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갑 국민행동본부 본부장
故 김상철 변호사가 별세한 지도 어느덧 1년이 돼 갑니다. 제 개인적으로 고인과 인연이 깊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보 상황이 쉽지 않기에 김 변호사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저와 고인의 인연은 16년 전인 97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저는 ‘밝고힘찬나라운동’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으며 故김상철 변호사는 이 단체의 집행위원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이어 2001년 1월에는 고인과 함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미래지도자 양성과정인 '21세기 청년아카데미'를 개소했습니다.
저는 고인과 '애국'이라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2000년 6‧15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지나치게 해이해진 데 대해 고인도 저도 크게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으로 인해 우리는 애국운동의 동지가 됐던 것 같습니다.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가 집권한 2003년 2월. 국가 안보에 대한 우리의 걱정은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故김상철 변호사를 비롯해 조갑제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 허문도 전 장관, 김한식 목사와 함께 반핵반김 국민협의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애국진영에서 신망이 두텁던 고인은 초대 운영위원장으로 추대됐습니다.
결국 2003년 3월 1일에 우리는 역대 최대 규모의 애국집회를 열었습니다. 2002년 11월과 12월까지 반미집회가 연일 열렸던 시청앞 광장은 태극기와 애국가의 물결로 가득 찼습니다. 당시 저는 이 역사적인 현장에서 홍보위원장으로서 김상철 변호사를 보좌했습니다.
이후 김 변호사는 저의 시국 관련 각종 민형사 사건들에 대해 성심어린 자문을 아끼지 않았고 무려 변론까지 나섰습니다. 특히 2004년 9월에 제가 노무현 정부에 의해 ‘내란선동’이라는 턱도 없는 누명을 쓰고 양천동 대공분실에 소환됐을 때 고인은 대공분실까지 저와 동행해서 직접 변론을 해줬습니다.
그 은혜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 변호사는 애국 언론인 ‘미래한국’의 초대 발행인으로서 제가 운영 중인 국민행동본부의 활동을 국민들에게 홍보하는 일에도 적극 도와주셨습니다.
그 분은 저의 은인이며 동지이자 조력자였습니다. 천상에 먼저 가진 고인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명복을 빕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저작권자 © 미래한국 Weekl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