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바이칼! 스보보드니 너머 이르쿠츠크로!
아! 바이칼! 스보보드니 너머 이르쿠츠크로!
  • 김정은 미래한국 객원기자
  • 승인 2017.08.1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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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자유여행] 자유시 참변 추모 上

6월 24일부터 7월 6일까지 역사정립연구소(소장 조형곤) 주관으로 자유시 참변 96돌을 추모하는 답사여행이 있었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자유시(알렉셰프스크, 1925년부터 스보보드니로 개명)에서 일어난 대한독립군단 소속 한인독립군 학살 사건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계열과 상해파 고려공산당 계열 간의 세력 주도권 충돌로 빚어진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제국주의 일본과 러시아 공산당의 음모에 따른 독립군 제거 작전의 성격이 더 강하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완전히 궤멸되었고, 이후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무장운동을 하던 독립군 세력은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자유시 참변의 역사 현장을 답사한 여행기를 상·하 두 번에 나눠 소개한다 <편집자 주>

▲ 누리에 부질 없는 일이 있으랴. 대한독립군 어른들께서 오늘 부르한 바위까지 74억의 비나리로 우리를 이끌어주셨다.


6월 24일 인천공항- 역사 왜곡의 뿌리를 들어내리라!

발길이 참으로 무거웠다. 3500 대한독립군단 어른들을 뵈려 가는 길이 워낙 거칠기도 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진국의 문턱에 선 대한민국에서 있을 수 없는 탄핵반란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198일에 이르는 그 전쟁에서 비참하게 진 패잔병들이었다. 피로 기껏 되찾아준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도 못한 후손들이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조상님들을 뵐 것인가.

돌이켜보면 이미 1991년 즈음 운동권은 스스로 주저앉고 있었다. 야만의 국제 공산주의 진영이 속절없이 무너지던 그 무렵 ‘죽음의 굿판’까지 벌였음에도 여론은 싸늘했다. 1996년 연대 사태까지 운동권은 일제를 흉내 내어 옥쇄투쟁까지 펼쳤지만 운동권은 시나브로 학원에서조차 뿌리가 말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극우사대종북 부패운동권은 찬란하게 되살아났다. 그 실마리는 너무도 일찍 터뜨린 샴페인이었으며 그 열쇠는 대한민국을 안에서 무너뜨린 역사문화전쟁이었다. 88올림픽의 성공에 취한 노태우는 북방정책부터 남북기본합의서까지 서두르기만 했으며 체제전쟁을 모르는 김영삼은 한술 더 떠 나라 안팎의 빗장을 다 열어버렸다.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1990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까지 잇달아 만들어진 문제아들은 메두사였다. 머리만 달랐지 몸통은 똑같은 ‘열린 사회’의 적들이었다. 백색제국주의의 아류인 일본과 적색제국주의의 수괴인 소련을 앞뒤로 맞서 싸우며 이뤄낸 독립임에도 소련은 빼고 일본만 적으로 돌리는 역사 왜곡을 내놓고 벌였다.

전교조와 민예총과 언론노조는 기꺼이 그 손발이 되어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와 학원과 도서관과 언론 방송과 연극, 영화와 인터넷을 빨갛게 물들였다. 80년대 물이 빠지려다 도로 채워진 4~50대와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스스로 효순이 미선이가 되고 광우병 전사가 되고 단원고 학생-학부모가 된 것은 30년 공들인 역사 왜곡의 승리였다.

오늘 우리는 그 역사 왜곡의 뿌리를 통째 들어내려 나섰다. 일제의 정규군을 통쾌히 깨뜨렸음에도 소련의 거짓말에 속고 남로당의 뿌리인 이르쿠츠크 공산당에게 무참히 무너져 바이칼까지 끌려간 대한독립군단은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인 독립전쟁을 웅변한다.

일제보다 더 나쁜 적색제국주의의 농간과 앞잡이들의 부역질에 우리 군대를 잃었기에 임시정부는 반공으로 돌아서고 이승만의 동맹노선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월 24일부터 7월 6일까지 자그마치 12박13일이다. 두 차례 기차간에서만 꼬박 사흘을 지내야 한다. 그렇다 한들 아직도 채 눈을 감지 못할 조상님들 앞에 어디 군소리인들 내뱉을 수 있으랴.

1945년 8월 15일을 승전국의 일원이 아니라 식민지로 맞이하게 만든 소련의 꼭두각시들. 그도 모자라 괴뢰정부마저 일제 부역자들과 소련 따라지들로 모조리 채워 6·25로 한겨레의 피바다를 만들고 오늘까지 2500만 대한국민들을 노예로 짓밟는 역도들과 그 부역자들을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2002년 2008년 2014년. 꼭 여섯 해마다 난을 일으키더니 기어이 탄핵반란을 이뤄냈다. 그러나 네 번째는 반란군들의 몫이 아니라 애국우파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역사 왜곡의 뿌리를 걷어내고 대한독립군단을 대한민국 군인-경찰의 뿌리로 곧추세울 것이다.

반드시 역사문화전쟁에서 이겨내 2021년 6월 28일 자유시참변 한 세기의 날에는 더는 패잔병이 아니라 자유통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떳떳하게 조상님들을 찾아뵈리라 각오를 다지며 러시아 비행기로 이북 하늘을 가로지른다.

이상설 어른 유허비- 숙제로 남겨진 네 세모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내려 80km 남짓 우수리스크로 곧장 간다. 이상설 어른께 인사드리려 함이다. 올 3월 2일이 어른의 순국 한 세기 날이었음에도 헌재의 탄핵 심판을 코앞에 둔 터라 그를 핑계로 이리 오지도 않고 서울에서 조촐히 비나리를 바쳤다. 드릴 말씀이 있겠는가. 해서 냉큼 오기는 왔지만 마치 얼차려라도 하듯 무척 혼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어른의 묘는 라즈돌리노예 강이다. 비나리에 적었듯이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이르시기를,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

비가 곧 올 날씨라 모기들이 진을 쳤다. 발해 성터를 가까이 두고 비나리를 하는 한 시간 동안에 우리 열둘 추모기행단은 한 주일 가도 아물지 않을 만큼 제대로 물렸다. 물려도 쌌다.

우리의 마음가짐이 그만큼 웅숭깊지 않았음이라. 으레 헤이그 밀사로만 알고 있지만 어른은 참으로 큰 뿌리셨다. 고작 마흔일곱에 돌아가신 어른은 마지막 열세 해를 불꽃 같이 사셨다.

어른은 세모꼴 넷을 그려내셨다. 가장 작은 세모꼴은 내일 들를 연추리(크라스키노)와 하산과 훈춘이다. 가운데 세모꼴은 연해주의 바이칼인 흥개호(항카이호)를 끼고 밀산의 한흥동과 용정의 서전서숙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이었다. 조그만 세모꼴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이 곳 우수리스크 그리고 크라스키노까지 이었다.

가장 큰 세모꼴은 흥개호의 세모꼴과 하와이와 상해까지 잇는 그림이었으며 그를 매듭짓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해방 때까지 우리는 그 네 세모꼴 안에서 움직였으며 오늘도 어른이 이어주신 네 세모꼴은 우리가 손도 못 댄 해묵은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결례를 범했다. 유허비는 강가에 있다. 우수리스크부터 늪을 메워 만들었듯 이 곳은 더하다.

▲ 가장 작은 세모꼴은 크라스키노와 하산과 훈춘이다. 다음 세모꼴은 밀산과 용정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였다. 또다른 세모꼴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그리고 크라스키노까지, 가장 큰 세모꼴은 흥개호의 세모꼴과 하와이와 상해까지 잇는 그림이었다.

걸핏하면 강물이 넘치니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따로 없다. 순국 한 세기를 맞아 그를 고치기는커녕 휴전선 아래 5200만에게조차 제대로 알려내지도 못했다. 이리 게으름 피다가 다음 해에는 제대로 경을 칠 듯하다.

라즈돌리노예 역에 들렀다. 1937년 9월 9일 러시아 동포들이 가장 먼저 끌려간 곳이다. 독립군들을 짓밟고 소련에 충성했던 이르쿠츠크 공산당원들이 토사구팽으로 가장 먼저 집단학살, 숙청된 곳도 이 가까이리라. 동포들을 기리고 배신의 처절한 끝을 되새기며 모기떼들에 둘러싸여 묵념을 올린다.

세 해째 들르지만 언제 제대로 살아날지 알 수 없는 최재형 어른의 고택(그나마 지난해 꽂혀 있던 2만 루블 전기요금 독촉장은 사라졌다.) 그리고 고려인문화센터를 살펴본 뒤 잠자리에 든다. 지난 한 세기를 말해주듯 천둥 번개 속에 장대비가 그칠 줄 모른다.

꿈 속에서 우리 스스로 이상설이, 최재형이, 안중근이 되어본다. 소스라쳐 깨니 새벽이다. 꿈과 현실이 다르지 않다. 어차피 비나리를 바친 우리는 앞으로 이름 없는 이상설이 최재형이 안중근이 되어 살아야 한다. 입술을 깨물며 다시 잠을 청한다.

6월 25일 안중근 장군 단지동맹비 - 대한독립전쟁의 순결한 상징 

우수리스크에서 크라스키노까지 200km가 넘으니 오가는 길만 한나절이다. (한국이 아니다.) 크라스키노 주카노바 리(里)는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연추(煙秋)리다. 최재형 어른과 이범윤 간도관리사께서 온몸을 바쳐 만든 연추 창의소가 있던 곳. 여기서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은 조선 진공작전을 펼쳤으며 끝내 단지동맹을 맺어 이등박문을 저승으로 보냈다.

겨우 서른한 살의 나이로 순국한 안중근 장군은 유관순 열사와 함께 대한독립전쟁의 순결한 상징이다. 진공작전에서 크게 이겨놓고도 만국공법을 따른다며 일본군 포로를 풀어준 탓에 그의 군대는 몰살하다시피 했다. 그는 그 죄를 더 크게 갚으려 이등박문의 응징에 나선 것이다.

거사를 이룬 뒤 순국을 앞두고 서문만 겨우 쓴 ‘동양평화론’은 가슴을 친다. 이 또한 우리 후손들에게 해묵은 숙제다. 건국 70여 년에 그를 넘어서는 국제정치의 꿈을 애국우파가 말해본 적이 있었던가.

이 대목에서 역사의 역설을 마주하게 된다. 명치유신의 주축이었던 조슈(長州) 인맥의 맏이였던 이등박문은 치밀했다. 조선을 영원히 일본으로 만들려고 40년을 준비했다. 그 말은 ‘부드러운 지배’를 뜻한다.

사문난적 놀이만 펼치다 망국에 접어든 우물 안 개구리들에게 질렸던 조선 백성들을 떠올리면 ‘이등박문이 살았더라면~’보다 더한 악몽은 없다. 역사는 때로 사람들의 얕은 꾀를 넘어서는, 알 수 없는 섭리일 듯도 하다.

또 하나 소름 돋는 이야기가 있다. 2010년 3월 26일은 안중근 장군의 순국 한 세기 되는 날이었다. 바로 그 거룩한 날에 죽은 김유라(김정일)는 천안함 테러를 일으켰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같은 해 11월 23일 3.1만세 만큼 20세기 인류사에 우뚝 솟은 코리아의 자랑, 신의주 반공학생의거가 있은 날이다. (3.1만세처럼 2차 대전 뒤 인류사 처음으로 스탈린 지배에 맨주먹으로 맞선 날이다. 훨씬 뒤 동유럽 이야기는 견줄 바가 못 된다.) 그 날 김유라는 또 연평도 테러를 저질렀다.

‘입만 열면 거짓말’ 하는 운동권이 지금도 우물우물 제대로 말을 못하는 2010년. 그 다음 해 12월 17일 김유라는 저승에 갔지만 이미 그때 평양 역도들의 운은 다했다. 6.25 한 갑자가 되는 경인년 한 해에 일제 식민지 35년 앞뒤를 다 꿰었으니 아니 그럴 텐가. 그리 보니 우리도 탄핵반란이 일어난 뒤 딱 그 만큼을 채운 다음 날 추모기행을 떠났다.

다음 해에 탄핵반란군들의 운이 다할 것이라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다시 소름이 돋는다. 아니나 다를까 5.18에 갔던 이들이 6.25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단 이야기가 들린다.

6월 28일 자유시 참변 96돌 비나리 - 드디어 하늘이 열렸다

신한촌 기념비까지 블라디보스토크를 두루 살펴보고 대륙횡단열차에 올라 만 하루를 꼬박 달려 스보보드니에 내리니 6월 27일 밤. 우수리스크처럼 천둥 번개와 장대비가 우리를 맞이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찌 소식을 들었는지 스보보드니 시가 아예 정전이 되어버렸다. 자그마치 세 차례나. 한잔은 둘째 치고 비누 거품을 뒤집어쓴 이들이나 냉수 마찰을 한 이들이나 시 당국의 엄청난 환영에 다들 몸 둘 바 모르는 밤이었다.

라즈돌리노예처럼 혼날까 마음을 졸이다 얼핏 선잠에서 깨어나니 이슬비가 내린다. 큰일이다. 아직도 우리 정성이 모자란 탓일까. 수라셰프카 역으로 간다. 한 세기 가까이 그 날을 말없이 알려주는 급수탑을 가운데 놓고 자유시참변의 날, 대한독립군단은 무너져갔다.

존경받는 빨치산 지도자 갈란다리시빌리가 명령은 내렸으되 앞에서 설쳐대며 독립군들을 토끼몰이 한 역적들은 오하묵을 비롯한 이르쿠츠크 공산당들이었다. (그 또한 1937년 9월 9일 총살당했다.)

아직도 군사구역이라서 움직임이 사뭇 조심스러운 스보보드니. 그를 떠나 우리는 비감에 젖어 스스로 비목(碑木)이 되었다. 그날의 초연(硝煙)이 쓸고 간 철교를 지나 아직도 옛 악몽을 못 떨친 수라셰프카 마을을 거쳐 우리 독립군 어른들이 쫓겨 간 제야 강까지 서러움 알알이 쌓은 돌덩이를 가슴에 얹고 나아갔다.

아! 제야강이여! 3500 대한독립군단의 원혼들이여! 놀랍다. 작은 기적이다. 올해로 세 해째인데 세 가지가 모두 이뤄졌다. 첫째, 이슬비가 그치니 하늘이 저리 맑고 푸르다. 둘째, 그리 극성스럽던 모기마저 자취를 감췄다. 셋째, 때마다 와서 물어보며 우리를 움츠리게 하던 러시아 군인들이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렇다. 세 해에 이르러 드디어 하늘이 열린 것이다.

목이 메인다. 첫해부터 비나리를 올리며 이리 겁 없이 떠들었다. ‘님들의 피가 서린 이 곳 / 자유시와 밀산과 화룡에 그리고 이르쿠츠크에 /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난 사람들이 / 와서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리도록 / 그 기막힌 역사 앞에 / 이 악물고 속울음에 애끊도록 / 그들을 데려오겠습니다.’ 그러나 오늘까지 잘나기는커녕 젊은 사관생도 한 사람, 경찰 한 사람조차 못 데려왔다. 그럼에도 조상들께서 우리들을 굽어 살피셨다. 이 망극함을 어이 말로 다 이르겠는가.

이를 깨문다. “우리 애국우파들부터 3500 대한독립군단이 되겠습니다.” 김성주(김일성)의 거짓 신화 뒤에 사라진 대한독립군단의 후예들까지 일으켜낼 것이다. 다시 비나리를 옮긴다.

‘그 뒤 만주에서 / 독립군은 시나브로 사라졌습니다. // 쌍성보와 대전자령에서 다시 / 봉오동과 청산리의 전설을 되살려낸 / 지청천 총사령의 한국독립군은 또다시 / 자유시참변처럼 무장해제 당했습니다. / 조선혁명군을 이끌던 양세봉 총사령은 / 김좌진 장군마냥 돌아가시고 남은 이들마저 / 1938년 9월 6일 끝내 깃발을 뺏깁니다. // 반만년의 터전 만주에서 쫓겨난 독립군이 / 그 어디에서 활개를 치겠습니까. / 광복군은 그 이름만으로도 눈물겨웠습니다. / 1945년 8월18일 조선 진공작전은 / 스러져간 대한독립군단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습니다.’

모두 한마음 한뜻 한몸이었다. 해방둥이부터 태어난 해가 반세기나 먼 이까지, 남녀노소에다 나보다 더 코리아를 사랑하는 외국 사람까지 모였음에도 훈련된 군인들처럼 손발이 척척 맞는다.

다들 알아서 누구는 펼침막과 두 나라 국기 세우고, 누구는 자리 깔고 제수 펼치고, 누구는 사진 찍고 동영상 찍고… 다들 종교가 다름에도 절하는 이들이나 기도하는 이들이나 집안 어른 첫 기제에 온 듯하다. 빙 둘러서 비나리를 읊을 때 이미 열두 사람은 대한독립군단이 되었다.

낯빛이 해맑아졌다. 묵직한 돌덩이 가슴들이 제야강보다 더 푸르게 벅찬 가슴이 되었다. 수라셰프카 마을에 이어 독립군들의 받침이 되었던 ‘까레이스키 빠숄록’(이제는 소비에트스키 빠숄록)으로 간다. 만만찮은 길임에도 하늘이 도우사 제대로 찾을 수 있었다. 언덕에 올라 아스라이 제야강과 스보보드니 시를 내려다본다.

이 언덕배기 마을에서 동포들과 독립의 꿈을 나눴던 전사들이 저 곳에서 콩 볶는 소리에 떠밀려 제야강을 피로 물들였다. 스치는 바람 소리가 동포들의 울부짖음인 듯 처연하다. 깊이 묵념을 올린다. ‘반드시 님들의 얼과 넋을 모시고 / 자유통일대한민국의 길을 열겠습니다. / 천지에서 즈믄 해를 품고 목 놓아 울겠습니다. //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이다.’

☞ 자유시참변 96돌 Svobodny 비나리

3500 대한독립군단과
수만 동포들
그리고 3종사께 절하옵니다.
하나>
 
1921년 6월28일
러시아 아무르주 제야(Zeya)강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오늘은 스보보드니(Svobodny)인
그 자유시에 자유는 없었습니다.
 
오직 음모와 배신과 피비린내
그리고 무너져 내린 독립의 꿈과
대한독립군단의 깃발만 뒹굴 뿐.
 
둘>
 
기미년 3월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지구마을이 놀랐습니다.
 
을사늑약부터 열네 해
조선이 나라를 들어 바쳤다는
일본의 거짓말이 빛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만주의 독립군은
불같이 일어섰습니다.
동아시아 첫 제노사이드였던
1894년 갑오전쟁 때부터 사반세기 동안
수십만이 학살되지만 살아남은 수천이
거듭 목숨을 걸었습니다.
 
제 종교를 다시 죽여
3.1만세를 일으킨 동학과 발을 맞추어
아예 처음부터 일제에 짓밟힌 대종교 또한
만주에서 모든 신도를 독립군으로 보내었습니다.
 
봉오동에서 청산리까지
3천6백의 일본군이 죽었습니다.
일본은 그 보복으로
화룡현 장암동, 연길현 의란구와 와룡동
동간도를 반년 동안 그 몇 곱절
동포들 피로 물들인 경신 간도참변을 일으켰습니다.
 
독립군들은 동포들을 살리려고
눈물을 머금고 물러납니다.
총재 서 일, 부총재 김좌진 홍범도 조성환,
총사령 김규식, 참모총장 이동녕, 여단장 지청천.
오직 하나의 깃발로
모두 모여 대한독립군단을 세우니
27소대 3500 송이 무궁화였습니다.
 
셋>
 
밀산을 거쳐 흑룡강을 건너
러시아 아무르주 자유시.
그러나 믿었던 레닌은, 붉은 군대는
 
일본 편이었습니다.
포로로 잡힌 854 송이 무궁화 말고
모두 죽고 사라졌습니다.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과
상해 고려공산당이 바보짓 했습니다.
하지만 그 상전은 소비에트였고
그들의 총 끝에 저 맑은 제야 강에
사반세기 수없는 전투에도 살아남았던
백전노장 대한독립군단은 사라졌습니다.
 
이윽고 백포 서 일 총재는
대한독립군단을 세운 밀산에서
하늘에 죄를 고하며 자진하셨습니다.
뒷날을 내다보며 신민부를 세운
김좌진 장군은 아홉 해 뒤
공산당에게 암살당하셨습니다.
날으는 홍범도 장군은
중앙아시아로 끌려가
극장 청소부로 돌아가셨습니다.
 
넷>
 
대한독립군단의 운명은
곧 동포들의 운명이었습니다.
세계사를 읽지 못한 업보입니다.
 
19세기 동아시아에서
영국은 청나라를 넘보고 러시아는 만주를 넘보는데
1860년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와
1867년 명치유신 뒤 만주까지 넘보는 일본이
조선에서 부딪힙니다.
 
1902년 영일동맹과 1904년 러일전쟁은
일본이 만주를 쥐고 흔듦을 말합니다.
3.1만세가 있었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대한독립군단은
‘빨간 제국주의’ 소련을 믿은 것입니다.
 
기댈 데가 없었던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그 뒤로도 끝없이 스탈린에게 놀아납니다.
동북항일연군이란 이름으로
소련의 대일 방패막이가 되었지만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나자마자
스탈린은 그들을 곧장 버립니다.
 
잊을 수 없는 1937년 9월9일 스탈린은
2500 충성을 다 바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을 죽이고
20만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끌고 가면서
2만5천을 저승으로 보냈습니다.
 
다섯>
 
나라 잃은 유민이라지만
대조영 어른이 당나라를 무찌르고
후고구려 발해를 세운 터에서
독립군들은 연해주 고려인들은 간도 동포들은
묘비도 없이 죽어갔습니다.
 
그 뒤 만주에서
독립군은 시나브로 사라졌습니다.
 
쌍성보와 대전자령에서 다시
봉오동과 청산리의 전설을 되살려낸
지청천 총사령의 한국독립군은 또다시
자유시참변처럼 무장해제 당했습니다.
조선혁명군을 이끌던 양세봉 총사령은
김좌진 장군마냥 돌아가시고 남은 이들마저
1938년 9월6일 끝내 깃발을 뺏깁니다.
 
반만년의 터전 만주에서 쫓겨난 독립군이
그 어디에서 활개를 치겠습니까.
광복군은 그 이름만으로도 눈물겨웠습니다.
1945년 8월18일 조선 진공작전은
스러져간 대한독립군단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습니다.
여섯>
 
백색제국주의의 아류였던 일본은
남경과 하얼빈은 둘째 치고
오끼나와와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그악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일본만 있었다면
설사 자유시참변을 거듭 겪었더라도
대한독립군단은 반드시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그악스러웠던
수-당 선비족들과의 백년 전쟁도 이겨내고
코리아는 고향 만주를 지켜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독립군들은 곱사등이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일본을 무찌를 때
적색제국주의는 그 등을 찔렀습니다.
이긴다는 것은 물리학의 법칙에 어긋납니다.
 
자유시참변과 강제이주 뿌리 뽑기의 학살
신의주반공학생의거와 3.1만세 재현시위에 이르기까지
사반세기 동안 코리아는 ‘있을 수 없는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법칙을 넘어 이겨내었습니다.
 
독립은 기적이었습니다.
백색제국주의와 적색제국주의
더할 수 없이 그악스러운 그 둘과 싸워
이겨내고 살아남은 나라는 지구마을에서
오로지 대한민국뿐입니다.
 
이 전쟁에서
탈영했던 무리들의 끝은 비참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바랬든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었든
그들의 모든 피땀은 자취 없이 지워졌습니다.
 
스무 살 기념으로 고동뢰 독립군 소대를 죄다 죽인
중국공산당의 졸개이자 소련공산당의 꼭두각시
김성주의 이름만 그 자리에 아로새겨졌습니다.
 
마침내 조선의용군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스탈린과 모택동의 뜻에 따라 5만이 총알받이가 되어
낙동강에서 덧없이 죽어갑니다.
 
일곱>
 
저승에서
이 모든 끔찍한 역사를 지켜보신
3종사시여.
대한독립군단 독립군들이여.
간도 참변의 동포들이여.
 
맹세합니다.
 
지난 6백 해
길게는 9백 해 가까이 빠져든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도록
우리 목숨을 다하겠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잊으면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그 모진 역사의 상처를 고스란히
새기고 사는 중국동포들과 러시아동포들
그들을 반드시 품겠습니다.
지옥에 노예로 사로잡힌
2500만 대한민국 국민들을 되찾겠습니다.
 
님들의 피가 서린 이 곳
자유시와 밀산과 화룡에 그리고 이르쿠츠크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난 사람들이
와서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리도록
그 기막힌 역사 앞에
이 악물고 속울음에 애끊도록
그들을 데려오겠습니다.
 
이 세 맹세를 새길 것이며
님들께서 굽어 살피사 저희들을 이끌어주소서.
 
반드시 님들의 얼과 넋을 모시고
자유통일대한민국의 길을 열겠습니다.
천지에서 즈믄 해를 품고 목 놓아 울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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