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 중에서 정상적인 주목을 받으며 특별하다는 평가를 확보한 경우로는 <브로크백 마운틴>(2005)이 아닐까 싶다. 대만 출신의 이 안 감독이 미국에서 만든 이 영화는 1963년 미국 와이오밍의 어느 산골 양목장에서 일하는 양치기 목동 중 동성에 이끌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동성애영화 또는 게이 영화의 인상과 품격을 크게 바꿔 놓는 역할을 했다. 특별한 인종들끼리에서만 통하며,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란 일반적 선입관을 뒤집듯 진지한 사색과 아름다운 풍광을 펼쳐 놓았다.
길거리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팔던 김밥이 어느 날 유명 백화점 푸드코트에 입주해 죽이는 맛집으로 주목받은 경우처럼 게이 동성애 영화의 위상을 새롭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성애 영화의 새로운 지평 <브로크백마운틴>
이 영화를 감독한 이 안은 ‘결혼피로연’(1993)이란 영화로 이미 동성애 영화를 만든 경력이 있다. 게이 연애를 하는 대만 청년과 그의 아버지가 겪는 문화 충돌 또는 세대의 변화를 바라보는 경우다.
대만 출신이지만 미국 뉴욕에서 부동산 딜러로 성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웨이퉁은 애인 사이먼과 동거하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게이 사장님이다.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런게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하더라도 다른 사람이야기이지 내 아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믿는 노년의 아버지는 아들 집을 방문하겠다는 소식을 알린다.
빨리 결혼해서 손주를 낳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문도 곁들이면서. 중국식 문화와 전통을 가진 아버지에게 게이 생활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웨이퉁은 부랴부랴 건물관리인 아가씨를 애인이라고 속여 가짜 결혼식을 꾸미려 한다. 우당탕 소동이 벌어지지만, 거짓말이 계속 통하기는 한계가 있다. 동성애 문제를 비난하기 보다는 생활 경험과 인식이 다른 세대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하여 보이는 당황스러움과 충격, 주저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결국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을 웃음과 연민 속에 비벼낸다.
단순한 찬반이나 비난, 비판의 시선이라기보다는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가 현실로 다가왔을 때 어떻게 그것을 넘어서는가를 묘사하는 것이다. 옛날 영화 중에서 흑인인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던 백인인권운동가가 막상 자기 딸이 흑인 청년을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어쩔줄 몰라 하던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흡사하다.
‘결혼피로연’과 ‘브로크백마운틴’으로 이어지는 이 안 감독의 문화적 성찰과 내공은 철학적 경지에 닿아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성애와 문화 충돌
영화에서 동성간 연애 또는 남자들끼리의 사랑을 다룬 경우로는 <뜨거운 것이 좋아>(1959)가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1929년 금주법이 시행되던 때의 미국 시카고. 악단 연주자 조와 제리는 갱단의 살인 현장을 목격하는 바람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궁여지책으로 여자 변장을 하고는 여자 악단 속에 숨는다. 여자로 변장한 남자 둘과 여자 단원들, 남자인 줄 모르는 채 홀랑 마음을 뺏긴 어느 백만장자 할배가 엮이면서 뒤죽박죽 소동이 벌어진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코미디 영화이지만, 상대방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남자가 남자에게 끌리는 상황, 여자이지만 여자에게 끌리는 미묘한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라 당혹스러워 하는 캐릭터들의 성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훗날 다른 영화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할 수 있다.
동성간 연애를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이 영화는 한국영화 <남자는 안팔려>(1963)로 번안되었다. 영화배우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온 두 젊은이가 우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지만, 대부분 여자만 모집할 뿐 남자를 원하는 곳을 찾기 어렵다. 하는 수 없이 여자로 변장해 어느 여성 극단에 지원한다. 여자들만 우글거리는 곳에 여장 남자가 뛰어든 뒤 벌어지는 온갖 소동이 벌어진다.
<뜨거워서 좋아요>나 <남자는 안팔려>는 성역할을 바꾸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코믹하게 다루기는 하지만, 동성애 코드에 대해서는 별다른 흔적이 없다. 당시는 미국이나 한국 어디에도 오늘날과 같은 동성애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도 코믹 캐릭터로 주목받던 잭 레몬이나 구봉서를 앞세운 것은 코미디 영화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겠다는 것으로 읽히는 부분이다.
미국영화 중 동성애 문제를 영화의 주요 소재로 삼은 경우로는 <광란자>(1980)를 들 수 있다. 뉴욕 동성애 구역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수시하던 경찰은 수사를 위해 신참 형사 스티브 번스를 게이로 위장시켜 법인에게 접근한다. 가까이서 바라본 게이들의 세계는 기괴하면서도 독특하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게이 세계의 깊숙한 모습이 드러나고. 스티브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의문을 갖는다.
흥행이 크게 되지는 않았지만 할리우드 주류 영화계에서 동성애를 소재로 삼았다는 사실만으로 상당한 비난과 반발을 감수해야 했다.
<버드케이지>(1996)는 동성 부부와 그들의 아들이 어느날 여자 친구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경우다. 그들 부부가 운영하는 게이바 ‘버드케이지’는 미국 플로리다 일대에서는 유명한 명소. 아들 여자 친구의 아버지는 윤리회라는 조직을 만들 정도로 보수적인 정치가로서 딸의 결혼이 혹시라도 자신의 정치 행보에 재선에 방해가 될까 노심초사한다.
여자 친구는 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남자 친구의 아버지가 유럽의 명문 집안의 후손이며 외교 사절이라고 돌려막기를 한다. 여자 친구 어머니는 그 말에 솔깃해 남편을 설득한다. 좋은 가문의 아들과 결혼하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고 선거에 좋다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 의원과 그 가족은 언론을 피해 예비 사돈 집을 찾겠다는 통보를 하게 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집안을 모두 다시 장식하게 된다. 게이 집안이라는 인상을 지우고 정상적인 가족인 것처럼 위장해야 한다. 본격적인 소동이 시작된다.
이 안 감독이 <결혼피로연> <브로크백마운틴> 같은 동성애 영화를 만들었지만, 중국의 첸카이거, 홍콩의 왕가이 같은 감독도 오래 전에 동성애 소재를 다뤘다. 첸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198 )는 중국 경극 ‘패왕별희’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중국 현대사의 변천을 다룬 경우다. 경극 ‘패왕별희’의 우희(여자) 역할은 남자 배우가 담당하는 것은 오랜 전통. 항우와 우희 역할을 맡은 배우 사이에서 동성애적 사랑이 싹튼다. 중국의 문화혁명은 그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
왕가이 감독의 <해피투게더>는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지는 게이 연인들의 고독과 허무를 탱고 리듬과 곁들여 비장하게 그려낸다. 게이 문화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보다 처연한 허무와 고독을 묘사한다.
<토탈이클립스>(1995)는 19세기 실존했던 시인 베를렌느와 랭보의 특별한 연애를 다룬다. 베를렌느가 위대한 시인이라면 랭보는 가히 혁명적인 천재라고 평가받는 인물. 천재만이 언어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베를렌느에게 16세 소년 랭보는 충격과 경탄에 이르게 한다. 비록 그가 남자라 하더라도 기우는 감정을 막을 수 없다.
여자 동성애를 다룬 <블루>와 <캐롤>
이들 영화들이 게이 영화의 면모를 드러낸 것이라면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 <캐롤>(2016)은 여자들의 동성애를 다룬 경우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문학소녀 여고생과 미술학도 대학생 간의 이끌림을, <캐롤>은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백화점 점원 테레즈와 손님으로 찾아온 캐롤은 거부하기 어려운 이끌림에 빠져든다. 하나뿐인 딸을 두고 이혼 소송 중인 캐롤과 헌신적인 남자 친구가 있지만 확신이 없던 테레즈, 각자의 상황을 잊을 만큼 통제할 수 없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감정의 혼란 속에서 둘은 인생의 후반부에 찾아온 마지막 사랑이라는 것을 느낀다.
한국 영화 중 동성애의 당혹감을 그린 영화의 시작은 <내일로 흐르는 강>(1996)이라고 할 수 있다. 2부로 구성된 이 영화는 1부에서 6·25 전쟁 후 가난하던 시절, 본처가 있는 남자에게 재가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가족 관계의 얽히고 설키는 과정에서 쌓이는 감정의 기복을 다루고 2부에서는 중년으로 성장한 남자가 게이바에서 만난 남자 친구와 겪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드러낸다. 정상적인 가족을 꾸미는 것을 바라면서도 동성에게 빠져드는 자신의 감정을 어쩌지 못한 채 결국 친구 어머니 칠순 잔치에서 동성친구를 연인이라고 공개적으로 소개한다. 예상외의 선언에 친구들은 당황한다.
<로드무비>(2002)는 동성애 감정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떠돌이 대식은 남자를 사랑하는 게이다. 어느 날 거리에서, 술에 취해 쓰러져 괴로워하는 석원을 만난다. 증권사의 유능한 펀드매니저였지만 주가폭락으로 일순에 거리로 나앉게 된 처지다. 대식은 만신창이가 된 석원을 돌봐주고, 석원은 하루하루 대식에게 익숙해져 간다.
그들은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여행 도중 바닷가 변두리 마을로 흘러든 그들 앞에, 도발적인 여자 일주가 나타난다. 일주는 대식을 사랑하게 되고, 한사코 뿌리치는 대식을 따라 그들의 여행에 합류한다.
석원은 대식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를 경멸한다. 그런 석원에게 떠나달라고 다그치는 일주, 그리고 석원이 떠날까봐 불안한 대식. 엇갈린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세 사람은 불편한 여행을 계속한다.
제목이 ‘로드무비’이지만 영화의 구성도 여행길을 따라 펼쳐진다. 동성애 소재 영화 중에서, 여자가 등장하는 점에서 독특한 면을 보인다.
1천만 관객 기록을 세웠던 <왕의 남자>(2005)도 <패왕별희>처럼 사당패들의 동성 연애를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 연산군 시절, 남사당패의 꼭두 장생과 동료이자 친구인 공길, 왕과 애첩 장녹수 사이에서 벌어지는 애증과 광기를 묘사한다. 연산군이 공길에게 마음을 빼앗기며 가까이 하자 장생은 장생대로, 장녹수는 녹수대로 시기와 질투에 몸을 떤다.
이후 한국영화에서는 <후회하지 않아>(2006), <서양골동과자점-앤티크>(2008) <소년, 소년을 만나다>(2008) 같은 영화들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모두 동성애에 빠져드는 캐릭터를 통해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라고 받아들이거나, 당혹스런 소란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그만그만한 수준이다.
최근의 경우로는 지난해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아가씨>. 어느 부잣집 상속녀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미인계를 쓴다는 내용인데, 미인계라는 것이 부자 마나님에게 도발적인 하녀를 소개해주고, 그 하녀가 주인의 혼을 뺀다는 것이다.
여자들 간의 동성애를 다뤘지만, 본격적인 동성애 영화라기보다는 소재 측면에서 색다른 관심을 모으려 했던 경우로 남는 정도다. 동성애 소재 영화가 드문드문 등장하는 것은 소재가 갖는 이질성이나 거부감 등으로 인해 주류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기에는 부담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의 등장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대상도 남자 동성뿐 아니라 여자 동성, 더 나아가서는 양성애자로까지 확대될 가능성도 크다. 영화니까 별 문제 없다고 할 수도, 무조건 안 된다고 반대할 수도 없는 어려운 문제다. 다만 동성애에 대한 우려가 높아질수록, 동성애 영화들은 운동적 수단으로 영화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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