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6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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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상임이사 · 前 경향신문 편집국장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운 인물 한 분을 너무 일찍 잃었다는 아쉬움을 통감합니다. 그는 다재다능한 거목이었고 폭넓은 가슴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안고 살았습니다. 나라가 호사다마의 위기에 처해지는 종북좌파 정권 등장을 목격한 그는 어엿이 일어나 그들의 음모와 흉계를 벗겨내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필자는 아주 특별한 인연으로 그와 교분을 쌓은 후 김상철이 주도하는 크고 작은 조직과 운동에 비교적 많이 참여해 왔습니다. 미래한국의 창간을 도왔고 한미우호협회와 탈북난민보호운동, 자유지식인선언, 국가비상대책협의회의 창설을 비롯해 반핵반김 국민운동과 자유통일북한구원 국민대회와 밝고힘찬나라운동의 핵심 지대에서 그와 함께 일했습니다.
 
이 이외에도 ‘비전126 기도운동’이 씨앗이 된 3‧1절과 6‧25 구국기도회를 여려 차례 시청 앞 광장에서 주관해 잠든 웰빙 우파들을 일깨운 일들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그가 기획하고 추진한 구국운동은 매스컴의 조명을 받지 못한 일들이지만 그 영향력은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탈북난민보호를 위한 1천만 서명운동은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북한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나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한미우호협회의 창립과 미래한국의 창간은 반미친북 성향으로 기우는 세력들을 견제하는 교두보가 됐습니다.
 
그는 이 나라를 저질 좌파로부터 지켜내는 데 목숨을 바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서울시장으로 발탁되자 전국의 좌파들이 벌떼처럼 덤벼들어 온갖 난동을 벌였습니다.
 
낙마한 후의 그는 전보다 더 차원 높은 자유민주수호운동을 다각적으로 전개했었고 잃어버린 10년 동안에 그의 내공은 쌓여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득병해 투병생활로 나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분명하고 강직했던 그의 인품
 
그의 삶을 회상해 보면 서너 가지 뚜렷한 인품이 보입니다.
 
첫째, 그는 부지런했습니다. 새벽을 기도로 깨우고 비전으로 헤치며 밤늦게까지 초인간적인 정력을 쏟았습니다. 그가 주관한 모임의 대부분은 조찬모임이었고 참가자들의 태반은 그보다 연장자들이었습니다. 전직 고관들과 군 장성들도 있었고 청장년 전문인들도 가세했습니다. 아침 일찍 첫 시간을 조국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바친다는 각오가 스며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그는 외유내강의 선비형 투사였습니다. 누구와도 대화와 소통이 가능했고 한국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 같지 않은 겸손과 온유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강인함은 탁상토론이나 대중연설의 정상에서 드러나곤 했습니다. 타협과 양보를 절묘하게 교차하면서도 그의 신념에서 우러나온 소신은 좀처럼 굽히지 않았습니다.
 
특히 좌파에 대한 태도에서 현저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는 예스와 노를 분명히 했습니다. 애매모호한 언어를 싫어했고 언제나 분명하고 선명하게 표현했습니다.
 
셋째, 그는 불우이웃돕기 운동의 초창기에 크고 넓은 초석을 놓았습니다. 풍요속의 빈곤층, 달동네를 구호품을 지고 오르내린 일들을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성경의 가르침대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후학들을 위해 학자금 지원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끝으로 그를 흠모하고 추모하면서 그의 독실한 신앙을 기억합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믿음으로 공사생활을 겸손하게 유지해 왔습니다. 그는 현대 크리스천의 모델이었고 복음을 나타낸 쇼 윈도우였습니다.
 
인간 김상철에 대한 새롭고 다양한 평가가 계속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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