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적인 개혁가
열정적인 개혁가
  • 미래한국
  • 승인 2017.05.15 15: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낙인 서울대 법대 교수
열정적인 김상철님은 생전에 다양한 사회활동만큼이나 다양하고 많은 타이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판사, 변호사, 서울시장, 회장, 발행인, 법학박사 등등.
 
언제나 혈기 왕성한 활동가로만 기억되던 김상철 변호사께서 타계하신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더구나 그 많은 일들을 남겨두고 외로이 오래토록 병상에서 투병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더 그러하다. 김 변호사께서는 일찍이 법관직을 그만두고 민주주의의 앞날을 걱정하는 열정적인 변호사로서 활동한 바 있다.
 
민주화 이후에는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열정을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미우호협회 창설, 미래한국신문 창간과 같은 일들이 모두 이와 같은 열정의 산물이다. 그리 크지 않은 변호사 수입을 통째로 투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분의 열정은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40대 서울시장으로 임명된 사실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안으로 7일간의 서울시장을 마감하고 말았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에 그분이 서울시장으로 계속 재임했더라면 소위 복마전이라고 해서 행정청 부패의 온상이라던 서울시에서도 혁신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 있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7일 시장으로 끝을 보고 말았다. 나중에 ‘7일간의 서울시장’이라는 본인의 저서를 통해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면서 경험해야 했던 안타까운 일면들을 잘 들려주셨다.
 
‘교사의 노동자化’ 우려했던 선견지명
 
노태우 대통령 시절 전국교원노동조합 소위 전교조 문제가 헌법문제로 부각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심판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당시에 전교조를 창설했는데 공무원인 교원은 전교조 조합원이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립학교 교원까지 교육공무원법을 의제해서 공무원인 교원과 마찬가지로 조합원이 될 수 없도록 한 사립학교법이 위헌인가 여부가 논쟁의 초점이었다.
 
당시 김상철 변호사께서는 정부 측을 대리하는 변호사였다. 이 사안은 동시에 민주화 과정에서 야기된 전통적인 사고와 현대적인 사고 사이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많은 전교조 교원들이 교단에서 퇴출당하는 불이익을 받음으로써 사회적 갈등이 촉발되기도 했다.
 
전교조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게 전개되자 김 변호사께서는 헌법학자인 나에게 이 문제에 대한 자문을 부탁했다. 당시는 법원이 서소문에 위치해 있을 때인지라 김 변호사 사무실도 덕수궁 대한문 인근에 있는 빌딩에 위치해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노동조합 특히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에 관한 소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자문에 응했다.
 
김 변호사의 입장은 어떻게 선생님들이 노동운동을 하느냐, 동양 특히 우리나라의 유교적 문화에 비춰 본다면 자고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하지 않느냐, 선생님은 어버이와 같은 입장인데 노동조합원이 말이 되느냐, 선생님이 노동자여야 하느냐의 요지로 말씀하셨던 기억이 새롭다.
 
이는 전통적인 동양적 윤리관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비난만 할 사안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김 변호사께서는 학교가 노동운동 내지 노동투쟁의 현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걱정을 하고 계셨다.
 
그러나 나는 헌법학자로서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일반적 흐름에 비춰 본다면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조합원이 되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다,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마지막 단계는 군과 경찰일 터인데 심지어 그리 흔한 사례는 아니지만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경찰뿐만 아니라 판사까지도 노동조합을 설립한 예가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나라에서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을 금지하는 나라는 전혀 없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랬더니 김 변호사께서는 흔쾌히 나의 소론을 들으면서 다만 한국적 현실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에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는 것으로 만족하셨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 변호사는 보수 내지 수구골통이라는 비난을 감내해야 했지만 그래도 그분이 지키려는 시대적 가치에 대해서는 비록 내가 반대 입장에 서 있기는 해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교직원노조뿐만 아니라 공무원노조도 합법화되고 법률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지만 동 시대에 있어서 교원의 자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때의 논쟁이 아직도 긴 여진을 남긴다.
 
아마도 김 변호사께서는 미래의 2세 교육을 담당하는 교원이 특정한 주의나 이념에 편향적인 자세를 가져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적어도 동 시대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교원이 노동조합원 즉 노동자가 되는 것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졌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전교조의 법외노조 문제로 새삼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상황이지만 이 모든 문제가 발전적으로 해소됐으면 하는 바람은 김 변호사나 필자나 한결 같다.
 
망설임 없이 걸었던 가시밭길
 
한동안의 세월이 흘러 다시금 김 변호사를 자주 조우할 수 있었던 것은 김 변호사께서 발행인으로 있는 월간 고시계 편집위원이 되면서부터이다. 당시 고시계 사무실은 역삼동에 있는 주택을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1층 김상철 발행인의 사무실 겸 회의실에서 월례 자문회의가 끝나면 이웃에 있는 한정식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세상살이와 나라 걱정으로 열변을 토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김 변호사께서는 월남 가족이라는 점까지 더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저항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관점에서 한미우호협회를 스스로 창설해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민간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조화를 이뤘으면 하는 것이 김 변호사의 소망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나는 고시계 편집위원이면서 당시에 사법시험이 논술형에서 사례형으로 변경돼 사례형 문제를 몇 년에 걸쳐 고시계에 연재하고 이를 고시계에서 ‘한국헌법연습’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이메일이 발달되지 않아 일일이 원고를 사무실로 들고 가던 시절이고 마침 집이 역삼동이라 그만큼 역삼동 고시계에 찾아가는 횟수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황영성 주간께서 2층 사무실에서 친절하게 맞이해 주던 기억이 새롭다.
 
역삼동 사무실을 관악구로 옮기는 가운데 김 변호사께서도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 한동안 김 변호사를 조우할 기회가 없었다. 간간이 전병주 고시계 편집국장으로부터 김 변호사님의 건강 동향을 엿듣는 것으로 김 변호사님의 소식을 접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오랜 세월 병상에서 고생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비록 가까이 가지는 못할망정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격변의 현장에서 비록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김상철 변호사께서는 백년 이백년을 살다 가신 분 못지않게 많은 활동을 보여줬고 그 여진은 아직도 우리에게 울려 퍼진다. 혼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래도 그분은 자신의 주의 주장을 또렷이 하면서 대한민국의 나아갈 길을 밝히려고 온몸을 날리셨다는 점에서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한 분의 삶의 여적은 논쟁적일 수 있다. 더구나 파란만장한 삶을 영위하신 김상철 변호사야말로 세간의 논쟁의 중심축에 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 분이 결코 자신만의 영달을 위해서 안빈낙도의 길을 가신 것이 아니라 비록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자유민주주의의 앞날을 위해서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는 한 만난을 물리치고 돌진해 나가신 이 시대의 진정한 행동가이자 활동가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