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는 ‘역사’인가 ‘핏빛 스펙터클’인가
<군함도>는 ‘역사’인가 ‘핏빛 스펙터클’인가
  • 이용남 영화평론가·청주대 영화학과 객원교수
  • 승인 2017.08.1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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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2017년 빅이슈 영화로 개봉 8일 만에 500만 관객수를 돌파하고 있지만 영화 자체로만 놓고 본다면 영화로는 실패한 영화이고, 마케팅으로는 성공한 영화일 뿐이다. 주관적인 해석이지만 <군함도>를 뜯어보면 내용은 별로 없고, 핏빛 스펙터클만 가득한 여름용 블록버스터 영화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영화 <군함도> 포스터

과대포장된 질소과자일 뿐이다

<암살>, <밀정>, <덕혜옹주>, <동주>, <박열>처럼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다 보니 더 이상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관객들에게 새롭고 진지한 가치, 정서, 공감을 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함도>에 관객이 몰리는 것을 보면 모순적이다.

모순을 이해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세상에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영화를 소비하는 합리적인 문화소비자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투자배급사나 제작사는 합리적인 영화소비자들을 포기하고, 소위 집단적인 문화공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특정대상과 국가를 공략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비판점은 충성심 높은 영화소비자들이 알아서 변호해준다. 어쨌든 영화의 작품성과는 별개로 교묘한 마케팅은 성공적으로 작동되고 있다. 마치 ‘허니버터칩 신드롬’ 현상과 비슷한 모양새다.

<군함도>가 개봉되고 영화 속보다는 영화 밖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영화감독은 영화로 말하면 된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은 지속적으로 언론을 통해 영화 설명과 해명을 반복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영화의 진정성 문제와 완성도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며, 고도의 노이즈마케팅 전략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영화감독은 영화에 솔직해야 한다

<군함도>와 관련된 세 가지 논란을 중심으로 영화의 속내를 이해해보자. 첫째, 역사왜곡 논란이다. 영화감독은 역사가가 아니다. 역사적 상상력으로 재현된 창작물에 허구가 가미된 것을 비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의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하면 역사를 다루는 영화는 신중해야 한다. <덕혜옹주>처럼 상품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건 위험하다.

영화에서 역사를 다룬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정신과 오늘의 역사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증보다 시대정신의 재현이 더 중요하다. 그럼 <군함도>가 재현하고 있는 시대정신은 과연 무엇인가?

류 감독은 인터뷰에서 “<군함도>는 민족주의 정서에 기대기보다는 보편적 인류애를 바탕으로 기획된 영화”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관객은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느꼈는가.

아마도 보편적 인류애보다는 인간의 탐욕과 생존, 결과적으로 일본에 대한 분노와 증오일 것이다. 파울 괴벨스의 말처럼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군함도>는 서사적 완결성보다는 스펙터클 묘사에 힘을 줬다. 영화관 문을 나서면 조선인 노동자들의 탈출 장면만 기억에 남는다. 당연하다. 류 감독이 영화에 방점을 찍은 것은 ‘역사’가 아니라 바로 ‘핏빛 스펙터클’이기 때문이다. 탈출 시퀀스만 한 달 동안 촬영한 이유이기도 하다.

스펙터클한 탈출극의 영화적 장치로 OSS 광복군을 투입해 가슴에 새겨진 상처에 일회용 밴드를 붙여주는 감성적인 가짜 카타르시스를 생산했다. 스토리텔링의 설득력보다는 상업성을 목적으로 한 스펙터클에만 집중하다 보니 포장지만 화려한 김빠지는 영화가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영화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점이다.

<군함도>는 한국판 <정무문>이 되었다. <정무문>은 일제 치하의 상해를 배경으로 반일감정과 민족주의적인 내용을 담아내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낸 영화다. 이강옥(황정민)이 욱일승천기를 찢고, 박무영(송중기)이 불타는 야마다(김중희)의 머리를 참수하는 장면으로 영화적인 재미는 살렸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역사가 빠진 역사이야기가 되었다.

어쩌면 이런 모순을 메꾸기 위해 요란한 노이즈마케팅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상품성만을 위한 의도적 왜곡이라면 이제라도 역사의식 언론 플레이는 중단하는 것이 옳다. 영화감독은 영화에 솔직해야 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영화로 승부해야 한다. 베테랑 감독이 무엇이 두려운가.

둘째, 양비론 논란이다. <군함도>에서 인물들을 이분법적 선악 구도로 나누지 않은 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다. 일본인은 무조건 악이고, 조선인은 무조건 선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의 캐릭터는 영화를 식상하고 진부하게 만든다.

인간은 현실과 상황에 맞게 착해지거나 혹은 나빠진다. 일본인 혹은 조선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의 맥락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부정할 수 있는가? 이런 철학적 문제를 이분법적 선악 구조로 표현하지 않았다고 친일영화라고 명명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부재와 무지의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만 과유불급의 스타들이 출연하다보니 캐릭터 비중 배분의 문제가 발생했다. 균형감을 강조하다 역으로 캐릭터에 대한 설득력과 개연성 부여에 실패했다. 상황보다는 대사로 캐릭터를 묘사해 입체적이지 못한 캐릭터가 탄생했다. 결국 이 점이 영화의 완성도를 부족하게 했다.

셋째,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다. <군함도>가 개봉일에 확보한 스크린 수는 전국 2500여개 중 2027개(현재는 1847개)였다. 한국 영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영화계에서는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CJ 강점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상인이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에 잘 팔리는 상품으로 가득 채워 놓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문제라면 언제나 문화사회공헌을 외치면서 문화강국과 문화리더가 되겠다는 CJ의 이중성이며, 또한 좋은 문화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수준의 문화상품을 대중들에게 강매하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다. 대한민국에서 천만 신화의 의미가 퇴색되는 이유다.

영화의 한 장면

CJ 엔터테인먼트는 문화예술 단체가 아니라 기업이다. 그리고 기업이 영화에 투자와 배급을 한다는 것은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다. 당연히 투자배급사는 최고의 상품성을 만들기 위해 역사적 사실보다는 스펙터클의 판타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역사는 메시지가 아닌 소재로 전락하고 만다. 대중들은 결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류승완 감독은 YTN에 출연해 “독립영화 출신으로서 마음이 무겁다”, “여름 시장에 수년째 반복되고 있는 스크린 독과점 논란에 내 영화가 있어 송구스럽다”라고 말했다. 정말 비겁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자 위선이다. 왜 솔직하지 못하는가?

순제작비 220억, 손익분기점은 800만이다.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와이드릴리즈 방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미 스크린 독과점은 영화기획 단계부터 계획된 것이다. 더 이상 언론 플레이로 짜고 치는 고스톱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정무문>이 아닌 <덩케르크>에서 배워야

<군함도>는 철저하게 CJ 엔터테인먼트 코드와 거대한 중국 시장에 맞춰 일본에 대한 분노와 증오라는 정서를 상품화하고 공유화 했다. 다시 말해 하시마의 조선인 노동자를 소재로 만든 민족주의 감성팔이 영화다.

<군함도>는 화염병과 촛불, 다이너마이트의 굉음, 빗발치는 총알, 일본인과 조선인의 대결과 폭력적 전쟁의 난무 속에 가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함도>의 스토리 구조와 장면들은 진부하고 식상하다. 6만6000제곱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세트장에서 촬영한 작품치고는 별로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다.

영화에서 서스펜스와 스펙터클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서사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군함도>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의 판타지로 무리하게 전개하면서 완성도를 매우 낮게 했다.

이 영화의 최대 목적은 대규모 제작비를 투자한 탈출 스펙터클 판타지로 대중의 환호와 흥행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에게 역사의 사실이 아닌 다이내믹한 카타르시스와 환영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의 진중함은 사라지고 시각적 볼거리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군함도>는 <정무문>이 아니라 <덩케르크>에서 배워야 한다. 류승완 감독이 그리도 표현하고 싶었던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과 인류애, 시간의 재구성에 따른 영화 공간의 확장, 영화와 역사의 밖이 아닌 영화와 역사 속으로 관객을 안내하고, 핏빛의 레드가 아닌 전쟁과 인간 그 자체의 회색을 중심으로, 억지 눈물이 아닌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는, 마케팅의 힘이 아니라 진정한 영화의 힘으로 대중들과 승부하고 있는 <덩케르크>에서 배워야 한다.

더 이상 대중과 자신을 속이지 마라. 영화감독은 영화에 솔직해야 한다. 아무리 천만 관객의 영화가 된다 할지라도 영화 그 자체의 힘이 아닌 교묘한 마케팅의 결과물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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