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기념관·동상 비로소 설립되나
이승만 기념관·동상 비로소 설립되나
  • 미래한국
  • 승인 2010.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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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김일주 사무총장


이승만(李承晩) 건국대통령 기념관 건립사업이 기금 모금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작년 12월 정기국회에서 30억원의 건립 추진 예산이 배정됐으나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가 30억원의 매칭펀드를 모금해야 집행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었다. 현재 매칭펀드는 소액 후원자 300여명이 보내준 3,000여만원에 그치고 있어 기념관 건립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미래한국>은 이승만기념사업회 김일주 사무총장으로부터 이승만 기념관 건립사업의 자세한 경위와 지난 수십년간의 기념사업 활동 전반에 대해 들어보았다.


재정적 난관 불구 우남 재평가 움직임 주목

-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는 언제, 어떤 배경에서 창립됐습니까. 주요 사업 내용에 대해 소개해 주시죠.

기념사업회는 1975년 우남(雩南) 이승만 박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이승만 박사의 건국 이상을 널리 알리고 건국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창립됐습니다. 우남회보 발행, 우남아카데미 등을 개최해오다 지난 1995년 사단법인이 됐죠. 앞으로 기념관 건립에 주력하고 하와이, 뉴욕, LA 등에 남아 있는 이 박사 유품 수집을 통해 기념관 건립에 대비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해외지부를 완비해야 하는데 아직 기틀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방조직을 확충해 이 박사를 바로 알리는 데 노력하려 합니다. 이승만 박사가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없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조국의 역사를 가르치고 한국 현대사의 정사를 가꿔나갈 것입니다.


기념사업회, 우남 탄생 100주년 맞아 1975년 설립

-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단체가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단체들이 있으며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요. 3년전에는 ‘우남애국상’이 만들어져 매년 시상함으로써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요.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회장 강영훈), 우남이승만연구회(회장 정창인),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 등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다원주의 사회입니다. 좋은 뜻은 여러 개로 나누어도 좋은 뜻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목표가 같더라도 연령 성별 지역간 그리고 종교간에 다소간 방법론적으로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소리와 음색은 다르지만 화음을 맞춰 잘 진행할 때 더 좋은 연주가 되는 것처럼 우남의 모든 유관단체들은 서로 협조하며 피차 알찬 결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우남애국상은 본 기념사업회와 관련 단체들이 함께 힘을 합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관련 애국단체들과 상의해서 본 기념사업회가 주도하는 시상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본 기념사업회는 정치적으로 중립이며 오직 우남 선생의 철학과 애국애족의 정신만을 따르고 선양하는 사회단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념관의 건립이나 해외 지부의 활성화 그리고 지방조직의 확충도 모두 이 목표를 위한 계획임을 밝혀둡니다.

- 최근 진행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추진 현황과 정부의 역할 그리고 작년 말 어떤 계기로 정부예산이 배정됐는지 알고 싶습니다. 또 매칭펀드 모금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요.

지난 수십년간 많은 인사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고 이것이 최근 몇 가지 사건을 계기로 가시적 결실을 거두게 됐습니다. 작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화장을 다녀간 이후 우남기념관 건립 문제가 다소간 탄력을 받았습니다. 오 시장은 어떤 형태로든 건국대통령 기념관이 건립돼야 한다고 동의했습니다.

그 후 저는 작년 정기국회 때 관련 상임위에 나가 읍소를 하다시피 하며 건국대통령 기념관 건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다녔습니다. 진보성향의 야당 의원들까지도 만나봤는데 한결 같이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은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당 의원들과는 달리 야당 의원들은 왜 지금 건립해야만 하느냐는 입장입니다.

작년 12월은 정말 추웠는데, 의원회관과 의사당 본관을 하루에도 몇 번씩 걸어 오가며 관련 상임위 의원들을 힘겹게 만나 기념관 건립 시작의 필요성을 설명했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김형오 국회의장의 결심도 기념관 예산이 통과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예산안이 관련 상임위에서 부결됐다가 본회의에서 다시 살아나 통과됐는데 이러한 경우는 대한민국 국회 개원 이후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문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상임위 명칭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국회 정무위 이었는데, 정무위에 해당되는 보훈처가 갑자기 예산배정 문제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김양 보훈처장이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관 건립의 해당 주무 부서는 보훈처가 아니라 행안부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기념관 건립이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을 적용받을 수 밖에 없는 행안부의 소관이 돼 버리자 예산이 통과된다 하더라도 예산안의 성격은 소위 ‘매칭펀드’의 형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즉, 통과된 예산 30억 원을 쓰고 싶으면 30억 원을 모금해 가지고 오라는 것이 전직 대통령 예우 법의 취지입니다. 그러니 행안부 관료들이 저희들을 아무리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좌파세력 극복이 기념관 건립 사업의 과제

- 백범 김구 기념관은 순수 정부 예산으로 건립되지 않았나요. 이승만기념사업회에서도 이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초대 대통령 취임식 때 취임선서를 하는 이승만 박사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이 어려운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나 살아계신 다른 대통령들과는 사회적 환경이나 시대적 상황이 여러 가지로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남 선생은 돌아가신 지가 벌써 45년이 넘었습니다. 동시대를 사셨던 정치인 경제인 문화예술인 등 그 시대 명망가들이 거의 대부분 돌아가셨습니다.

모두가 잘 아시는 것처럼 우남은 4·19에 의해 대통령 재임 중 하야하셨고, 현재 우남을 반대하는 4·19단체들이 아직도 크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65년 전 해방 3년 공간 시기와 똑같이 ‘남북협상’을 집요하게 주장하는 좌파세력들이 이 땅에 엄연히 존재하는 것도 기념관 건립사업이 극복해야 할 장애물입니다. 그들은 자유민주 세력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승만이 역사 속에 재편입되는 것을 끝까지 막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정황들이 기념관 건립을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행안부가 기념관 건립을 주관할 경우 전직대통령 예우법에 근거해 사업을 진행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모금을 해야 되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두 푼도 아닌 몇 백억 원을 걷기 위해 전경련 등 경제단체들이 과연 시원시원하게 모금운동에 동참하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이 궁여지책으로 정부에 낸 제안이 바로 ‘백범 기념관’ 모델입니다. 우남 선생은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이기도 하시지만 상해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이셨다, 임시정부 주석이셨던 백범 선생의 기념관이 정부기관인 보훈처 예산으로 효창구장에 세워졌으니 우남 기념관도 보훈처 예산으로 지어 달라, 명분으로나 법적으로나 아무런 하자가 없는 제안이니 받아 달라, 이것이 저희들의 주장입니다.

이 대목에서 흥미를 끌 만한 국회 속기록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고승덕 의원이 김양 보훈처장에게 한 질의 내용인데, 김양 처장의 조부는 김구 선생이 아니냐, 따라서 다른 사람도 아닌 김구 선생의 손자인 당신이 책임자로 있는 보훈처에서 우남 선생의 기념관을 지어드린다면 조부의 명예를 더 높이는 일이 되지 않겠느냐는 취지로 발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되돌아 온 답변은 거절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양 보훈처장은 기념관 건립의 주무부서는 보훈처가 아니라 행안부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쌍방 간의 발언이 길어질 것 같아 보이자 위원장은 서둘러 중재에 들어갔고 총리실장이 나중에 보고하는 것으로 이 질의는 끝이 났습니다.

보훈처가 소속된 정무위에서 결론이 나지 않자 안건은 결국 행안위로 옮겨갔고 야당의원들의 반대로 이 안건은 폐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김형오 국회의장의 결단으로 가까스로 예산안이 되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일각에서 분명한 우파인 백범 김구 선생이 좌파의 태두인 것처럼 오해받는 것을 회복하고 갈갈이 찢긴 우리 사회를 통합한다는 취지에서도 백범의 손자인 김양 보훈처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념관 건립 난관, 백범 손자인 보훈처장이 나서야

- 이승만 대통령이 사셨고 초대 조각을 하셨던 종로 이화장(李花莊)은 현재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요. 정부의 재정지원이 잘 되고 있습니까.

2009년 4월에야 비로소 서울시문화재에서 국가문화재로 승격됐습니다. 그동안 비가 새고 추녀 끝이 무너져도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지금 종로구청에서 인적 지원을 해서 수목 정리 등을 하는 정도입니다. 특별히 금전적 지원을 받는 것은 없어요.

- 최근 광화문에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동상을 세우려는 움직임도 있고 우남 선생의 모교인 프린스턴대에 이승만 기념홀을 만든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인하대에 이승만 동상이 다시 선다는 보도도 있던데요.

제가 기념사업회에 관여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만 그때만 해도 사회 분위기가 우남 선생에 대해 이처럼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어느 자리에선가 ‘건국’이라고 한 말씀하셨는데, 그게 문제가 돼 광복회와 여타 좌파 성향의 NGO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대통령을 성토하고 광복절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는 등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던 때였습니다.

지금은 사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주요 신문들과 방송들이 앞 다퉈 건국대통령 기념관 건립의 당위성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은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정책 브랜드 같은 생각이 듭니다. 김 지사는 지난 7월 19일 우남 대통령 45주기 추도사에서 ‘건국대통령님! 저희들은 무지했습니다! 저희들은 비겁했습니다!’라고 우남 선생을 추모했는데, 이 대목에서 서울 국립현충원에 모였던 천여 명의 추모객들 중 많은 분들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현재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는 서명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으며 100만인 서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만시지탄은 있지만 최근 한국의 프린스턴대 동문들이 용기를 내 기념홀을 만든다는 것은 퍽이나 다행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인하대의 ‘인하’는 인천과 하와이의 약자입니다. 대학을 설립하신 분은 이승만 대통령이고 미국 MIT공대를 염두에 두고 세우셨다는 것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십니다. 이제 인하대에 세워졌던 동상이 곧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니 마음이 놓입니다.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의 확립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옳은가 라는 사회적 논의의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더 중요하고 기쁜 소식이지요.

- 우남 이승만이 어떤 분이셨는지 <미래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신다면.

우남은 나라를 잃었을 때 독립에, 해방 후 자유민주 시장경제 국가 건설에 헌신한 분입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독립운동과 애국을 위해 사셨습니다. 하야 후 하와이에 계셨을 때 요양비가 없어 프란체스카 여사 친정으로부터 매달 200달러씩 받아 생활할 정도였습니다.

조선조 개항 이후 해외에서 정식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은 이승만 대통령이 최초입니다. 그것도 미국에서 아이비리그 최고명문대학인 프린스턴대에서 나중에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우남 개인의 명예이기도 하지만 국가적 자랑거리이기도 합니다.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그리고 프린스턴대 박사까지 취득하셨으니 당시 본토 미국인들도 경외의 눈으로 우남 선생을 우러러 볼 수 밖에요. 그 대표적 인물이 도도하기로 소문 난 맥아더 원수입니다. 맥아더가 나이는 우남보다 5살 적지만 우남 선생을 부모님 모시듯 했다는 소문도 있지 않습니까.


정치적 이유로 우남 명예회복 미뤄져

-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훌륭한 업적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기념사업회에서는 해결책으로서 어떤 방안이 있습니까.

저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정치란 정말 무서운 것이란 생각입니다. 정치인 본인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본인이 옳은 일이라고 믿어도, 사회적 분위기로 볼 때 득표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되면 입으로는 다른 소리를 내야 하는 현실 말입니다.

과거 우파 성향의 정권들, 예를 들면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이라 할 수 있는데, 얼마든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일체성 확보 차원에서 4·19에 의해 하야한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복권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정권의 인기 확보에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었지요. 손가락질할 만한 대상이 있어야 국민들의 시선을 그 쪽으로 돌려 정권의 치부를 숨길 수 있었으니까요. 그것은 정치 기술자들이 고금으로부터 내려 받아 써 온 수법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최근까지도 ‘대한민국 건국 정사’가 없는 것입니다. 광복회나 좌파세력들이 금과옥조처럼 생각하는 ‘광복’은 민족의 자존심 차원에서 볼 때 사실 부끄럽고 굴욕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광복은 우리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라는 또 다른 외세가 가져다 준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사건을 1년에 한 번씩 특정세력과 단체들이 등장해 마치 자신들이 한반도를 독립시킨 양 높은 자리에 앉아 국민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건국’은 어떻습니까. 미국과 소련의 각축전 속에서 ‘이승만과 건국의 아버지들’이 그 빈틈을 뚫고 들어가 치열하게 투쟁해서 쟁취한 것이 바로 ‘건국’인 것입니다. 이승만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고문 올리버 박사의 말이며 이 견해는 지금 정설로 굳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광복과 건국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해석이 부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위대한 ‘대한민국 건국’의 자부심이 대대손손 자랑스럽게 후손들에게 이어갈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서 떨어져나간 한반도 북쪽은 지금 현재 지구상에서 국민이 가장 고통받는 생지옥으로 변해 있습니다. 이곳 대한민국에는 김연아가 있고 박태환과 박지성이 있으며 삼성전자와 포스코 그리고 현대자동차가 있습니다.

이것만큼 확실한 ‘건국의 정당성’의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건국절’은 없고 외세가 가져다 준 ‘광복절’만 부끄러운 줄 모르고 요란하게 경축하는 것입니까. 이제 중고등학교에서 국사교육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전환돼야 합니다. 그래야 건국대통령과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돼야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조국이 될 것입니다.

6·25전쟁 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실행에 옮긴 반공포로 석방은 우리 초중고 학생들의 사회역사책에 영원히 기록돼야 할 통쾌한 사건입니다. 전쟁 중 선포한 평화선 또한 모든 학생들이 기억해야 하는 우리의 현대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일들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거나 무시되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앞으로 거국적인 이승만 알리기 캠페인을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인터뷰·강시영 편집국장 ksiyeong@futurekorea.co.kr

사진·김동수 기자 dskim@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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