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윤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 前 감사원장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김상철 박사가 2012년 12월 13일 아쉽게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 지 어언 1주기가 돌아왔다. 한 시대의 큰 인물을 잃은 국가적, 사회적 차원의 손실에 다시금 충심으로 애도한다. 김 박사와는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 선후배로서, 같은 법관 생활 그리고 고시계에서의 발행인과 편집위원의 관계 등 깊은 인연이 있고 평소에도 우의를 돈독히 유지하며 가치관을 공유해 온 터이므로 김 박사에 대해 생각나는 바가 많다.
그의 지나온 자취를 보면 서울고 차석 졸업, 서울법대 수석 졸업, 사법시험 차석 합격, 사법연수원 수석 졸업 그리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헌법학으로 법학박사의 취득 등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로 일관했다. 또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초임 출발한 ‘경판’이기도 했다. 원래 사법권이란 삼권분립의 민주정치의 산물이므로 사법권의 독립은 수호해야 할 본질적 가치이다.
김상철 판사는 이러한 법관으로서 투철한 소명의식 때문에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소신 있는 재판을 한 바 있었다. 아마도 김대중 씨와 관련됐던 사건으로 기억되며 재판장 황석연 부장판사, 배석이 김 판사와 대한변협회장을 지낸 박재승 판사였던 것으로 우리나라 사법사(史)에 두고 남을 큰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김 판사는 원주지원으로 좌천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그 이후 김 박사의 자취를 몇 가지 소개한다.
김 박사가 판사직을 떠날 당시에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있던 나를 찾아와 의논하면서 법관직을 떠나야겠다는 뜻을 표했다. 보통 만류하는 것이 예의지만, 잘 생각했다고 오히려 격려를 한 것이 기억난다.
이것은 분명히 ‘영광의 탈출’이라고 보았으며 용이 연못이라는 작은 틀에서 벗어나 바다를 향해 나가는 거보이고 신천지의 전개로 보았기 때문이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변호사 개업과 더불어 인권 변호사로서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서서 그 특유의 재능과 에너지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군부독재의 청산이란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영광의 탈출, 그 이후…
한편 법률잡지가 저조한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고시계’ 잡지를 인수하며 법조계 지원자들에게 길잡이와 청량제의 몫을 이어나갔다. 우리나라 잡지계에서 형식상 편집위원은 있지만 편집회의는 없는 허울뿐인 것이 통례지만 고시계에서는 반드시 김상철 발행인의 주관 하에 월례회의를 열어 중지를 모으는 열정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이제 기억에 새롭다. 법치주의의 인프라를 까는 데 일조한다는 고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춘천지법원장으로 나가면서 편집위원을 그만두게 된 이후의 일이다. 나는 별로 공로도 없었는데 그동안의 내 노고를 치하한다고 저 멀리 소형버스를 빌려 편집위원들을 대동하고 춘천까지 방문해 지난날을 회고하며 회포를 풀어준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에게는 인간미 넘치는 온정이 있었다.
그 바로 전에 내가 서울고법 형사 제1부 재판장을 할 때의 일이다. 당시 장기미제로 끌어만 오던 상도동 김영삼 총재와 동교동 김대중 선생 시국사건을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어 심리에 착수코자 했다. 이를 알고 김 변호사가 변호인단을 대표해 조금만 공판 연기를 간청하는 것이었다.
연기는 됐지만,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서 있는 두 거물을 위해 구성된 대 변호인단의 리더로서 김 변호사가 벌써 부상‧성장된 것에 놀랐다. 그때가 1987년 전반기였는데 미구에 군사독재정권이 물러서고 대통령 직선제에 의한 민주정권의 등장을 예견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로 그 뒤 6‧29선언이 있었고 전두환 군사정권이 물러났기 때문이다.
1992년 YS 문민정부 출범 시에 초대내각을 구성하면서 재야 인물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감사원장으로 이회창 선배와 함께 서울특별시장으로 김상철 박사가 발탁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인사의 백미였다. 그때 YS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주변 평가가 자자했다. 김 박사의 반독재 투쟁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기도 하다.
포퓰리즘 때문에 비록 김 시장의 길은 반전이 됐지만 그 때부터는 좌파와의 투쟁이란 기치 하에 새로운 출발을 했다. 일반 국민 앞에 서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수호를 위해 좌편향의 환상주의자들과 보다 적극적이고 본격적인 투쟁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기에도 탈북자 구호활동, 한미우호협회 결성, 주간지 미래한국 창간 등 중단 없는 활약을 보았다. 대한민국의 기저를 흔드는 세력과 용기 있게 대결하며 이 나라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 애국적이고 희생적인 공헌은 대한민국이 존립하는 한 높이 평가돼야 할 것으로 본다.
지워져선 안될 기억, 그가 남긴 숙제
서울법대 출신 제도권 내 인물은 별론으로 하고, 재야의 파격적 인물로서 세 사람을 꼽은 일이 있다. 한 분이 김택수 전 국회 부의장으로 서울법대 법학도서관을 건립해주신 장학사업가로도 유명한 분이고, 또 한 분은 조영래 변호사로 망원동 수재민 피해를 법정 투쟁으로 구제하는 등 집단소송 변호사의 효시이기도 한 대표적인 인권운동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꼽은 사람이 바로 ‘행동하는 지성’ 김상철 변호사였다. 이 분들은 언젠가 대권을 장악하리라 추단하기도 했었다.
분명한 것은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다. 지난 1월 고시계 잡지에서 내가 김 박사 추모사에서 밝혔지만 왜 세 분 모두를 크게 개화하기 전에 일찍이 떠나게 했는지 하늘이 마냥 야속하고 원망스럽기만 하다. 실로 이 나라 발전에 불행스러운 한 극면이다.
김 시장이 이제 유명을 달리해 하늘나라에 자리를 잡았지만 그 곳에서도 그 집념과 역동성을 멈추지 아니하리라고 본다. 대한민국의 존립·안전과 민주 발전을 간곡하게 신에게 간청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가 집요하게 혼신의 힘을 다해 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정착을 위해 노력한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그가 생전에 다 못한 자유민주주의를 공고하게 수호하고 그 교란 세력을 배격하는 것은 이승에서 살아 있는 우리의 몫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취지에서 출범한 김 박사의 정신과 투지를 기리는 기념사업 동참은 적극 장려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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