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천 파동이 없었다면 총선에서 이겼을 것인가. 국정농단이 없었다면 대선 결과를 몰랐을 것인가. 현 정권이 헛발질하면 차기 선거는 승산 있을 것인가. 이 질문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착각을 보여준다.
보수는 1990년대 전교조 등장 이후 20여 년 간 이념 지형의 소리 없는 변화를 등한시 했다. 학교, 대학, 문화, 영화, 언론 등 각 분야에서 저울추가 확 기울어진 것을 아무 대책 없이 방치한 대가가 오늘날 보수정당의 몰락이다.
“지식이 지력이 되고 그것이 신념이 되려면 최소 20여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로널드 레이건 평전) “적절한 변화의 방법을 갖지 못한 국가(정당)는 그 스스로 보존의 수단을 갖지 못할 것이다”(에드먼드 버크)라는 말을 기억하자.
▲ 청년보수를 표방하는 한국대학생포럼 회원들이 문재인 정부의 국정원 국내 파트 해체에 항의하고 있다. |
보수우파가 공유할 만한 지적자산이 있나
좌파라면 누구나 한번쯤 접했을 지적 세례 과정이 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한국경제의 전개과정> 같은 책들을 탐독했다는 공통의 경험을 갖는다.
근래 들어서는 <변호인> <광해> <베테랑> <내부자들> 등의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사회와 권력의 부조리를 형상화하고 젊은 세대에게 각인시킨다. 좌파는 직접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거 승리를 통한 생활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서로 총질을 철저히 자제하고 피아를 확실히 구분한다.
반면 보수우파는 누구나 한번쯤 읽어본 공통분모가 되는 책이 안 보인다. 우파가 공유하는 지적자산이나 문화적 가치가 있는가. 그렇기에 우파는 각개전투(자신의 안위와 영달)에 능하지만 이념 대결에서는 백전백패다.
우파의 가치를 지키는 데도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겨우 운영하던 우파 잡지조차 폐간하고, 애국영화 한편 만드는 데 온갖 고초를 겪고, 교과서에 갖은 폭력이 가해져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 자신이 신봉하는 가치를 스스로 지키려고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정치시장에서 우위를 가질 수 있을까 의문이다.
“강남 교보문고에서 자주 마주쳤던 아우디 타고 다니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외제차 탄 사람은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책을 양손 가득히 사들고 가는 그들은 정말 무서웠다.
돈 있으면 골프장이나 룸살롱 가지 왜 교보에는 왜 자주 오고 난리야. (…) 한국의 우파들은 1주일에 세 번 골프장 가고, 두 번 룸살롱 가느라 아주 스케줄 표가 꽉꽉 찬다. MB와 함께 청와대 들어가거나 내각 꾸린 사람들은 최소한 독서와 음악, 영화감상 같은 거랑은 아예 담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 9시 뉴스 할 때면 전부 룸살롱 가 있거나 술을 마신다고 한다.”(<1인분 인생> 중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의 번역본을 찾아보면 완역자가 마르크스 전공 교수뿐이다. 이런 척박한 지적 풍토로는 좌파의 조롱거리일 수밖에 없다. 좌파는 무능하고, 우파는 부패하다고 하지만 지금의 우파는 부패하고 무능하면서 무지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공부하지 않고선 정권 창출도 없다.
청년을 포기해서는 정당의 미래도 없다
최근 인사 청문회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뻔뻔함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좌우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입증됐다는 게 청년들의 시각이다. 인터넷 댓글이 여론의 전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난 정부와 비교해 하나도 다르지 않다. 청문회 20년을 거치며 성공한 어른, 기성세대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이 청년들에게 깔려 있다.
20~30세대는 확 기울어진 운동장이지만 청년들이 보는 기득권은 우파와 좌파가 크게 다르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좌파 운동권의 마초이즘, 권위주의, 엘리트주의 등에 좌절한 청년들도 많다. 물론 이들이 당장 중도나 우파로 전향할 가능성이 크진 않다. 하지만 청년들의 투표율이 낮아지기만 바라는 정당에는 표를 주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청년들의 대북관은 기성세대가 우려하는 것과는 다르다. 종북세력이 똬리를 틀고 있다 해도 이젠 그쪽도 고령화를 고민한다. 밀레니엄 세대가 자라면서 보아온 북한의 실상은 한마디로 ‘찌질함’ 그 자체다. 촌스런 표정과 옷차림, 과장된 말투, 위선과 과잉 충성 등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뿐이다.
개그콘서트에선 북한 사회의 찌질함이 단골 소재다. 안보의 가치는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는 보수정당이 결정적인 비교우위를 가진 것이 아니다. 후보를 내도 최소한 군대 다녀온 사람을 내야 한다.
반드시 지켜야 할 보수가치
헌법 정신의 근간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보수 스스로 방기한 측면이 있지 않나 반성할 필요가 있다. 헌법 119조 1항이 아니라 2항을 진보 정권도 아닌 보수 정권이 내세우면서 이념의 아노미가 일어났다.
보수정당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들은 발의자만 가리면 민주당 법안과 하등 차이가 없다. 18대 대선 승리가 경제민주화 덕이었다는 것은 결과를 확인한 뒤에 나타나는 사후확증 편향일 뿐이다.
경제적 자유를 중시하는 유권자들로선 그나마 덜 나쁜 대안을 선택했을 뿐, 좋아서 찍은 게 아니다. 또한 보수가 지켜야 할 법치도 무너져 버렸다. 무력한 공권력이 그 상징이다. 보수정당의 근본위기는 보수가 지켜야 할 가치들이 다 무너진 데 있다.
일각에선 영국 보수당의 캐머런 총리가 13년 만에 정권을 탈환한 사례를 들어 유연한 보수를 주장하지만 이 역시 일면의 관찰일 뿐이다. 영국 보수당은 기본 이념은 지켰다. ‘이념의 유통업’이라는 정당이 선택 받으려면 파는 물건(이념)이 확실해야 한다.
좌파정당과 경제민주화 경쟁이나 하는 모호한 정체성으로 유권자의 선택을 기대할 순 없다. 중심이 확실해야 유연할 수 있지, 중심도 없이 그때그때 대증적으로 대응하면 기회주의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보수정당이 살 길
문재인 정부의 실패나 헛발질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경제는 턴어라운드 하고 주가도 뛰고 있다. 먹고 사는 일에 큰 문제만 없다면 보여주기식 이벤트로도 인기는 상당 기간 유지될 것이다. 지금 벌이는 이벤트의 비용은 한참 뒤에나 청구될 어음이지만 인기는 현찰이다.
그러나 여태껏 좌파 경제정책으로 성공한 나라는 없다. 세상은 관념으로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바탕 위에서 개선하고 개혁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력 있는 보수정당으로 거듭나는 것만이 살 길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한다.
거대담론보다 생활정치를 지향할 필요도 있다. 필요하면 당원들이 주 1회라도 거리청소에 나서고, 불량 청소년 선도도 하고, 노인들과 저소득층을 위로하며 진정성 있게 몸을 낮춰야 한다. 중산층에도 강남좌파가 많지만 이념으로 무장한 게 아닌 패션좌파에 가깝다. 보수가 촌스럽고 꼰대스러워서 그렇다고 한다. 이 점은 청년도 마찬가지다.
보수의 가치는 자율과 책임, 원칙과 실질, 절제와 배려에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망각한 보수는 그야말로 수구일 뿐이다. 즉, 나의 절제와 배려가 타인의 희망과 기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진정한 보수다.
하지만 그동안 당이 보여준 이미지는 타인이 아니라 본인의 희망과 기회만을 추구한 듯하다. 선거 패배 후에 단 한명의 정계 은퇴도, 불출마 선언도 없다. 절박성이 없거나, ‘나는 예외’라는 심리로 읽힌다.
좌파 정권이 벌이는 정책 뒤집기 행진을 오불관언으로 방치하면서 과연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고민하는 대안정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 보수의 위기는 보수정당의 위기이지, 보수 시민의 위기가 아니다.
보수정당의 구성원들이 보수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체화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위기다. 득표전략, 선거공학에 급급해서는 미래가 없다. 보수가치를 굳건히 세우고 우직하게 나아가는 것만이 보수정당이 살 길이다.
신보수주의란?
신보수주의(New Conservatism)의 주요한 대변자는 1953년에 <보수주의 정신>을 쓴 러셀 커크(Russel Kirk)였다. 커크는 뉴딜 진보주의자들이 이성의 힘으로 지상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그릇된 진보의 믿음을 대중들에게 심어 줌으로써 인간과 사회에 혼란을 가져다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보수주의자들은 낙관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을 거부했다.
신보수주의는 18세기 말에 프랑스 혁명을 비판한 영국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의 전통을 물려받았다. 그것은 인간이 선하고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전통, 질서, 규범, 권위와 같은 가치들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으로부터 출발했다.
또, 신보수주의는 자유방임주의와 개인주의를 강조한 영국의 고전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전통도 물려받았다. 그것은 사회주의와 정부 간섭주의를 비판한 프리드리히 폰하이에크와 루드비히 폰미제스 같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보수적인 지적 풍토 속에서 헨리 해즐리트, 윌리엄 버클리 2세, 배리 골드워터 같은 신보주의자들이 나왔다. 이들은 빈민을 돕기 위한 국가개입과 복지정책은 결국 인간의 자유를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골드워터는 <보수주의자의 양심>에서 누진 소득세와 공공정책의 폐지를 요구했다.
1950년대의 보수적인 풍토는 진보주의자들까지도 변화하게 만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를 쓴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였다. 그는 나치 독일이나 소련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나타난 인간의 잔인성을 보고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버리게 되었다.
그 대신 인간의 불완전성, 오류성, 원죄, 이기심을 솔직히 인정하는 현실주의적인 태도가 인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이주영 건국대 사학과 교수의 <미국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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