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3월 공보처 통계국이 발간한 <6·25 사변 피살자 명부>에 의하면
인민군(혹은 남한 내 좌익)에 의해 살해당한 비무장 민간인은 5만9994명
6·25 전쟁은 국가 전체가 폐허가 되는 3년의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국방군사연구소의 한국전쟁피해통계집에 따르면, 한국전쟁 때 목숨을 잃은 한국군은 13만7899명, 유엔군 5만7933명(그 중 미군이 5만4246명), 중공군 14만8600명이 사망했고, 북한군은 50만~52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한국의 민간인은 무려 99만968명에 달한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목숨을 잃은 양국의 전사자보다 더 많은 숫자다. 그 중 군인들에 의한 학살로 목숨을 잃은 민간인은 12만8936명이다. 이는 한국군 전사자의 규모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현재도 민간인 전쟁 희생자들의 진상을 밝히고, 보상을 받고자 힘쓰는 단체들이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들은 왜?
문제는 희생 민간인에 대해 진행되고 있는 연구와 진상조사 대부분이 국군과 미국에 의해 학살된 사례만 조명하는 편협한 방향으로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는 오로지 국군과 미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학살 실태만을 조명하고, 이에 대한 진상규명과 보상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전쟁유족회’도 “우리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이승만 정권과 미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학살당한 백만 민간인 희생자들의 가족입니다”라고 스스로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학살로 목숨을 잃은 민간인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13만 명 정도다.
하지만 한국전쟁유족회는 전쟁 당시 공습, 부상, 행방불명 등을 모두 포함하여 약 100만 명의 민간인 사망자 전부가 이승만 정권과 미국에 의해 학살당한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단체가 국군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만을 집중 조명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국군과 미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규모가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규모보다 현저히 낮아서일까?
이에 대한 진실을 파헤쳐볼 수 있는 한 가지 책이 있다. 1952년 3월 한국전쟁 당시, 공보처 통계국은 북한 인민군에 의해 살해당한 민간인의 명단을 모아 <6·25 사변 피살자 명부>를 발간했다.
▲ 한국전쟁 당시 함흥 지역에서 퇴각하는 인민군들이 무자비하게 학살한 함흥 주민들의 시체들. 사진에 나타난 동굴에서만 300여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
책의 범례(凡例)를 살펴보면, “6·25 사변 중 공무원 및 일반인이 잔인무도한 괴뢰도당에 피살당한 상황을 조사 편찬하였다”고 밝히며, 대상을 “군경(軍警)을 제외한 비(非)전투자에 한하였다”고 덧붙이고 있다. 즉, 인민군 세력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들만을 다루고 있는 명부다.
이 책은 인민군 세력에게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성명, 성별, 연령, 직업, 피해 연월일, 피해 장소, 본적, 주소까지 상세하게 기재하고 있는데, 명부에 기록된 민간인 사망자 수는 무려 5만9994명이다.
이를 통해 학살로 목숨을 잃은 민간인 희생자 12만8936명과 견주어봤을 때, 최소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국군이나 미군이 아닌, 인민군(혹은 인민군에 동조하는 남한 내 좌익세력)에 의해 희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인민군의 집중 학살 대상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민간인 학살은 매우 잔인하게 이뤄졌다. 인민군은 좌익 세력들과 함께 점령 지역마다 인민재판과 처형을 감행했다. 주로 공무원 및 군인·경찰의 가족들, 인텔리 계층으로 분류되는 학자들, 우익인사들이 최우선으로 학살을 당했고, 부녀자와 갓난아기들도 예외 없이 처형했다.
이에 못지않게 가장 많은 학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었다. 공산주의의 유물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정부 수립을 꿈꿨던 김일성과 비호세력에게 기독교는 사상적으로 가장 위협적인 존재들이었고, 인민군들이 수많은 사람을 집단 처형한 것이 기독교인들이었다. 특히 한반도 대부분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당했던, 3개월의 인공치하 기간 동안 조직적이고 악랄한 기독교인 집단학살이 이뤄졌다.
1) 병촌교회
충남 논산의 ‘병촌교회’는 충남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단학살을 경험한 교회 중 하나다. 논산지역은 1950년 7월 중순 인민군에게 점령 되었고,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적 치하에 남게 되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인민군 패잔병들은 수세에 몰렸다. 이들은 9월 27~28일 이틀 간 병촌교회의 신자 66명과 공무원 및 우익인사들을 죽창과 몽둥이로 살해한 후 구덩이를 파고 매장했다. 그 중 5가구는 가족 전체가 몰살을 당했는데, 갓난아이도 5명 포함되어 있었다.
▲ 6·25 남침을 통해 약 3개월 간 남한을 점령한 북한군은 남한의 수많은 기독교인과 민간인을 학살했다. 사진은 기독교 신자들과 공무원 및 우익인사들을 죽창과 몽둥이로 집단 살해한 후 구덩이에 매장한 충남 논산 병촌교회의 순교자 기념비. |
2) 야월교회
6·25 때 가장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 전남 영광군으로 2만1225명이 피살되었다. 영광지역 전체 피살자의 12%에 해당하는 2500여 명이 10세 이하의 어린이였다.
영광군 지역이 유독 피살자가 많은 이유는 6·25 당시 인민군이 후퇴할 때 미처 지리산으로 못 들어간 빨치산들이 영광지역에 많이 모여서 빨치산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해방 후 사회주의 색채를 가진 인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영광군에서도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곳은 남로당 총책 김삼룡의 고향인 염산면이다. 6·25 남침전쟁이 벌어지기 사흘 전인 1950년 6월 22일, 미리 침투해 있던 빨치산들이 정치 공작을 위해 염산면에 들어왔다.
이들 빨치산 공작대는 염산면 주민의 신고로 군 병력과 경찰에 의해 대부분 사살을 당했다. 이를 신고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따라서 인민군들 사이에는 염산면 일대 교인들에 대한 반감이 크게 조성되었다.
이후 전쟁이 본격화 되면서 영광지역은 인민군들에 의해 빠르게 고립되었고, 인민군과 좌익 세력들의 활동 본거지가 되었다. 9월에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면서 퇴각을 앞둔 인민군들의 기독교인 집단학살이 본격화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민군들은 야월교회 교인들과 마을 주민들을 교회에 몰아넣은 후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결국 야월교회 교인들은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65명 전원이 피살당했다.
3) 염산교회
전남 영광에 위치한 염산교회도 인민군의 집중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인민군은 7월 23일 염산교회를 접수했고, 담임목사를 내쫓고 교회와 사택을 인민위원회 사무실과 숙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 영광 지역 내 기독교 및 우익 청년들은 만세환영대회를 주도했고, 앞장서서 주도한 염산교회 소속의 고등학교 3학년의 기삼도 학생은 10월 7일 교회 앞에서 죽창에 찔려 피살당했다. 같은 날 교회도 함께 불태워졌다.
이를 시작으로 인민군들은 염산교회의 교인들을 모조리 찾아다니며 죽이기 시작했다. 이 교회 집사였던 노병재 씨 일가족 9명, 동생 가족 7명 등 노 씨 일가 23명이 같은 날 바닷물에 던져 수장되었다.
교회 담임목사였던 김방호 목사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죽창과 몽둥이로 살해당했고, 부인과 아들, 8살, 5살 손자까지 몽둥이와 죽창으로 좌익들에게 학살당했다. 재적 인원이 100명이 채 되지 않았던 염산교회의 교인 중 총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4) 복길교회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한 전세 역전으로 인민군들이 퇴각하자 전남 무안의 복길 마을 주민들은 마을 회관에 모여 태극기를 걸며 만세를 외쳤다.
이 소식을 들은 인민군은 좌익 세력들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잡아들여 바닷가에 모아놓고 학살을 자행했다. 이 때 바닷가로 끌려간 사람들은 총과 죽창 등에 의해 난도질을 당한 후 수장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무려 86명의 교인들이 학살을 당했다. 복길교회 마당에는 6·25 희생자 86인의 추모비가 서 있으며, 마을 한켠에는 정부 차원에서 건립한 희생자 86인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인민군의 무자비한 학살 외면하는 현실
조직적으로 자행된 북한 인민군들에 의한 학살은 좀처럼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앞서 언급한 인민군에 의한 기독교인 집단 학살 역시 진상규명이나 보상의 차원의 논의는커녕, 제대로 된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국군 장병들이 희생되거나 실종되고 민간인이 북한에 납북되었다. 1952년 우리 정부가 작성한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에 따르면 8만 2959명이다. 납북자들은 국회의원은 물론 공직자, 정당 간부, 대학 교수, 예술가, 종교인, 기술자 등이었다.
이것은 남한 내의 우수 인재 고갈작전이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힘써온 자국과 동맹국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은 일말의 언급도 하지 않고, 전투 과정에서 발생한 오폭이나 오인 사격으로 인한 사망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근거도 확실하지 않은 것들을 모아서 “국군과 미군의 학살 만행”이라고 몰아가는 그 저의가 무섭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불법 남침을 통해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북한 괴뢰 집단과 남한 내 좌익 세력들의 빼도 박도 못하는 근거가 확실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 행위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한국전쟁의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추적해서 밝혀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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