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 공사의 증언집 ‘3층 서기실의 암호’는 평양의 심장부를 발가벗겼다. 태영호 공사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북 정상회담 당일 나는 하루 종일 TV앞에 숨을 죽이고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번 정상회담은 대한민국의 국력과 자유민주주의가 가져온 성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은 하루빨리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날을 고대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김정은을 평화의 사도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북한 주민이야 어떻게 살든 한국이 알 바는 아니라는 말로 들렸다. 악마가 아닌 사람을 악마로 묘사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악마를 천사로 묘사하는 것은 역시 잘못이다.”
‘김정은의 두뇌’ 3층 서기실
태영호 공사의 증언집 책 제목은 ‘3층 서기실의 암호’다. 그만큼 3층 서기실의 비중이 크다는 의미다. 태 공사는 그 이유를 “모르는 게 없는 지도자 만들어내는 3층 서기실”이라고 했다. 3층 서기실은 청와대 비서실의 수준을 넘어 ‘김정은의 문고리 권력’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좀 더 확대 해석하면 김정일을 신(神)으로 만든 곳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3층 서기실’은 북한 주민들도 잘 모르는 조직이다. 한마디로 3층 서기실은 김정은의 두뇌 역할을 하는 곳이다. 태 공사는 3층 서기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서기실이 어느 건물 3층에 있어서 유래된 별칭이 아니라 서기실이 3층 규모의 건물 전체를 쓰고 있어 유래된 이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김정일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이 3층 규모인데, 북한 중앙 TV 등은 이를 ‘김정일 장군님께서 계시는 당중앙 청사’라고 소개하곤 했다. 굳이 한국으로 치면 당중앙 청사는 청와대이고, 3층 서기실은 대통령 비서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언론은 2018년 3월 5일 한국 대통령 특별사절단을 맞이할 때 3층 서기실을 ‘조선 노동당 본관’이라고 소개했다. 3층 서기실이 북한에서 실세 중의 실세인 이유에 대해서 태영호 공사는 김정일에게 보고되는 모든 정보가 취합되고 분석되는 곳이며 김정은의 지시를 하달하는 연결고리 같은 역할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북한에서도 이를 아는 사람은 3층 서기실 내의 극소수였다. 태영호 공사의 경우 김정일의 결재와 지시가 내려오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로부터 김정일이 다시 나타난 것은 10월경. 검은 선글라스를 쓴 것은 흐려진 눈을 가리기 위한 조치였다.
대한민국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대내외 정책은 송두리째 바뀐다. 그러나 북한은 일관된 정책을 펴고 있다. 더욱이 나이어린 김정은이 벼랑끝 전술로 미국에 맞서는 것도, 고모부 장성택 처형을 통한 공포정치로 권력을 휘어잡는 것도 모두 ‘3층 서기실’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3층 서기실은 김정은의 두뇌이자 평양의 심장부라고 태영호 공사는 증언한다.
김정일의 이중플레이와 시간 끌기 전략은 태 공사도 인정하는 김정일의 전략이었다. 태 공사는 이런 점을 모르는 한국의 정책 입안자들에게 일침을 놓고 있다. “아직도 한국 일각에서는 9·19 공동성명의 파탄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합의를 지키지 않고 압박해 북한이 핵개발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는 것이 북한의 핵개발이이다. 성명이나 합의로 중단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의미다.”
김정일식 ‘벼랑 끝 외교’의 핵심은 시간 끌기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 김정일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혹시라도 미국이 조선(북한)까지 공격할까봐 말이다. 그러던 김정일은 핵실험을 하고도 오히려 배짱을 튕겼다. 시간도 끌면서 김정일은 얻어낼 것은 다 얻어냈다. 이런 김정일의 배포에 태 공사도 진심으로 김정일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정일이 배짱을 부린 배경은 무엇일까?
실제로 영국으로 떠나는 리용호에게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영국을 잘 이용해 몇 년 만 시간을 벌어주게. 2~3년이면 충분하네. 그렇게 해주면 큰일이 또 있을 것이고 그때 다시 불러들이겠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석주가 말하는 ‘큰일’이라는 것은 북한의 1차 핵실험이다. 이런 점에서 태영호 공사는 현재 미북 회담 역시 북한의 시간 끌기 전략으로 보고 있다.
장성택 처형의 내막
김정은은 어릴 때부터 고모부 장성택에 대해 뿌리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태 공사는 말한다. 그 이유는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는 김정일의 정실(正室)이 아니란 점에서 김일성 가계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김정일이 본처 김영숙을 두고 성혜림 사이에 김정남을 낳자 집안 망신이라고 화를 냈으며, 그 이유로 해서 고영희 사이에 난 김정철, 김정은은 한 번도 김일성 앞에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장성택의 처 김경희와 고영희 사이도 매우 나빴다는 검이다. 시누이와의 갈등이다. 결국 김정은은 어려서부터 고무와 고무부에 대한 앙심이 있었다는 추측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북한 내 권력기관의 암투가 작용했다. 장성택 산하 부서에 대한 김정은의 지시가 발단이 되었다. 북한 역시 부처 간 경쟁이나 이기주의가 있다. 김정은의 지시로 부처 간 득실이 갈리는 상황에서 장성택 관리 하에 있던 ‘54부’가 당의 지시에 대해 재고 요청을 한다는 차원에서 ‘뒤집겠다’고 한 말이 군 보위사령부에 걸린 것이다. 보위사령부는 김정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뒤집겠다’는 표현을 역모사건으로 몰아가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물론 이것은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장성택이 북한의 돈줄을 쥐고 있었다는 점이다. 2014년 4월 14일 김정은은 최고인민회의를 열고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헌법에 명시했다. 이른바 김정은식 북한의 핵·경제 병진노선이 채택되었다. 김정은은 재래식 무기에 의한 전쟁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핵에 올인(ALL IN)하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핵을 포기하는 순간 자신의 권력도 유지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다.
핵개발 올인 정책에는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문제는 북한의 경제적 이권 대부분은 장성택이 쥐고 있었다는 점이다. 북한의 수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수산기지는 ‘54부’가 관리하는데 이 부서는 장성택의 관리 하에 있었다. 태영호 공사는 장성택이 경제적 이권을 포기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장성택 처형의 실질적 이유로 해석했다. 여기에 또 하나 이유가 더 있다. 장성택이 해외에 체류하고 있던 김정남의 뒷돈을 대고 있었다는 것이다.
5·18 일어나자 “이제 통일이 되겠구나”
북한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인민봉기’라고 칭한다. 당시 북한 TV에는 연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내용을 내보냈다. 총을 든 광주 시민들이 트럭을 타고 시내를 질주하는 장면은 북한 대학생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태영호 공사는 회상한다. 북한 대학생들은 ‘야 이제 통일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이나 김정일도 남한 정세를 오판했다는 점이다. 북한의 통일전략전술 이론에 따르면 인민봉기->독재정권타도->친북정부 수립->북남통일로 이어진다는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논리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는 ‘친북정권’임에도 북한이 원하는 통일은 이뤄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북한은 남한 민중은 더 이상 북한이 아우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한국 전체를 쓸어버려야 한다고 생각을 바꿨다는 것이다. 그 수단은 핵무기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동원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태 공사는 증언한다.
황장엽의 탈북 망명 이후 북한의 대남 선전선동사업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3층 서기실의 암호’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황장엽의 탈북은 북한에 폭풍을 몰고 왔다. 만경대 구역의 주체사상연구소는 폐쇄됐고, 건물은 군대에 넘어갔다. 그곳에 있던 대다수가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나마 화를 면한 사람들은 김일성 가계인 김창주 부총리의 아들을 비롯한 고위층 자녀들 정도였다.
김정일은 주체사상연구소가 학술연구와 대외사업을 병행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했다. 김정일은 “대외사업은 미국, 남조선 괴뢰들과의 치열한 투쟁인데 학술단체인 주체사상연구소가 주체사상의 대외 선전보급 사업까지 하다 보니 황장엽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 주체사상의 대외 보급은 대적 투쟁에 대한 경험과 각성이 있는 외무성이 맡고, 학술연구는 사회과학원이 담당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의 지시대로 현재 주체사상과 관련된 대외 보급 업무는 외무성 7국(대외선전국)이, 학술연구는 사회과학원이 담당하고 있다. 한마디로 주체사상에 대한 연구부서를 대남 선전선동사업에서 완전히 배제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스웨덴에서 미사일 극비 협상
2007년 9월 5일 자정, 이스라엘 공군의 F-16 4대와 F-15 전투기 4대가 시리아 알 키바르(Al Kibar)를 공습했다. 그 곳은 북한의 기술 지원을 받아 건설된 원자로가 있었다. 북한-시리아의 핵 커넥션을 간파한 이스라엘이 움직인 것이다. 세계는 놀랐다. 이스라엘의 정보력이 그렇게 대단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영호 공사의 증언을 통해 북한이 먼저 이스라엘에 제안을 했었다는 충격적 사실이 드러났다.
1999년 1월 김정일의 지시로 스웨덴에서 열린 이스라엘 대사와 극비 회동. 당시 스웨덴 주재 북한 대사 손무신의 통역으로 태영호는 극비 회동에 참여했다. “몇 달 전 우리 공화국이 발사한 인공위성이 궤도에 진입했다. 이것은 동북아뿐만 아니라 중동 정세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북한 측 발언에 이스라엘 대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왜 그런가.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손 대사는 둘러말하지 않았다. “우리 미사일 기술에 관심이 많은 나라가 있다. 이란을 비롯한 중동 국가들이다. 우리에게 미사일 기술을 넘겨달라고 계속 요구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지금 우리의 경제 형편은 대단히 어렵다. 미사일 기술을 전파해서라도 우리 체제를 수호해야 할 지경이다. 그런데 우리가 미사일 기술을 중동에 수출하게 되면 새로운 미사일 경쟁이 일어날 것이고, 이스라엘의 안전도 위협당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우리와 이스라엘은 공통점이 많다.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 사이에 끼여 있다. 이런 나라일수록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망일 이스라엘이 우리를 도와준다면 미사일 기술을 중동에 수출하는 문제를 재고할 수 있다. 호상(상호) 합의가 이루어져 상생하는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다.”
이스라엘 대사는 “무엇을 어떻게 도와 달라는 것인가. 구체적인 안을 제시해 달라”고 했고 손무신 북한 대사는 “우리는 중동 국가들과 10억 달러 선에서 협상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10억 달러를 주면 미사일 기술을 수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대답했다. 이스라엘 대사는 “뜻밖의 제안이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본국에 보고해서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의 요구는 집요했다.
김대중 前 대통령을 철저히 농락했던 김정일
“조선(북한)은 기본적으로 외화가 필요하다. 경제 회복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스라엘이 현금을 지불할 수 없다면 현금을 주겠다는 나라들과 협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북한의 이스라엘과의 협상은 깨졌다. 현금 10억 달러 요구에 이스라엘은 현금 대신 물자 지원을 제안했다. 미국의 반대로 현금 지원을 할 수 없는 이유였다.
태영호 공사는 북한 외교의 핵심 인물이었다. 북핵과 미사일 관련 막후 교섭은 그의 입을 통해 이뤄졌다. 태영호 공사가 책을 통해 증언한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다. 북한이 미사일을 개발하면서 오히려 먼저 이스라엘에 제안을 했다는 것은 태영호 공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3층 서기실의 암호’ 제3장의 제목은 ‘한국이 살린 북한’이다. 6·15선언이 북한에 준 영향이다. 김대중 정부시절 6·15선언으로 평양에 활기를 되찾았다고 말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김정일이 철저하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농락했던 내용들이 속속들이 적혀 있다. 6·15 선언 이후 북한은 화해 무드를 틈타 유럽 각국과 외교관계를 트는 데 열심이었다. 2001년 EU 의장국 스웨덴 페르손 총리가 평양을 방문했다. 서방의 총리로는 처음으로 김정일을 만났다.
페르손 총리는 김정일에게 “언제 서울을 답방하느냐”고 물었다. 김정일은 “북남관계가 좀 더 진전되면 답방하려고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회담 직후 강석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페르손이 오늘 나에게 서울 답방 문제를 꺼낸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아직도 내가 서울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참 어리석다”고 태영호 공사는 김정일의 이중풀레이를 언급했다.
태영호 공사는 6·15가 북한에게 얼마나 혜택을 줬는지 단적으로 말한다.
“6·15남북공동선언 직후였다. 매일 남북 간에 무슨 회담이 진행된다는 소식들로 들끓었다. 1990년대 초부터 위기에 몰렸던 북한은 6·15남북공동선언 채택으로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다시 활력을 찾았다. 2018년 1월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북한 리선권 대표는 ‘6·15 시대의 모든 것이 귀중하고 그립다’고 했다. 이 한마디만으로도 북한 사회에서 6·15 시대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태 공사는 한국에 온 후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김정일이 남북회담에서 주한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면서 김정일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에 매우 놀랐다고 했다. 김정일의 이중플레이에 대해 전혀 모르는 한국 사람들에 대한 놀라움이다. 한마디로 김정일은 김대중 대통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자체를 가지고 놀았다고 태 공사는 증언한다.
김정일의 미국에 대한 공포심
김정일은 부시가 대통령이 되자 미국이 공격할까봐 공포심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현실이 되자 김정일은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대량살상무기의 의혹만으로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것은 앞으로 인권 문제를 가지고 조선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엔 인권위원회가 이라크 전쟁과 때를 맞추어 조선인권 결의를 채택한 것은 미국이 조선(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명분을 제공하는 조치다. 외무성이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뭔가?” 김정일은 외무성을 닦달했다.
“긴 말 할 시간이 없다. 미국이 이라크를 칠 것 같다. 블레어 영국 총리의 지원이 없었으면 안 되는 일이다. 런던에 도착하면 빨리 대사관을 개설하고 공화국기를 띄워야 한다. 영국이 적극적으로 대사관 개설에 협력한다면 미국이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의 동향을 수시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라크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미군의 신무기에 김정일은 대단히 놀란 것이다. 미군의 초정밀 유도무기는 막강했던 후세인의 이라크 기갑부대를 한 순간에 초토화 시켰다. 그것을 본 김정일은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었다. 그 공포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정일은 몸부림을 쳤다는 것이다.
김정일 배짱 외교의 비밀 - 영국을 통해 미국을 엿보다
김정일의 외교 돌파구는 의외로 영국이었다고 태영호 공사는 설명한다. 김대중-김정일 간의 6·15 선언이후 북한은 영국과 가장 먼저 수교 협상을 벌였다. 2000년 12월 11일 북한은 영국과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영국은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으로서 북한 입장에서는 영국과 국교를 수립했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영국을 통해 미국의 심중을 알아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김정일은 영국의 참전이 없었다면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밀어붙이기 힘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김정일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경우에도 역시 영국의 지지가 절대적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만약 영국이 북한대사관 개설에 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이것은 미국의 한반도 전쟁 계획에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북한도 미국에 배짱을 부릴 수 있다고 김정은은 판단했다고 태영호 공사는 전한다.
영국은 북한대사관 설치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김정일은 미국이 강경하게 나오지만 이라크처럼 북한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북한이 6자회담에서 ‘배짱 놀음’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라고 태영호 공사는 증언하고 있다.
영국의 대북정책은 ‘비판적 관여’라고 태영호 공사는 설명한다. 영국은 북한의 핵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와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를 우선시한다는 점을 들었다. 북한은 이를 역이용해 미국을 견제한다는 정책이다. 북한의 견지에서 본다면 위험 요소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영국에 어학연수를 계속 보내는 이유에 대해 태영호 공사는 영국의 ‘비판적 관여’라는 대화정책을 따르는 것이 미국의 조선(북한)에 대한 무력 행사를 막는 데 이롭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사실 6·25 전쟁 당시에도 소련은 영국내 간첩을 통해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북한이 핵문제 전문가로 6자회담 수석대표 물망에 올랐던 리용호를 영국 대사로 파견한 것 역시 영국을 이용해 미국이 북한에 전쟁 도발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태 공사는 말한다. 결국 영국은 북한에 정보를 슬쩍 넘기면서 반대로 김정일의 의중을 엿보았다고 볼 수 있다. 외교는 그런 것이다.
태영호 공사가 말하는 룡천역 폭발사고
2004년 4월 22일 오후 1시경 룡천역에서 거대한 폭발사고가 났다. 당시 북한은 룡천역 폭발사고를 즉시 발표하고 해외에 구호를 요청했다. 그만큼 사고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태 공사는 이 사고를 전기 작업 부주의로 중국에서 수입한 질안비료 한 방통(100톤)이 폭발한 것으로 책에 적고 있다. 당시 외신은 김정은 암살음모설이 제기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수 년 후 영국의 작가 겸 PD 고든 토마스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연루설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드온 스파이>라는 책을 통해 시리아 핵과학자들을 실은 열차가 북한으로 들어갔고, 이스라엘 모사드가 폭발사고를 일으켰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태 공사는 이런 음모론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룡천역 폭발사고 후 갑자기 휴대폰 사용을 중지시키는 조치가 취해진 것은 의아한 대목이라고 언급했다. 당시 주민들도 휴대폰과 룡천역 폭발이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태 공사는 증언한다.
룡천역 폭발사고로 인한 책임은 김정일 열차 담당인 8, 9호 담당 총참모장 서남식 등 철도성 간부들이 졌다. 이들은 일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북한에서도 김정일 암살을 시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태영호 공사는 아직도 의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정말 암살 시도인지, 아니면 암살 공포증에 사로잡혀 있던 김정일을 달래기 위한 국가보위부의 거짓 작전이었는지 말이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위해 자유를 선택하다
태영호 공사가 전하는 북한 외교관의 실상을 듣노라면 눈물겹다. 북한 외교관 역시 북한에서는 감시의 대상이다. 해외 근무를 마치고 평양으로 복귀하면 외교관은 일종의 검열인 ‘총화’를 반드시 거친다고 한다. 거듭되는 외교관의 탈북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은 가족과의 생이별 정책을 펴고 있다, 특히 자식 중 하나는 꼭 평양에 남겨둬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태영호 공사는 말한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이념을 초월한다. 태영호 공사가 한국으로 망명하는 데는 자식에 대한 걱정이 크게 작용했다.
태영호 공사는 북한의 약점을 바로 인권에서 찾고 있다. 북한에서 최고존엄과 인권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사안이다. 그래서 태영호 공사는 ‘통일은 (북한)노예해방혁명’이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고성혁 미래한국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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