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굴지의 모 재벌그룹 항공사 오너의 딸이자 전무의 이른바 ‘물컵 갑질’이 언론을 뜨겁게 달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기업인들의 부도덕성, 특히 직원들에 대한 비인격적 행위들이 심심치 않게 언론에 등장한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기업 오너와 근로자의 관계는 ‘주인과 종놈’인 것 같아 씁쓸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기업들은 결국 아무리 소비자에게 봉사해서 이윤을 얻으려 해도 경영학의 원리상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기업안의 질서는 민주주의도,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전체주의도 아닌 ‘도덕적 왕국’, 즉 ‘Kingdom of God’의 질서라는 점이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피터 드러커(1909-2005)를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의 경영학 저서들을 떠올린다. 그렇기에 아마도 피터 드러커가 마케팅론이나 재무회계론 같은 것에 정통한 학자였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드러커의 경영학은 그가 경영학을 만들고자 해서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마치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각자 자신의 자연 철학과 물리학을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해 미적분이라는 수학의 영역을 구축한 것과 같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일 것이다. 스미스는 경제와 시장원리를 설명한 자신의 <국부론>에 경제(Economy)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스미스에게 시장의 원리는 그가 원래 전공했던 도덕철학의 현실적 테제와 양상이었다. 아담 스미스는 우리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 논리의 규칙이 아니라 제3의 관찰자들에 의한 공감적 연대라고 생각했다.
시장과 기업에 작동하는 섭리
다시 말해 정의란 옳고(Right), 그름(Wrong)의 문제라기보다는 좋음(Good)과 나쁨(Bad)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스미스는 그런 도덕적 질서가 현실에서 구현되는 양상과 시장경제에서 ‘가격’이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양상이 같다는 점을 발견했다.
고등어 생선 한 마리의 가격이 3000원이라는 것은 누가 그렇게 합리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거래 속에서 다양한 가격이 판매자와 수요자 사이에 거부와 동의를 거치면서 형성된다. 아담 스미스에 의하면 그러한 질서는 언어처럼 자생적(spontaneous)이다. 그렇게 등장한 가격의 원리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과 같다. 학자들은 이 보이지 않는 손의 본질을 깊이 탐구해 왔고, 그것이 자연신학에서 말해지는 일종의 ‘섭리’(Prudence)적 차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됐다. 그러한 섭리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을 위해 행동한 결과였다.
3세대에 걸쳐 장수했던 피터 드러커 역시 사람들의 행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한 계기는 드러커가 독일에서 체험했던 나치와 유대인 박해에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드러커가 청년이었던 시절 나치의 한 장교가 거리에서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한다. 그때 나치 장교는 “우리는 빵가격이 오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빵가격이 내려가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빵가격이 제자리인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빵의 가격은 나치가 정하는 그 가격입니다.” 나치 장교의 이 말에 드러커는 많은 사람이 환호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던 청년 드러커는 옆에 있던 친구에게 “자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라고 물었고, 친구로부터 “자네도 참 딱하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걸세”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때 드러커는 전체주의의 본질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즉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모두 경제적 합리성에 관한 것인데, 이 경제적 합리성이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면 다름 아닌 전체주의가 도래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드러커의 그러한 관찰과 평가를 담았던 책이 바로 드러커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경제인의 종말: 전체주의의 기원(1939)>이다.
이처럼 드러커는 기업의 경영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학자였다. 그런 그가 기업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생태주의적 아나키스트’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드러커의 보수주의적 기독교 신앙관이 배어 있는 발언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피터 드러커에게 가장 영향력을 크게 미친 이는 19세기 독일의 탁월한 보수주의 법철학자이자 훔볼트와 함께 유럽 기독교민주당의 토대를 마련한 율리우스 슈탈이었다.
보수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의 경영론
드러커는 초기에 율리우스 슈탈의 보수주의를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과 현대 세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기업(company)의 관계를 매칭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피터 드러커에 의하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인간관이 변화해 왔는데 고대로부터 현대를 관통하는 일관적인 사람들의 욕구는 ‘자유와 평등’이었다는 것. 따라서 고대에는 왕이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한다고 선언했고, 중세에서는 교회가, 근대에서는 정치가, 그리고 현대에서는 시장과 기업이 바로 이 자유와 평등을 향한 사람들의 소망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드러커는 이 단초를 아담 스미스와 같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발견했다. 그는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 쓴 구절, ‘행복은 죽어서 하나님 곁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이생에서 생필품의 풍요를 누리는 것이다’라는 부분을 주목했다. 그는 아담 스미스의 이 주장이 바로 이전의 모든 시대를 통해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싶어 하던 인간의 꿈이 결국 중세에 ‘현세보다 내세’라는 체념에 빠졌고, 근대에 다시 부활한 것으로 평가했다. 한마디로 ‘종교인에서 경제인’으로 변화한 것이다. ‘살아서 생필품의 풍요를 누리는 것’이 인간의 소망이라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기업이었다. 실제로 영어 company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함께’라는 의미의 com과 빵을 뜻하는 pan, 여기에 사람들을 뜻하는 접미사가 붙어 ‘빵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company)’이라는 뜻이었다. 드러커는 이로부터 기업의 본래 모습은 ‘함께 일하는 이들이 서로 행복을 누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기업은 천국과 이승이라는 ‘두 개의 도성’에 걸쳐 있는 다리와 같은 것으로 파악했다. 그렇다면 기업안의 질서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을 닮을 때 가장 善하고 福될 것이며, 그 결과도 좋을 것이라는 성찰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피터 드러커의 이러한 기업관은 20세기 초반만 해도 생뚱맞은 것이었다. 당시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업은 자본가가 근로자를 고용해서 팔리는 상품을 만드는 곳이었고, 따라서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라는 생각이 보편적이었다. 이 때문에 기업 안에서 근로자들의 복지나 행복이란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드러커는 먼저 기업의 이윤을 기업의 목적이 아니라 기업이 존속하는 데 있어 필수적 요건으로 정의했다. 즉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가 아니라, 고객과 시장을 창조하는데 있고 이윤은 소비자에게 봉사하고 공헌한 대가로 주어지는 격려다. 즉 잘하고 있으니 계속하라는 소비자의 격려로 이윤은 창출되며 그러한 이윤은 ‘기업이 계속되기 위해 투자될 비용’이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기업가와 상인은 자신의 이윤보다 먼저 시장과 고객을 찾으려 든다. 그것이 현실인데, 경제학자들이 기업의 생리를 모르고 기업의 목적이 이윤추구에 있다고 함으로써, 스스로 반기업정서를 불러왔다는 것이 드러커의 주장이다. 피터 드러커의 이러한 통찰은 결국 기업 안에서 근로자들의 행복이 추구되고 경영자들이 기업을 도덕적으로 운영할 때 기업은 소비자에게 올바로 봉사해서 이윤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경영이론으로 이어졌다. 즉, 경영자는 근로자들에 대해 ‘선한 목자’로서 근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근로자들의 행복에 관심을 가지고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Company,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
드러커의 이러한 경영철학은 성경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1-2)’를 떠올리게 한다. 드러커는 실제로 자신의 경영철학이 현실에서 옳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코카콜라를 비롯해 수많은 미국의 대기업 경영자문을 통해 입증했고, 이를 유럽과 일본 등 전 세계에 전파하게 된다. 오늘날의 경영학은 드러커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해 등장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반기업 정서가 날로 늘어나고 있음은 뉴스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기업은 일자리를 만들고 그러한 과정에서 소득을 창출하고 생산을 한다. 우리는 생산한 것 이상으로 분배할 수 없고, 분배된 것 이상으로 소비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업은 아담 스미스가 말한 것처럼 ‘이승에서 생필품의 풍요’를 누리기 위해 필수적인 존재고, 그러한 기업은 소비자에게 싸고 좋은 재화를 공급하는 봉사로써 이윤을 얻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저렴과 풍부’를 누리게 되고 우리의 후생은 증대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소비자는 동시에 근로자로서 생산자라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피터 드러커는 우리에게 경영자들이 사랑으로 근로자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고, 근로자들은 경영자들을 목자(牧者)로서 감사와 존경으로 대할 때 기업은 성공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고객에 대한 기업의 도덕성은 기업 내부에서도 ‘하나님의 왕국’으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함께 빵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company의 참된 모습이자, 성서에서 말하는 ‘협력하여 이루는 善’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Omnia Vincit Amor)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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