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원고는 2016년 12월 13일 사단법인 김상철기념사업회의 ‘제3회 김상철 자유·정의·평화상’을 수상한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의 기념 강연 내용이다. 

겨울은 깊어지고 광장에는 음습한 열기만이 훅 혹하며 불어대는 시대…시장의 자유, 자유민주주의, 자유통일 ‘자유의 원정대’를 조직하자 

오늘은 지난 한 해를 회고하고 작고하신 김상철 변호사님의 업적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마음은 경황도 없고, 온통 정신의 갈피를 잡기 힘들어 연말이 오기는 왔는지,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돌아볼 겨를조차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들일 것입니다.

시국에 대해서는 여기 우리 모두가 제각각의 설명을 한 가닥씩 가지고 있다고 하겠지만 광장에는 소리 없는 비명과 조롱과 비아냥과 마녀사냥의 카니발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백만에 이른다는 군중 속에서 폴 포트의 악령과 홍위병들의 그림자가 되살아나 거친 숨소리를 몰아쉬며 역사에서 아직 그들의 역할이 끝나지 않았음을 증언하는 듯합니다. 악은 우리 속에서 자라나왔지만 아직 채 성숙하지 못한 도덕적 감성들을 여지없이 파괴하고 시험하는 듯합니다.

도덕 감정은 인간의 태생적 능력이라는 것이 철학자들의 가르침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현실에서 보면 도덕은 작은 씨앗이 뿌려져 자라나고 점차 큰 나무처럼 스스로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인 것 같습니다.

부도덕은 덕성의 반대편에서 꼭 덕성이 자라나는 그만큼씩 자라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속에 숨어 있던 폭력과 조롱과 저주의 악령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활갯짓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인의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자라난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그런 기질이 우리 속에서 주기적으로 발작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주기는 거의 30년 정도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얼마 전 송복 교수님은 제게 “한 30년 주기로 큰 난리 통이 벌어지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런 난리가 지나고 나면 우리 사회는 항상 큰 성취가 있어왔다”고 말해주셨던 일이 있습니다. 아마도 위로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요즘 이런 농담도 있습니다. 1년 중 며칠의 기간을 정해 전 국민 광화문 시위의 날을 연간행사로 운영하자는 것입니다. 광화문에 나가 시위를 해보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때마다 주제를 정해 언론들이 미리 온갖 크고 작은 추측보도와 허위보도와 과장보도를 퍼부어 대는 사전 정지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혹시 해묵은 개혁 과제들이 한 건이라도 정리될까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도덕성의 문제라기보다는 기질의 문제이며, 마음의 튼튼함 여부이며, 사실에 대한 태도이며 소문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자기 주체성 즉, 판단 능력의 정립 여부라고도 하겠습니다.

아무리 덕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실 관계에 대해 이다지도 귀가 얇다면 번번이 속아 넘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돌아보면 지난번 광우병 소동도 그랬습니다만 그 때 거리에 모여들었던 대부분의 사람은 이번에도 시위에 참가하고 있을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 때 모여들었던 단체들은 이번 광화문 행사에도 결코 빠지는 법이 없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거짓과 선동에 대해서는 어떤 처벌도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정의는 무너진 것입니다. 그 때 광우병을 선동했던 언론사들의 사설들이 지금이나 다를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실은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 제3회 ‘김상철 자유‧정의‧평화상’ 수상자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

방종의 사생아를 낳은 자유의 위기

우리는 언론이야말로 자유라고 배웠고 또 그럴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존 밀턴이 언론 출판의 자유를 호소하는 아레오파지티카를 썼을 때 그는 진리의 자유시장이론이라는 논리를 설파했습니다. 자유의 시장에서 사실들끼리 서로 부딪혀 싸우게 하면 결국에는 진실이 진리가 이긴다는 지극히 간단한 자유시장의 이론이었지요.

그러나 한국에서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악이 선을 이기고, 거짓이 진실을 이기고, 조직적으로 거짓이 유포되는 것들이 오로지 정치라는 이유만으로 조장 보호 장려되고 있습니다. 언론들은 너무나도 정치적이어서 자신이 속한 당파에 이롭기만 하다면 진실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거짓이 만들어지고 거짓은 자유를 타고 유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라는 말이 이렇게도 참혹했던 적은 없습니다. 자유는 기껏해야 방종이라는 사생아를 낳을 뿐이라고 알아왔지만 지금에 와서는 자유는 곧 허구의 가공물이며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를 생산하는 다량생산 체제처럼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언론 자유의 위기라는 말을 자신 속에 더욱 아프게, 예리하게 피를 흘리며, 한자 한자 울면서, 새겨놓아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놀라운 것은 정치지도자들이나 여론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는 분들조차 사실에는 눈을 감고 언론의 과장된 보도만을 기초로 이런 저런 그럴싸한 행동지침이나 가르침을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동설은 아무리 대중이 그 반대를 주장한다고 해서 천동설로 바뀌지 않습니다. 과학의 정신, 논리의 정신이 결여된다면 광장은 한낱 광인들이 백주 대낮에 질펀하게 한판 벌이는 망상의 카니발리즘 외에 무엇을 역사로 기록할 것입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지성에서 사실에 대한 순종의 정신, 사실에 대한 승복의 정신을 뽑아버린다면 우리의 영혼은 금세 무지와 미혹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와 평화를 말할 때, 그중 가장 전제적이며 중요한 가치인 자유를 말하면서 자신 있게 무지로부터의 자유를 말할 수 있을까요?

자유는 과연 우리에게 어느 정도로, 무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할까요.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간단한 정치적 스캔들조차 판단할 자유를 확보하고 있기나 한 것일까요.

뒤틀린 한국인의 집단성 

그런 면에서 자유도 정의도 평화도 그것을 지켜내는 무언가의 숨겨진 덕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자유와 정의와 평화지만 숨겨진 것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굳건한 심사라고나 할까, 강건한 기질 같은 것이 먼저 있어야 나머지 가치가 비로소 설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유달리 조변석개하는 여론에 취약해서 독자적으로는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너무도 쉽게 선동에 복종하고, 자신의 영혼을 내주면서 쉽게 홍위병이 되거나 폴 포트의 아이들이 되고 맙니다.

집단으로서의 한국인에게 어떤 특정한 기질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오류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환경적 요인들이 집단 속에서 살아 움직이면서 마치 하나의 유전적 기질처럼 보이는 특이한 집단성을 표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쉽게 특성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종종 망연자실하는 실망감에 몸을 떨게 됩니다. 혹시 우리 속에 피해자라는 의식, 억압받으며 살아온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뒤틀린 심정, 지배 받으며 살아온 사람으로서의 노예적 근성 같은 것이 꽤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실망감 말입니다.

한번 피해자라는 것이 확실해지고 나면 무언가의 청구권이 그 속에서 끊임없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심리도 그렇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이미 역사가 된 것이지만 지금도 일본에 대해 금전적 청구권이 성립한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논쟁에는 최종적 결론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상대방의 도덕적 열위를 확인하는 순간 끊임없는 무언가의 우월적,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권리가 자신 속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시대의 광기에 사라지는 자유

이런 일들은 세월호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광장을 떠나지 못합니다. 사드 문제에 이르면 더구나 이 땅의 주인은 마치 한국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배 받는 민중에 불과하므로 나는 스스로를 지킬 자기 방어 무력조차 필요 없다는 식의 태도마저 엿보입니다.

이것은 노예의 도덕이지 자유인의 평화가 아니지요. 그렇게 노예의 덕이 우리 속에 깊게 심지를 박고 있습니다. 김상철 변호사님이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말할 때 특히 이런 죽음의 평화, 노예들의 평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겠지요. 평화는 노예들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한국에서 평화를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노예의 평화를 말합니다. 자유가 그랬던 것처럼 평화도 마치 조지 오웰의 뉴스피크처럼 그 뜻을 갈아 끼우고 말았습니다. 자유인의 평화가 아니라 노예들이 두려워 떠는 전쟁의 부재로 평화는 재정의 되었을까요.

이번 광장의 시위 과정에서 동학 농민을 가장하는 행렬이 거창하게 등장한 것은 이런 역사의 반복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동학 농민은 조병갑을 잡느라고 조선이라는 초가삼간을 모두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을 때 조선 최대의 시민조직인 일진회를 구성하게 되었지요. 일진회는 우리가 잘 알듯이 최대의 친일 조직입니다. 참 이렇게 억울한 일이 없습니다만 지금은 동학학명이라고 그럴싸한 언오로 지칭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 대통령을 탄핵하는 국회를 보십시오. 국회 개혁은 한국 정치 문제의 핵심적인 과제이지만 지금은 대통령을 심판하는 권력으로 그 위세가 더욱 높아졌습니다. 아무도 국회를 거스를 수 없게 되고 말았지요.

노조도 그렇습니다. 노조는 국내 제 정치사회 세력 중 가장 시급하게 개혁되어야 할 부분으로 지목되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리는 광장 시위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해 있습니다. 이들은 대통령의 하야를 거침없이 주장하고 있고 곧 승리자가 될 운명에 있습니다.

국회개혁과 노동개혁은 물 건너가고 그들은 오히려 승리자가 되는 역사의 역전, 보수화, 개혁의 실패를 만천하에 드러내게 됩니다. 자유는 그렇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개혁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반동을 불러냈습니다.

언론들이 그런 운동의 선두에 서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광기를 충분히 짐작케 합니다. 개혁되어야 할 것들이 개혁의 칼자루를 쥐고 있습니다. 예, 시대는 갈아엎어졌습니다.

시장이 만드는 자유민주주의 도덕질서 

자유라는 관념이 우리 속에서 자라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깨닫는 문제가 아니라 자라나야 하는 문제이고 경험의 축적이 만들어진 끝에 기어이 기억 속에 축적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자유와 정의와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의 깨달음으로, 한 번의 제도화로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정신의 성숙입니다. 그러나 어렵사리 만들어진 자유의 체제는 반자유적 위협과 압력에 너무도 쉽게 침식당해버립니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면 이내 두 걸음 밀려나는 그런 형국입니다. 소위 반자유주의적 인식의 세계는 꽤 그럴싸하고 즉물적이어서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그렇지 않습니다. 공정은 너무도 침식이 많은 개념이기조차 합니다. 공정은 가장 치열한 경쟁을 불러온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언제나 천국이 아니기에 그것을 지옥이라고 부르고 싶은 자들에게 쉽게 공간을 내주고 맙니다.

국내에서의 이념지도는 더욱 그렇습니다. 보수를 자처하면서도, 자유를 말하거나 자유를 말하면서 그것에 포함된 시장의 자유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 수가 더욱 적습니다.

심지어는 시장의 자유는 가진 자의 자유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자칭 보수주의자조차 많습니다. 아니 대부분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시장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시장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도덕질서를 만들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며 심지어 그런데 적합한 개인적 덕성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시장의 자유는 복잡한 인간들의 자유로운 거래 관행을 말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개인의 덕성을 키워내며, 좋은 품성과 좋은 정치,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냅니다. 이는 칸트가 영구평화를 희구하면서 쓴 논문의 주된 내용이기도 하지요.

정답을 향해 나아가야 할 과업들 

문명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의 이념지도는 반도시적 반문명적 세계관에 거의 점령되다시피 합니다. 시골 취향의 반농업적 인생관들은 은근히 도시라는 거대한 분업체계에 대한 전근대적 적대감을 드러내도록 만듭니다.

시장은 우리의 덕성을 키우고, 도시의 분업은, 분업할 만한 최소한의 것만 가진 보잘 것 없는 개인들에게조차 자신의 일자리를 찾아 협력할 수 있는 길을 찾아줍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칭송하거나 한가한 시골의 은퇴생활을 그리워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도시의 열정과 협력과 자유에 대해서는 거의 문맹과 다를 바 없는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반자유적 압력을 줄여나가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자유민주주의는 법치적 질서 속에서 이뤄지는 정치체제를 말합니다. 시장경제의 원칙은 자유의 확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런 가치들은 이 넘치는 정치 속에서 공동체주의 속에서, 사회주의적 지향 속에서 금세 잊혀지고 맙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막 김상철 자유상을 영광스럽게도 수상했습니다. 이 상은 이제 겨우 3회째인 상입니다만 1회 복거일, 2회 남시욱 선배님이 수상하신 것만으로도 이미 그 무게를 알 수 있게 하는 그런 상입니다. 그리고 김상철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제게는 당치 않은 상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금방 알아챌 수 있습니다.

조심스레 수상을 거둬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지만 결국 털컥 상을 받기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두 분 선배님에게 죄송스럽고 또 무안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철이 없으면 꽤 용감해지기도 하는 것이고, 부끄러움을 모르면 꽤 나대기도 하는 것이어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겨울은 점차 깊어지고 있지만 광장에는 더욱 음습한 열기만이 훅 혹하며 불어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시장의 자유를 지켜낼 수 있을지, 법치로서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지,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체제, 즉 자유통일을 일궈 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논리적인 정답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만들어가야 하는 그런 질문들입니다. 정해진 답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정답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그런 과업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각자는 각자의 독배를 들도록 하십시다. 각자의 길을 걸어 나가도록 하십시다. 작은 자유의 원정대를 조직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