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성탄절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한국인이 경험한 첫 크리스마스 트리는 1886년 12월 24일 스크랜튼 여사가 이화학당 소녀들을 위해 만들었다. 한국의 첫 산타클로스는 아펜젤러 선교사였다.
1887년 10월에 첫 한국교회인 정동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각각 설립된 후, 12월 25일 주일에 아펜젤러는 아이들을 모아서 성탄절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양말에 선물을 담아 배재학당 학생에게 줬다. 이것이 한국의 첫 번째 성탄절이었다.
소년들은 산타클로스가 준 선물로 알고 기뻐했다고 한다. 아펜젤러는 이날 김명옥에게 첫 여성 세례를 베풀었다. 언더우드의 경우 성탄절 주일 예배에서 한국인을 위한 첫 장로회 성찬식을 거행했다.
▲ 1970년대 크리스마스 모습. |
1896년 12월 24일, <독립신문>에는 ‘내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일이라’는 성탄절 소개 기사가 처음 실렸다. 이듬해인 1897년에는 배재학당의 성탄절이 독립신문에 소개됐고 1896년에는 최병헌이 <대한크리스트인회보>에 “대한 천지에도 성탄일에 기념하는 정성과 경축하는 풍속이 점점 흥왕할 줄로 믿노라”며 이 날의 확산에 대한 희망을 피력했다.
마침내 1898년 12월27일에는 크리스마스가 한국의 중요한 축일로 정착했다는 평가가 이뤄진다. “서울 성 안과 성 밖에 예수교 회당과 천주교 회당에 등불이 휘황하고 여러 천만 사람이 기쁘게 지나가니 구세주 탄일이 대한국에도 큰 성일이 되었더라”- <대한크리스트인회보> 1900년대에는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성탄절에 사람들이 회당에 몰려드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선교차 방한했던 노블 부인의 일기에는 ‘회당문이 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라고 쓰여 있다. 조선 민중들은 성탄절에 회당에서 행해졌던 성탄극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전통적인 명절과는 다른 축일의 성격을 띠어갔다.
그러한 성탄절은 1920-1930년대 일제 식민시기에는 본격적인 상업성을 띠기 시작했다.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은 성탄절에 여흥을 즐기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이때부터 한국에서는 서구와는 달리, 크리스마스가 연인들의 날로 자리 잡아가는 전통이 시작됐다.
1936년 매일신보 에는 ‘기독교인의 손에서 상인의 손으로 넘어간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그러던 크리스마스는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규제하에 철퇴를 맞으며 수그러들었고 크리스마스는 우울한 날을 의미하기 시작했다.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은 야간통행 금지를 실시했으나 성탄절과 12월 31일에는 예외를 적용했다. 이후 성탄절은 미군 포고령에 의해 휴일로 지정되었으며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은 성탄절을 휴일로 법제화했다.
성탄절은 6·25 전쟁 기간 중에 미군들로부터 그 의미가 새롭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전쟁의 영향은 성탄절을 일제 시기의 소비와 여흥의 문화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기쁨과 축복의 날이라는 관념으로 자리 잡게 했다.
이후 야간 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시기에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새벽송은 자유와 기쁨의 상징이었으나 1982년 1월, 야간통행금지가 풀리면서 그 의미는 크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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