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없는 문화제
대한민국은 저항과 항쟁이 문화인 아주 재미있는 나라다(정말 재미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긴 역사 자체를 인민의 저항과 항쟁의 이어달리기로 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저항과 항쟁 중 최고인 게 5ㆍ18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5ㆍ18을 쳐 보면 문화제가 줄줄이 딸려 나온다. 해마다 5월이 오면 전국 각지에서 5ㆍ18을 테마로 한 문화제가 열린다. 그렇다면 5ㆍ18은 대한민국의 문화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맞다. 그러나 5ㆍ18은 386의 문화이고 반(反) 대한민국 문화다. 대학 때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라는 놀이가 있었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도 종종 바꿔 불렀는데 그 바꾼 가사는 이렇다. “언제나 돌아오는 5월은 나에게 힘을 주지만 5ㆍ16, 5ㆍ17은 싫어요. 나를 울려요.” 부르고 나면 최루탄이 터지고 진짜로 눈물이 났다. 386에게 대한민국의 역사는 동학 → 상해 임정 → 해방 → 4ㆍ3 → 6ㆍ25 → 4ㆍ19 → 6ㆍ3 → 전태일 → 5ㆍ18 → 6월 항쟁이다.
그 나머지는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패배한 기록일 뿐이다. 어디에도 대한민국은 없다. 대한민국이 없는 대한민국 역사라.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매우 가능하며 몹시 당연하다는 답변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굴러가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사회주의, 군중 민주주의, 산업화 세력의 혼숙
대한민국에는 세 개의 세력이 모여 산다. 옹기종기, 오순도순 아니다. 사이가 좋지는 않다. 사소하게 경쟁하며 소폭으로 갈등하는 관계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최근 들어 서로 각을 세우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상황으로 악화됐다. 하나는 사회주의 세력이다. 대략 1910년 무렵 한반도에 상륙했다.
또 하나는 민주주의 세력이다. 50년대 말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마지막이 산업화 세력이다. 60년대부터 태동된 자생적인 세력으로 한동안 앞의 두 세력을 강력하게 압박하며 한반도 최고의 세력으로 맹위를 떨쳤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세(地勢)에 변화가 찾아왔다. 앞의 둘은 이념이다(정확히 민주주의는 이념은 아니지만 가끔 이념 이상으로 강력하다.
이 글에서 다루는 민주주의는 자유 민주주의가 아닌 인민 민주주의 성격이 더 강한 민주주의를 말한다). 반면 산업화는 이념이 아니다. 산업화 세력은 세대(世代)이고 그래서 그 세대가 저물면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야 하는 운명이다.
그래서 사회주의 세력과 민주주의 세력은 끈질기게 이어지는 반면 산업화 세력은 현재 폐점 직전이다. 이 세 개의 세력은 특정인으로 설명 가능하다. 순서대로 보면 김일성 세력, 김대중 세력 그리고 박정희 세력이다. 세 사람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그들이 남긴 정치적 유산과 유훈은 50년 간 한반도에서 경합을 벌였다.
그 세 사람의 역사가 20세기 중후반 한반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사회주의 세력과 민주주의 세력은 교집합이 많다. 그래서 같이 붙어 다니기도 하고 종종 태그팀을 이뤄 경기에 나서기도 한다. 386이 이해하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들 사회주의 세력과 민주주의 세력이 동의하고 합의 본 역사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아니다.
갈등과 적대
그럼 산업화 세력이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떤 것일까. 해방 → 건국 → 6ㆍ25 → 4ㆍ19 → 5ㆍ16이 산업화 세력이 인정하는 대한민국 역사다(심플해서 좋기는 하다). 어떤 분들은 사회주의 세력, 민주주의 세력의 역사에 건국과 5ㆍ16을 끼어 넣으면 국민 통합도 되고 좋지 않겠냐고 묻는다. 순진도 이 정도면 병이다. 이념이 다른 정치 세력은 절대로 역사를 공유하지 않는다. 가상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현직 대통령이 5월 16일에 박정희 묘소를 참배하고 5월 18일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양쪽에서 돌이 날아 올 것이고 우리는 대통령 선거를 또 치러야 한다. 대통령이 5ㆍ18 기념 행사에서 손을 맞잡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했다는 것은 산업화 세력이 사회주의, 민주주의 세력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 낼 필요 없다.
저마다 다른 노래
어차피 정치는 포섭이다. 하고자 하는,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달리기 위해 자기 세력을 넓히는 게 정치다. 사회주의, 민주주의 세력은 세력을 확장했고 정당하게 자기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다. 진 쪽은 그냥 보면 된다. 너무 과하게 이념적이지 않느냐고 하실지 모르겠다. 되묻는다. 역사를 공유하지 않는 민족이 가능할까. 대한민국은 땅만 함께 나눠 쓰는 세 개의 세력이 모여 사는 나라다.
모든 정치 세력은 자신만의 노래를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 세력의 노래는 ‘아침 이슬’이다. 산업화 세력의 주제곡은 ‘새마을 노래’다. 그리고 사회주의 세력의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각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알고 있는가를 통해 세 정치 세력의 판도를 짚어볼 수 있다고 하면 너무 과다한 주장일까. 민주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은 노래를 공유한다.
그래서 ‘아침 이슬’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이어 부른다. 노래의 서사적 구조도 ‘케미’가 좋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에서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로 주체의 인식과 행위에 발전적 전개가 있다. 혼자 가는 게 아니라 이제는 같이, 그리고 뒤에 남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따르라 외친다. 감동이다.
‘새마을 노래’는 어떤가. 일단 가사가 초현실주의적이다. 더 이상 ‘새벽종’은 울리지 않는다. 산업화가 새벽이라는 개념을 없애 버렸다. 24시간 돌아가는 나라에 따로 새벽이랄 게 있을 리 없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도 마찬가지다.
다 없어진 것들이다.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에게 초가집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산업화 세력은 부를 노래가 없다. 그저 ‘아침 이슬’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으며 멍하게 손가락만 빨고 있을 뿐이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고개를 갸우뚱하며.
산업화 세력을 정치로 옮겨 놓은 것이 이른바 보수다. 보수를 표방하는 정치인들은 보수의 가치를 다시 세우고 어쩌고 하면서 지지를 호소한다. 대한민국 보수는 대체 무엇일까. 보수의 가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바로 답할 수 있는 정치인이 몇이나 있을까. 거의 없다고 본다. 제대로, 정확하게 말씀드리겠다.
좌파들의 교육과 문화는 정치활동
대한민국 보수는 반공(反共)이다. 반공이라고 하니 기겁을 하실지 모르겠다. 공산주의를 때려잡자는 이야기로 알아듣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보수는 이름은 있으나 실체가 없는 산업화 세력의 지워져가는 그림자다. 반공은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만을 뜻하지 않는다.
공산주의가 타고 들어오는 최고의 경로가 가난과 빈곤이다. 가난과 빈곤을 몰아내고 전체주의적 사고가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훼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그 기본이 되는 시장경제를 지키는 게 반공이다. 그러니까 가난과 빈곤의 퇴치는 일종의 체제유지비용이다.
이것을 처음부터 주장한 사람이 박정희다. 그리고 그 주장의 현실적 실현이 5ㆍ16 이었다. 해서 대한민국 보수의 가치는 반공이고 궁극적으로 박정희주의다. 이는 사회주의 세력, 민주주의 세력이 끊임없이 박정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결사적으로 노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헤게모니는 주도권, 지배를 뜻한다. 사회주의, 민주주의 세력은 정치로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 이들의 지배하는 방식이 교육과 문화다. 정치 세력의 확장을 위해 이들은 끊임없이 교육하고 문화를 그 교재로 삼는다. 전교조의 해괴한 역사 교육이 직유법이라면 문화 전반의 프로파간다는 은유법이다.
관객 천만 명을 돌파한 ‘부산행’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초반에 좀비로 변한 군인들이 시민들을 덮치는 것은 5ㆍ18에 대한 명백한 은유다. 영화 끝에는 난데없이 하와이 민요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4ㆍ19로 망명당한 이승만에 대한 은유다. 그러니까 ‘부산행’은 거꾸로 되짚어보는 대한민국 현대사인 것이다.
이것이 사회주의, 민주주의 세력이 주장하고 알리고 싶고 아이들의 머릿속에 심고 싶은 대한민국 역사다. 문화에 대한 이런 헤게모니는 이제 반박이 불가능해 보인다. 건국 이후 무려 반세기 동안 산업화 세력을 공략한 시간과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예로만 이 잡지의 전부를 채울 자신이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합창으로 5ㆍ18의 문화적 성취는 끝난 것일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제 겨우 시작이다. 5ㆍ18은 이제껏 단타만 날렸다. 여름 개봉 예정인 송강호 주연의 ‘택시 운전사’도 이런 계열의 작품이다(12월 대선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는데 5월 대선으로 맥이 빠져 흥행에서 재미는 좀 덜 볼 것 같다. 뭐 반대일수도 있겠지만). 조금 있으면 초강력 훅이 복부를 강타할 것이다.
이어 살인적인 스트레이트 펀치가 산업화 세력의 안면에 작렬할 것이다. 이제껏 5ㆍ18의 주인공은 일반 시민들이었다. 약간씩 캐릭터가 선보이기는 했지만 5ㆍ18지도부에 대한 본격적인 묘사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 때가 됐다.
주인공은 누구일까. 윤상원일까 박남선일까 박관현일까. 누구라도 상관없다. 주인공이 민주주의를 위해 비장하게 산화하는 순간 스크린에 당당하게 울려 퍼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상상해보시라. 그게 관객들에게는 역사가 된다.
공수부대원이 시민의 머리를 가격하는 순간 배경으로 깔리는 ‘오월의 노래’를 떠올려 보시라. 특히 ‘두부처럼 잘려 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대목이 그렇다. 순간적으로 관객의 머릿속에서는 타격 부위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 가면서 유언비어는 사실이 된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젖가슴이 잘려나간 여성이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시민권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영화로 끝날까. 그렇게 보신다면 참 단순한 분이다. 뮤지컬도 있고 음반 시장도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사방에서 듣게 만드는 것이 이 노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최종 목적이다. 물론 주요 타격 목표는 산업화 세력과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역사다.
5·18은 386 세대의 이념적 기반
5ㆍ18은 철저하게 386의 문화다. 겪은 건 광주 사람들인데 왜 386이 그걸 가져가느냐 물으실 수 있겠다. 이유는 386이 철저하게 5ㆍ18을 기반으로 성장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졸저(拙著) ‘굳빠이 386’에서 논한 바 있는데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어 일부를 그냥 옮긴다.
‘386 운동권은 6·25 전쟁 이후 꾸준하게 명맥을 이어온 남한 좌익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으며(실은 이 뿌리는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둘째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미 1950년대부터 학습되기 시작한 운동권의 기본 커리큘럼이었다. 5ㆍ18의 진정한 의미는 따로 있다.
바로 좌익 운동권에게 ‘대중’이라는 선물을 안겨준 것이다. 이전까지 남한 좌익 운동권의 숙원은 혁명적 전위정당의 결성이었다. 실제로 몇 번 만들었다. 뭐 큰 역할을 하거나 위협적이라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 등이 그것들이다. 문제는 당시에는 전위정당을 만들어봐야 막상 지도할 대중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좌익운동은 그 색깔을 잃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운동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5ㆍ18로 인해 굳이 포섭하지 않아도 알아서 협조해주는 어마어마한 대중 자원(資源)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두려움 때문에 운동에 투신하지 못했던 분위기가 일소되면서 좌익분자들을 양산할 수 있는 최적의 시스템이 갖추어졌다. 해방 이후 최고조로 타올랐던 좌익 운동, 그래서 감히 소생은 386 운동권을 남한 좌익 운동의 절정이라고 부른다.’
이후 386은 자신들을 키워낸 자양분인 5ㆍ18을 그들의 고유한 문화로 만들었다. 이 문화는 80년대 10년 동안 꾸준히 증폭작용을 하며 완성도를 높이고 대중적으로 그 폭을 확산시켜왔다.
5ㆍ18은 남한의 좌익 운동권에게 혁명의 마중물이자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당연히 영화, 노래, 문학의 소재로 두루 활용되었다. 그래서 5ㆍ18은 문화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문화는 아니라는 모순적이고 이중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는 학술이나 논쟁의 영역이 아니다.
▲ (그림 1) 6월 항쟁 30주년 기념 전시회 포스터 |
5ㆍ18은 철저히 정치의 영역이다. 정치의 영역에서 승리한 쪽이 그 문화적 헤게모니를 갖는 것이다. 대통령이 공언한 대로 5ㆍ18이 헌법 전문에 들어가는 순간 5ㆍ18은 한 시대의 기억을 넘어 시대정신이 될 것이다. 산업화 세력은 그 정치의 영역에서 패배했다. 패배는 ‘감수(甘受)’를 의미한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다.
대한민국 역사는 반외세, 반독재 민족자주화 투쟁 과정
얼마 전 광주시립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를 보면 산업화 세력이 받아들여야 할 역사와 화가 어떤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안내 포스터다.(그림 1)
이상호, 전정호는 조선대 미대 82학번으로 85년 ‘시각매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민중미술 운동을 펼친 사람들이다. 이 전시회는 이들의 작품뿐 아니라 이들이 복원한 80년대의 걸개그림 등으로 채워져 있다. 몇 개만 보자.
‘죽창가’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김남주의 시를 함께 담은 그림이다(시의 원 제목은 ‘노래’)(그림 2). 죽창과 낫이라는 오브제가 등장한다. 이 죽창과 낫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어머니의 땅’(그림 3)이라는 작품을 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 (그림 2) 죽창가 |
유사한 것들을 많이 보셨을 것이기에 그림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근데 어머니가 좀 무섭게 생겼다). 그리고 이 꾸준하게 외세와 싸워 온 민족의 ‘역사’는 이 한 장의 그림으로 최종 완성된다.
▲ (그림 3) 어머니의 땅 |
제목은 ‘혁명 광주’(그림 4)다. 광주라고는 했지만 그림 중 일부는 4ㆍ19를 연상 시키고 그 이전의 민중, 민족 항쟁을 떠올리는 부분도 있다. 결국 반외세, 반독재 민족자주화 투쟁으로 본 대한민국의 역사다. 이게 바로 5ㆍ18 문화다. 이제 이런 그림과 정서를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
▲ (그림 4) 혁명광주 |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이런 그림들을 보여 줄 것이다. 중고생들에게는 광장으로 수틀리면 광장으로 뛰쳐나와 정권을 타도하라 가르칠 것이다. 정치 투쟁에서 지면 이런 일이 생긴다.
이런 걸 문화라고, 역사라고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독일의 광산도 없고 베트남의 정글도 없고 중동의 건설현장도 없고 미포항의 거대한 선박도 없다. 산업화 세력에게는 그들의 존재 증명이 되는 그 모든 것이 하나도 없다. 단 하나도.
정치는 포섭, 보수의 완패
솔직히 나는 이런 글 자체가 지겹고 싫다. 패인의 이유와 패인의 역사를 곱씹는 것도 지겹고 별로 보이지도 않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도 지친다. 이 짧은 글에서는 그저 다만 5ㆍ18 문화가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만 정리했을 뿐이다.
이겼으니까 그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다(당연히 산업화 세력도 5ㆍ16문화제 같은 거 할 수 있다. 그 의미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겠지만). 다시 말하지만 정치는 포섭이다. 깡그리 역사를 부정당하지 않으려면 싫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아니면 참고 살든가. 문화전쟁, 역사전쟁은 재미로 할 성질이 아니다. 죽기 살기로 해서 이겨야 정치투쟁에서의 승리로 이어갈 수 있다. 산업화 세력은 지난 10년 간 아무것도 안 했다. 그러면 닥치고 살아야 한다.
참고로 사회주의 세력, 민주주의 세력, 산업화 세력은 송복 선생이 자주 이야기하는 ‘한 민족 세 혈맥’이다. 출간을 앞두고 있는 <박정희 깨기(가제)>에 자세한 설명이 담겨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재미있는 것은 사회주의, 민주주의 세력도 현 상황을 똑같이 이해한다는 것이다. 다른 게 있다면 좌익 세력은 매우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것 정도겠다. 슬슬 해가 진다. 날이 바뀌고 새 날이 밝으면 산업화 세력은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 2017년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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