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이른바 ‘팩션’에 해당한다. 전태일은 청계 피복 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착취되고 있는 것에 분노해 분신한 것이 아니라, 외부세력의 조직적인 세뇌 학습과 노동주의 계급론 이데올로기 주입이 만든 ‘잘못된 세계관’에 의해 희생되었을 가능성은 여러 연구에서 드러났다.
이러한 점은 일찍이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쓴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에서 암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더 많은 연구가 이뤄질 것으로 생각되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전태일은 노동교육 의식화의 희생자
전태일 분신의 문제는 당시 사회경제적 구조로는 이해되기 어려운 점이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70년대 의류·피복산업이 전개되던 양상과 전태일의 인식 간에 ‘인지 부조화’가 있었다는 점이며, 그렇기에 전태일의 분신자살이 이데올로기 학습과 주입에 의한 충동적 행동이었거나 또는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점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자유주의 경제학자 미제스는 <인간행동론>에서 인간이 행동하는 이유를 ‘현실에 대한 개선 욕구’로 파악했다. 즉 인간은 현실에서 무언가 만족하지 않기에 행동하며 만일 현실에 만족하거나 개선의 의지를 포기하게 되면 행동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70년대에 왜 그렇게 많은 시골의 청소년들이 저임금과 착취의 대상이었다고 주장되는 공장 근로자가 되기 위해 도시로 몰려 들었던가 하는 의문을 가져봐야 한다. 미제스의 인간행동론의 전제가 옳다면, 그들은 시골에서의 삶보다 도시에서 노동자로 사는 것이 자신의 현실을 개선하는 데 더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으며, 만일 도시에서 노동자로 사는 삶이 자신의 처지를 개선시키지 못한다고 생각되었다면 왜 그들 대부분은 다시 시골로 돌아가지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동시에 그들이 어떻게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가져봐야 한다.
위 그래프의 70년대 상황을 보면, 근로자들의 평균 실질임금은 노동생산성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다. 실질임금이 노동생산성보다 높았다는 사실은 당시 근로자들은 물가로 평가했을 때 충분한 임금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류석춘 교수가 이미 <전태일 평전>에서 전태일이 일기장에 남긴 자신의 임금 변화 추이를 면밀하고 충분하게 검토한 내용과 일치한다. 전태일은 결코 자신의 임금이 낮았던 것에 불만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위의 그래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동아시아에서 70년대 이후 빈곤율은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의 70년대에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였으므로 이 지역에서 빈곤율의 급격한 하락은 한국, 일본, 대만의 경우가 된다. 다만 70년대에 일본은 이미 고도성장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 이 빈곤율 감소의 주인공은 한국과 대만의 것이라 할 수 있다. 70년대 산업을 주도했던 경공업, 특히 섬유.피복산업에서 노동착취나 저임금의 체계가 고착되었다는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말해주는 또 다른 근거라 할 수 있다.
한국의 70년대는 기회의 시대
전태일 역시 저임금을 비난했던 것이 아니라 미싱 시다로 일하는 어린 여공들의 비참한 노동환경을 내세우며 분신했다. 이 부분에서 전태일이 인지부조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시골에서 상경한 어린 여공들은 자신이 재봉일을 배운다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지 가난을 탈출하는 모습은 외견상 비참함을 동반한다. 오히려 가난 그 자체를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면 외견상 드러나는 사람들의 생활은 평화롭고 한가롭다. 우리는 부탄이나 티베트의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음을 보지만, 사실 그들은 가난을 받아들이고 극복할 의지가 없기에 그렇다.
만일 부탄이나 티베트 국민들이 어느날 ‘우리도 가난에서 탈출해 잘 살아보자’고 결심한다면 그 과정은 과거의 평화롭고 한가한 모습이 아니라 생지옥을 방불케 하고도 남을 것이다. 상상이 되지 않는다면 가난한 시골과 부유한 도시의 아침을 비교해 보자. 같은 아침 시간대에 가난한 시골의 버스는 한적하다.
하지만 도시의 버스는 지옥이다. 그 이유는 도시에 사는 이들이 직장을 갖고 있고 소득이 있기에 출근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콩나물 지옥철과 만원 버스에 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차량 안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때문에 ‘이들은 불행하다’고 평가하다면 맞는 것일까. 만일 이들에게 도시의 삶이 고통스러우니 시골로 돌아가서 살라고 하면 맞는 소리일까.
한국의 70년대가 그랬다. 14살 안팎의 시골 청소년들이 서울을 비롯해 부산과 같은 대도시로 쏟아져 들어왔다. 대개 학력은 국졸이었고 중졸이면 다행, 고졸은 고학력이었다. 14살 소녀들은 공장에 취업해 시다로서 재봉일을 배우면 그 자부심이 대단했다.
오늘날 잘나가는 IT기업에 취업하는 정도의 자부심들이었다. 실제로 70년대 의류, 피복 산업은 폭발적인 수요를 만나 내수를 주도하고 있었다. 기계 장치 산업과 같은 분야에는 고도의 자본 축적이 필요했지만, 섬유, 의복과 같은 경공업 산업은 재봉틀 몇 대만 있어도 일감을 받아 사업이 가능했기에 소자본 자영업자들의 무대였다.
그러한 상황은 정보통신산업 발흥기에 컴퓨터만 있으면 누구나 IT 사업에 뛰어들 수 있는 것과 같았다. IT산업의 발흥기에 소규모 벤처를 경영하던 이들이 다름 아닌 IT기술 엔지니어들이었던 것처럼 의류, 피복 산업 성업기에 자영업 소상공인들은 바로 시다에서 재봉사로, 그리고 재단사로 숙련공이 되면서 자본을 축적한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청계 피복시장을 중심으로 몰려 있었다. 전태일은 그런 환경에서 잘나가던 재봉사 숙련공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임금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한 산업에 무한한 공급자와 무한한 수요자들이 만나면 분업의 고도화가 이뤄진다는 경제의 원리다. 제품의 생산에서 분업화가 촉진될수록 더 효율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런 분업화 과정에서 미숙련공들은 단순한 작업을 하게 되고 따라서 임금도 처음에는 낮을 수 밖에 없다. 청계 피복시장에 몰려 있는 소규모 자영업자들에 고용된 미싱 시다의 경우 식사와 주거는 고용자에 의해 해결되는 대신 교통비 정도의 임금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이 부분을 많이 오해해서 당시 청계 피복 근로자들 가운데 시다의 월급이 현재 시세로 10만 원이니 5만 원이니 하는 분석은 당시의 관습적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시다들은 그렇게 일을 배우면서 재봉사로 또 재단사로 올라가게 되고, 그러한 가운데 임금도 급격하게 올라갔다. 이는 의류, 피복 자영업자들에게도 숙련공이 그 만큼 필요했고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의류, 피복 근로자들이 착취를 당하고 있는 상태라면 이 산업분야에서 그렇게 많은 근로자 출신들이 영세하나마 자영업자가 되었을 수가 없다. 재봉사, 재단사가 되면 임금을 저축해 자본으로 전환시켜 재봉틀을 여러 대 사서 사장님이 될 수 있는 조건이 가능했다는 이야기이고, 그러한 상황은 위의 그래프에서 70년대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이 노동생산성을 초과하고 있었다는 점이 뒷받침한다. 즉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돈을 모을 수 있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시기에 근로자들은 강한 저축 의욕을 갖게 되고, 저축이란 소비를 줄이는 것이기에 그들의 삶은 안 먹고, 안 쓰게 된다. 오늘 우리의 소비나 지출 행태를 70년대 근로자들과 일치시키면 그것은 오류다. 따라서 오늘 소비가 미덕인 우리의 시각으로 이들 70년대 근로자들을 본다면 그 생활이 곤궁하거나 비참하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들은 미제스가 말한 대로 ‘더 나은 현실’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면 나와 가족들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전태일은 어린 소녀들이 시다로서 일하는 그런 상황을 가엾고 비참하게 여겼다는 것일까. 이 점에서 전태일이 일기에 남긴 글들이 사실이라면 전태일은 현실과 자기 세계관 사이에 인지 부조화가 일어났으며, 그러한 인지 부조화를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알린스키의 운동노선을 따라 “외부세력이 접근한 현장의 하나가 전태일 분신사건”이라는 증언이나 “전태일은 지금 미국 샌디에고에 있는 이승종 목사가 교육시켰다”는 해설 때문이다. 전태일이 처음부터 어린 시다 여공들의 삶을 사회적 모순이나 불의로 여겼던 것은 아니다.
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이 외부세력에 의해 의식화가 된 후, 그가 자신의 세계관을 재정립하는 가운데 고백적으로 썼을 가능성이 높다. 즉 전태일은 노동주의 이념에 따라 자신의 가치관을 재구성했고, 세계는 이제 전태일 자신이 재구축한 그 이념의 창을 통해 변형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조영래는 다시 자신의 이념과 가치관으로 전태일의 일기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전태일 평전>은 객관적 현실 세계와는 관계가 없는 일종의 종교서적이 되고야 말았다.
▲ <전태일 평전>이 ‘노동운동의 마태복음’처럼 그 위상이 공고해진 것은 역시 그를 세뇌시키고 의식화 시켰던 세력들의 ‘설정’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팩트와 상상의 조합으로 텍스트화 된 환단고기를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재생산하던 매커니즘과 유사하다.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 포스터 |
‘전태일신화’는 허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태일 평전>이 노동운동의 마태복음처럼 그 위상이 공고해진 것은 역시 그를 세뇌시키고 의식화시켰던 세력들의 ‘설정’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팩트와 상상의 조합으로 텍스트화 된 환단고기를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재생산하던 메커니즘과 유사하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역사적 모순으로 정의해야 하는 민족주의자들에게 환단고기가 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전태일 평전> 역시 팩트와 상상의 조합물이지만 어떻든 신성한 노동교(勞動敎)주의자들에게는 입문서이자 복음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들이 노동주의를 종교현상의 반열에 놓게 되는 이유는 자본주의를 악(惡)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선인지, 악인지는 그것을 해석하는 이의 주관에 달려 있다. 주관이란 객관을 범주화하는 인지의 메커니즘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믿는 대로 세상을 해석하고 또 구성하게 된다.
자본주의가 악인지, 선인지 그러한 해석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그 범주 내의 담론이나 논증으로는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지나온 역사의 모습들이, 그리고 현재의 모습들이 그러한 담론과 논증과 모순율을 갖느냐 아니냐로 판별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세계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가난을 탈출해 왔다. 누구도 그 점에 대해 부정하지 못한다. 다만 노벨 경제학 수상자 앵거스 디튼이 지적한 것처럼 가난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소득의 불평등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전태일이 70년대를 살면서 지금 우리가 느끼는 소득 불평등을 느끼고 있었다면 그것은 일반 민중적 시각이 아니라, 계급론에 의해 의식화된 세계관 때문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70년대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과 사회의 민중들은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일을 했다. 전태일이 가엾게 여긴 어린 미싱 시다 여공들 역시 고단한 삶을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고단함 때문에 현실을 부정하거나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당시 유행했던 남진, 나훈아의 극렬한 팬들이었으며 저축한 돈으로 결혼을 해서 집을 마련하고 자녀를 키우고 부모를 부양해서 오늘 우리를 있게 한 당당한 역사의 주인공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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