고 평가하였다. 걸프전쟁 후 이어진 일련의 전쟁에서 미국이 보여준 모습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채질했다. 말하자면, 이제 미국은 적을 전복시키기 위해 압도적인 전력을 퍼붓기보다는 부차적인 이익을 추구하면서 점차 강화하는 방식으로 무력을 사용하며, 야만적 무력 충돌의 위험에 뛰어드는 섬멸전과 소모전 개념이 아닌 새로운 개념의 전쟁 방식을 구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이는 너무 섣부른 전망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선보인 미국의 새로운 전쟁 방식
2001년 9·11 테러 이후 다급하게 실행된 아프가니스탄전쟁을 두고 많은 논자들, 특히 기술회의론자들은 이 전쟁이 미국의 수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전쟁은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는 동안 미군과 연합군 측은 단 39명의 사망자(전투 중 사망자는 16명)를 냈을 뿐이었다. 이에 아프가니스탄전쟁은, 1990년대 미국의 전쟁과는 다른 맥락에서, 기술낙관론자들이 열광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 되었다. 이 전쟁은 산개된 소규모 특전대 전력과 아프간 토착 세력, 그리고 정밀한 항공 지원 전력의 긴밀한 네트워킹으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가볍고 민첩한 지상 전력이 미군의 모든 지원 화력을 등에 업은 일종의 센서 역할을 수행하며, 적 탐지 시 정보망을 통해 즉각적이고도 막강한 화력 지원을 유도하는 것이 압권이었다. 아프가니스탄전쟁은 무인 항공기가 처음으로 대대적으로 사용된 전쟁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뜻 환상적이기까지 한 이 ‘아프가니스탄 방식’은 낙관론자들이 희망했던 것만큼 미군 내에서 높은 지지를 받지는 못하였다. 뒤이은 이라크전쟁에서 미국은 전력을 보다 일반적인 목적에 충실하게 운용했다.
이라크전쟁 - 완벽한 승리와 예기치 못한 비정규전
미국은 이라크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일거에 동원하는 전통적인 미국의 전쟁 방식과 기술이 조화를 이룬 전쟁이었다. 개전 후 43일 동안 미군과 영국군이 기록한 169명의 사망자 수는 일간 사상자 수로 따졌을 때 미국 역사상 독립전쟁 이래 가장 낮은 수치였다. 미국의 이러한 승리는 전쟁의 성격이 변했음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었다.
이라크전쟁은 그 어느 전쟁보다 첨단 정보 기술이 많이 활용된 전쟁이었다. 하지만 기술낙관론자들의 성급한 예언과 달리, 이 전쟁에서 미군이 전장 상황을 완벽하게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전쟁의 후반부, 전쟁의 성격이 정규전 단계를 지나 치안 유지와 반란 진압으로 바뀌면서 미군의 기술적 우위는 빛을 바랬다. 초기의 무혈 승리와 대조적이게도 2003년 3월 19일부터 2006년 4월 16일까지 미국은 3,773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정보혁명 시대의 미군
정보혁명은 핵 혁명의 충격에 비견할 만한 것일까? 아니면 기술 진보의 평범한 연장선일 뿐일까? 저자는 정보혁명이 핵 혁명처럼 가시적인 변화를 동반하지는 않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선 가시적인 변화가 없지는 않다. 대표적인 예로 정밀유도무기와 무인항공기는 정보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새로 등장한 무기들이다. 이 무기들은 미국의 전쟁 방식에 흡수되어 미군에 중요한 기술적 우위를 안겼다. 물론 정보 기술은 기존의 재래식 전력도 바꾸어놓았다. 무기들은 더 넓은 시야와 타격 정밀도, 통신 능력을 갖춤으로써 다른 차원의 무기들로 거듭날 수 있었다. 여기에 GPS 기술은 전장 상황의 정보화를 통해 전술 기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네트워크 기술은 부대들로 하여금 일사불란하게 산개하면서도 화력을 집중하는 능력을 부여하기도 했다.
정보 기술은 보다 심원한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첨단 무기는 각 군의 전통적인 정체성을 시험하고 있고 군 조직에 전례 없는 변화의 압력을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정보 기술은, 최근 군사전문가들의 실망스러웠던 수많은 예측이 증명하듯이, 미국의 전쟁 방식을―전쟁의 양상을―바꾸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20세기에 수많은 혁명적인 기술들이 현대전과 미군 조직에 거대한 변화를 추동했다. 그러나 기술이 전장의 승패나 군대 조직을 전부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대 미군의 역사는 기술 혁명이라는 도전에 대한 미군 조직의 응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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