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적화를 막아낸 義人
한국 사회의 적화를 막아낸 義人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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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우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 · 전 통일원 차관
故김상철 변호사는 분단됐던 한반도가 순리대로 통일되는 날 가장 위대한 의인으로 평가될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 한국사회의 적화가 먼저 될 것인가, 북한정권의 붕괴가 먼저 될 것인가 하는 심각한 우려가 있었다. 지금은 일반 국민들도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이나 이정희 등의 반국가적 언행을 통해 종북좌파의 실상을 소상하게 알게 됐다. 이제 한반도의 운명은 순리대로 자유민주주의적인 통일로 귀결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생 독립국 중 유일하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함께 성공시킨 데는 굳건한 한미동맹이 뒷받침이 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미동맹이 ‘우리민족끼리’라는 북한정권의 슬로건을 내세우는 세력에 의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햇볕정책이라는 우산을 들고 한미동맹을 약화시켰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전시작전권 이양 문제를 둘러싸고 한·미간에 일어났던 이상한 관계는 바로 미군 철수라는 북한의 목표 추구와 밀접하게 연계된 것으로 보면 이상할 것이 없다.
 
전후 이라크 재건본부에서 미군과 NATO군, 일본 PKO부대 사이에 원활하게 공유되는 정보가 한국군부대에는 제한됐던 이유가 있다. 공유하는 정보가 적들에게 넘어갈 위험성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햇볕정책 당시 한국 정부의 신뢰 추락은 극에 달했다.
 
그 당시 상황은 마치 김정일이라는 독재자가 풍요로운 한국 사회라는 어장에 그물을 던져 버글버글하는 잉어들을 잡아서 막 뭍으로 끌어 올리려는 형국이었다. 다행히도 막상 그물에 들어온 물고기를 뭍으로 끌어올리기에는 김정일 자신의 두 다리 근력이 너무 허약했다. 그래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점은 김정일의 그물에 걸린 한국 사회의 잉어들이 뭍에 끌려올라가지 않으려고 요동을 쳐서 김정일로서는 좌절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막아냈다는 사실이다. 잉어에 해당하는 한국 시민사회의 저항이 적화 위협을 막아낸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 선진국과 경쟁하는 기술력, 연간 1천만 명이 넘는 해외여행자, 한류문화의 급부상과 같은 시민사회의 저력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자산이었다. 이러한 한국의 시민사회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역량을 세력화하는 리더가 필요했다. 모래알 같은 애국세력을 윤활유와 접착제로 묶어내는 리더십이 매우 긴요했다.
 
언제나 약자(弱子) 향했던 김상철 회장
 
그 핵심적인 역할을 한 리더가 바로 故김상철 변호사였다. 김 변호사는 필자와는 서울법대 농촌법학회 3년 차이의 선·후배관계였다. 농업인구가 6할 이상을 차지하던 60년대 한국 사회 현실에서 약자의 편이 돼야겠다는 이상주의가 젊은 시절 우리를 묵는 연계 고리였다.
김 변호사는 판사 생활을 마치고 변호사가 돼서도 사회적 약자인 민주화 인사들을 돕는 인권 변호사로 크게 봉사했다. 정치 민주화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대한민국 사회의 정통성을 파괴하고 오히려 북한 편에 서서 반국가활동을 하려는 좌파인사들의 정체를 밝히고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한 건전한 애국 활동의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그가 이끈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한국 사회의 적화 위협을 저지하는 버팀목이 됐다.
 
그러한 시민운동에서 김 변호사는 정확한 사실 판단, 확고한 정책방향 설정, 그리고 빈틈없는 실천 활동을 통해 한국 보수 애국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는 친북적인 좌파운동가들이 가진 모순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 중 하나가 북한인권 문제라는 치명적 약점이었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자유와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투사였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북한 동포들의 심각한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침묵하는 데 대해 환멸과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찌 자신들의 인권에 문제가 있다고 그렇게 격렬하게 외치던 사람들이 북한 독재정권의 폭압정치에 희생되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딴사람인 것처럼 침묵한단 말인가? 햇볕정책 당시 국가인권위원회의 북한인권에 대한 의도적 외면, 북한인권법 통과를 저지하는 국회의원들의 철면피적 언동에 대해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파헤치기 위한 노력은 탈북난민보호 1천만 명 서명운동으로 활성화됐다.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반으로 이 서명운동은 1천만 명 목표를 훨씬 초과하는 성과를 달성했다. 그 서명록을 UN에 제출하고 미국 등 국제사회에 알려 북한 사회의 인권유린 실상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2001년 워싱턴을 방문한 김상철 변호사를 필자도 다시 만나게 됐고 2002년 워싱턴에서 귀국한 후 북한인권시민연합의 활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김 변호사와 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게 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친북 반미적 행태를 보이게 되자 보수인사들은 한국 사회가 적화될까 우려해 더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2005년에는 김상철 변호사의 미래한국 회의실에서 자유지식인 선언을 결성해 국가 정체성을 지키고 북한에 대한 굴종을 피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화했다.
 
6월 25일에 백선엽 장군이 참전용사들과 함께 하는 퍼레이드를 정부 측이 취소시켜 버리자 김 변호사, 서정갑 국민행동본부 본부장이 중심이 돼 전쟁기념관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자발적 시민 행진을 진행했다.
 
그 당시 경찰이나 군의 중간 간부들이 이 행진을 마음속으로 응원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 흰머리가 된 동창들에게도 호소해 수십 명이 함께 참여했다. 이러한 자발적 시민운동에서 고 김상철 변호사의 중심적 역할은 중요했다.
 
김 변호사는 그 당시 초창기에 있던 ‘미래한국’을 본격적 주간지로 발전시켜 보수 정통언론의 중심에 세워놓았다. 지금도 우리 사회가 갖는 근본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때는 미래한국의 보도와 논평을 반드시 인용하게 된다. 정신적인 지식 창고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지금 다시 되돌아본다. 故김상철 변호사라는 거인이 없었더라면 우리 한국 사회가 적화됐을지도 모른다. 안 됐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가 있었기에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시민세력이 자신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데 구심점이 됐다. 그것이 한국의 위대함으로 이미 증명되고 있다.
 
앞으로 통일이 오면 그때 더 한층 김상철 변호사의 위대함이 다시금 조명될 것이다. 이 기회에 故김상철 변호사의 인권과 통일에 대한 기여에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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