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하야나 탄핵 모두 규범성과 정당성 안에 있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그러한 규범성과 정당성을 둘러싼
헤게모니 투쟁의 장이다.
대통령은 헌정파괴 세력에 맞서 이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다.
‘최순실 쓰나미’가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다.
둑은 터져 무너졌고 모든 것이 선동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이 무당에게 홀렸다’라는 주장은 차라리 이 모든 광란과 소동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홀린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미군이 장갑차로 미선이 효순이를 닭잡듯 몰아서 깔아뭉갰다’던 종북들과 ‘뇌송송 구멍탁’이라던 광우병의 그 사람들이었고, 교통사고 세월호 희생자들을 대통령이 죽였다던 이들 아닌가.
‘고교생이 중심되어 혁명정부 세워내자!’는 북한식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급식생 철부지들의 모습과 ‘백남기를 살려내라’는 부검 반대자들, 그리고 난데없이 ‘해고는 살인’이라는 피켓을 든 노동세력의 모습에서 이 사태의 종결이 어찌될지 예상은 되는 바다. 최순실 국정농단은 이들에게 소화하기가 어려운 주제인 것이다.
보수층 시민들과 보수 활동 그룹들은 개탄을 쏟아낸다. 하야냐 탄핵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을 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여기까지인가’라는 자조와 함께 ‘왜 하필이면 저렴하고 싸가지 없는 무당x에게 당한 거냐’는 육두문자 분노감들이 표출된다. 대통령의 책임총리 지명을 놓고 야당은 또 내홍이 커지더니, 급기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코믹함마저 보여주고 있다.
‘모든 존재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생각해 보면 최순실도 나름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존재들의 이유로 인해 합목적적인 우주의 질서를 향해 오늘도 우리는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말처럼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진보든 보수든, 좌파든 우파든, 간절한 쪽의 꿈이 이뤄진다.
현재의 사태는 대한민국이 망해가는 과정이 아니다. 민주주의란 원래 전투성을 내재한다. 그래서 민주정치의 주도권은 타협이 아니라 갈등과 투쟁을 통해 헤게모니라는 이름으로 얻어진다. 주권자인 국민의 선택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민주체제에서 정치적 평화란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런 역사의 종말이 오는 심판의 때는 神만이 알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타협이 아니라 투쟁이 본질
물론 박근혜 대통령에게 잘못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박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인사 난맥을 보이며 어떤 파국의 사태를 점치게 하는 행태들을 적지 않게 행했다. 그때 이미 눈 밝은 이들은 대통령의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고 또 실제로 김기춘 씨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재임했을 때, 그는 비선 실세들에 대한 조사 보고를 공직기강비서관인 조응천에게 맡긴 바도 있었다.
일찍이 이러한 감독과 견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고, 대통령이 참모들을 불러서 ‘어떻게 된거냐’ 따지며 서로 진실게임 변론을 들었다면 현재와 같은 터무니 없는 일들이 벌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그런 용병술의 대가였다. 따라서 책임은 분명하게도 박근혜 대통령의 처신에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일로 대통령이 하야할 만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최순실 국정농단이라는 의혹은 검찰이 수사하고 있지만, 처음 우리가 방송, 언론을 통해 이해한 것과 검찰의 수사 내용 간에는 큰 온도차가 있다. 검찰이 일부러 사건을 축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언론들이 제기한 의혹들을 법리적으로 따져보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언론들이 최순실에게 씌웠던 국정농단은 그 실체가 모호해졌다.
‘권리남용의 공동정범’이라는 다소 어려운 죄목이 따라다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상상하던 그런 죄는 아닌 모양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하야가 아니라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사실이 드러나면 국회는 민주주의 방식대로 탄핵소추를 발의하면 된다.
이번 최순실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가 정작 놀라야 할 점은 국가란 무엇인지, 공화제란 무엇인지, 대통령과 헌법은 무엇인지, 민주주의는 무엇인지, 법치란 무엇인지에 대해 언론인과 지식인들은 물론, 정치인들마저 제대로 아는 바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이는 정치철학의 빈곤과 무지함을 뜻한다.
‘그래도 대통령인데 뭐 밝혀진 것도 아직 없잖아요’라고 하는 TV 속, 시장터 아낙의 우려가 오히려 공화제와 헌법의 본질을 제대로 직관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정치철학의 정초는 규범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 있기 때문이다.
▲ 미래한국 고재영 |
대통령 하야와 탄핵 모두 규범성과 정당성 안에 있어야
아리스토텔레스는 ‘훌륭한 지배자는 동시에 훌륭한 복종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의 <정치학>에서 피력했다. 이에 따라 왕정국가에서 신민은 왕에게 복종하고, 왕은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중세 군주 국가들의 통치적 덕목이었으며,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근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통치자인 국민이 피치자인 국민 자신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원리로 지속되어왔다. 우리는 그러한 민주국가를 ‘법치국가’라는 말로 배웠다.
따라서 법치가 실종된 국가는 자연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것은 일찍이 홉스가 주장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를 말한다. 국가란 그러한 자연 상태를 극복하자고 개인들의 연대를 통해 등장했다. 국가질서는 주권자의 일반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법질서’로 등장한다. 야권과 광장의 시민들은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며 ‘국민의 뜻’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 국민이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광장에 모인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국민의 일반의지라는 것은 다수니 소수니 하는 ‘머릿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규범성과 정당성 안에 있다. 국민의 뜻이라는 일반의지의 규범성이란 사리와 도덕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고, 정당성이란 절차에 맞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국민들은 자기 자신인 국민에게 복종할 수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좋은 지배자는 좋은 복종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지배와 복종에서 규범성과 정당성을 갖추라는 의미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중이 규범과 절차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주장과 행동을 멋대로 펴는 것에 대해 Ochlocracy, 즉 중우(衆愚)정치라는 이름을 붙였다. 순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떼법’이 된다. 이 떼법 정치는 민주주의가 타락한 모습이다.
광우병과 세월호, 그리고 지금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광장의 촛불들이 바로 떼법이다.‘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의 선언은 대한민국의 국민은 누구나 주권자의 결단인 헌법과 법률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헌법은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지, ‘군중’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지 않았다.
권력을 창출할 수 있는 국민에게는 전제가 있다. 즉 헌법과 법률에 복종함을 서약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회계약’이라고 부른다. 이런 것을 무시하는 정치행동을 우리는 ‘혁명’이라고 부른다. 혁명은 단절을 의미한다. 단절은 새로운 길을 가자는 것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과연 우리 대한민국이 ‘새로운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혁명의 이유인가. 현재 밝혀진 사실들을 기억해 보자.
언론의 과장, 왜곡 보도가 키운 최순실
JTBC가 ‘최순실의 PC'라고 보도한 방송은 이 모든 광란의 기폭제였다. 그 태블릿 PC안에는 주요 국가 기밀들이 있었고, 대통령의 연설문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국방기밀과 외교문서, 남북관계 주요 자료들마저 있다고 언론들은 보도했다.
그런 중차대한 국정기밀을 일개 욕심 많고 사악한 사이비종교 교주의 딸이 십상시들을 호령해서 무엄하게 열람하고 수정해서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재벌들의 돈과 국민 혈세를 뜯어 자기 배를 채웠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최순실의 국정농단이다. 하지만 그런가. 검찰 수사에서 드러나는 정황은 이제까지 우리가 언론을 통해 알고 있던 내용들과는 사뭇 다른 것들이었다.
최순실 태블릿 PC에 담긴 대통령의 연설문은 초안에 불과한 것이었고 또 다른 문서들은 국가 기록물로 지정된 것들도 아니었다. 대통령은 자신의 연설문을 사전에 최순실에게 열람하도록 했고, 그 의견을 구했다고 고백했다. 그것이 국정농단이라면 황당한 일이다.
물론 최순실은 대통령과의 친분을 내세워 기업들과 공직자들에게 사적 이익을 취하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 부분은 검찰 수사에서 명백하게 가려져야 하고 또 재판을 통해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법치(法治)라고 배웠다. 하지만 지금 광장에 나온 이들과 야권의 정치인들은 배운 대로 행동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과거 ‘홍삼트리오’라고 불렸던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와 국정농단, 노무현 대통령의 아들 노건호 씨와 그 일당들의 ‘바다 이야기’, 그리고 대통령의 ‘생계형 비리’라던 수십억 검은 돈과 논두렁 시계에는 왜 혁명의 촛불들은 타오르지 않았던가.
아마도 그것은 칼 슈미트의 ‘정치란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는 명제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즉 지금 광장에서 들려 오른 촛불들의 주동자들과 핵심들의 촛불은 자신들의 적에게는 타오르고 자신들의 동지들에게는 꺼지는 촛불이라는 이야기다. 그것이 바로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다.
이렇듯 한 국가에 법치라는 규범이 예외 상태에 놓이게 되면 그 해결은 법질서 안에서 등장하지 않게 된다. 법치를 밀어내는 힘은 외부로부터 오게 되며 이를 정치철학에서는 ’민주주의의 실패‘라고 부른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실패를 극복하는 힘도 역시 법치의 외부로부터 오게 된다.
이러한 정치 현상은 무섭다. 정치가 아닌, ‘정치적인 것’이 만장일치의 주권공동체를 허물게 되면 이를 극복하려는 힘도 동시에 발생한다. 그것이 실력 대결로 가면 ‘내전’이라고 부른다. 민주주의는 내전을 피하고 합의를 이루자는 정신이다. 합의라는 것은 공론의 장을 필요로 한다.
그 공론의 장이 바로 의회이며, 의회가 광장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면 주권의 최고 결정자는 결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민주주의에 예외적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예외적 상황을 맞게 되면 법치가 작동하지 않게 된다.
고 백남기 씨에 대한 경찰 부검의 포기에서 이미 우리는 민주주의의 예외적 상황을 목격했다. 대통령 측근의 국정농단은 검찰의 수사가 기소로 이어지기도 전에 대통령의 하야라든지, 탄핵을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두 법치의 실패이자 민주주의의 예외적 상황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헌법의 입법권자인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국가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결단해야 한다.
그 결단의 내용은 하야가 아니다. 대통령은 주권자의 일반의지와 명령으로 자신에게 책임 지워진 ‘공화국의 국가원수’로서 헌정 유지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 대통령의 불법사실이 있다면 국회는 대통령의 탄핵소추를 발의하면 되고, 헌법재판소는 판결하면 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이다.
대통령은 헌정수호를 결단하라
헌법은 대통령에게 ‘국가의 원수’로서 그 사명을 부여했다. 공화제에서 대통령의 권한은 오로지 헌법에 의해서만 보장되고, 또 헌법에 의해서만 제약된다. 헌법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대통령의 권한을 제약할 수 없으며, 그렇게 제약하려는 자는 주권자, 국민의 이름으로 처단되어야 한다. 그 수가 10만이 아니라, 100만이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의 중립성을 위반해서 위헌행위라는 선관위의 결정이 있었을 때,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소추했고, 대통령은 국회 탄핵소추를 받아들였다. 민주주의가 작동했다. 하지만 헌재 판결에 의해 그 정도의 사안으로 국가의 원수가 탄핵될 수 없다고 했을 때, 국회는 헌재의 판결을 수용했다.
헌재의 판결이 옳든 그르든 역시 민주주의가 작동했던 것이다. 당시 대통령이 국회의 탄핵소추를 거부했거나 국회가 헌재 판결을 수용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내전을 치르고 다시 만장일치의 국가질서를 재수립해야 했을 것이다. 그 과정은 피가 강물같이 흐르고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는 사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이 있었던 2004년 3월의 지혜를 되살려야 한다. 하지만 정치적 질서란 언제나 구체적 현실과 의지들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기에 이러한 기대는 한갓 이상주의자의 희망에 그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좋은 해결인가’에 대한 정치적 덕(德)에 대해 매우 기이한 결론을 얻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은 덕이란 최선과 차선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악덕과 다른 악덕의 사이에서 중용(中庸)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즉 용기라는 덕은 비겁함과 자만이라는 두 악덕 사이에 존재하며, 절제라는 덕 역시, 인색과 남용이라는 악덕 사이에 존재한다는 점을 깨닫는다면,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타개하는 덕 역시, 다른 악덕과 또 다른 악덕 간에 중용이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아마도 대통령이 결단해야 하는 정치적 덕목은 독재와 무정부라는 두 악덕 사이에 있을 것이며, 그 중용은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비상조치권’이 된다. 대통령에게 부여된 비상조치권은 헌법의 파괴가 아니라, 헌법의 제정 권력인 주권자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민주주의와 법치가 예외적 상황에 놓이게 되면 공화제의 대통령, 국가의 원수는 이러한 예외적 상황을 헌정의 규범 안에 되돌려야 한다.
이를 ‘민주주의에로의 결단’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결단은 헌법에 미친다. 헌법보다 헌법의 제정 권력인 국민이 더 상위의 규범체이므로, 대통령은 헌정파괴세력에 대해 헌정의 정당성을 관철해 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헌법은 그 수단으로 대통령에게 비상조치권을 부여했다. 물론 이러한 결단은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기에 빠지는 상황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위기 상황은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기에 위기라는 이름이 붙는다.
대통령은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하는 방안을 강구함에 노력해야 하지만, 비상사태에 대한 결단 역시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은 누가 대통령을 대신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며,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위기의 대한민국에 구원투수는 여전히 대통령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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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만 국민 중에서 단 100만의 분노(?)가 나라를 시끄럽게 하는 것이 <광기>가 아니면 무엇인가?
광기=광우뻥 파동,
광우뻥 걸릴까봐 여태 미국산 쇠고기는 먹지 않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