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전쟁과 베이징 밀약
항미원조전쟁과 베이징 밀약
  • 남시욱 미래한국 고문
  • 승인 2016.06.21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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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6·25 전쟁과 중국의 역할

중국 지도자들은 역사의 진실 앞에 서기를 거부하는가?

중국 국가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은 1956년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소련공산당 대표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6·25전쟁을 회고하는 가운데 “미국 제국주의자들이 38선만 넘지 않으면 중국은 관계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반드시 국경선을 넘어가 싸울 생각이었다”고 밝혔다. 

▲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미래한국 고문

이 때문에 최근까지 세계의 많은 전문가들조차 유엔군이 38선만 돌파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의 참전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중국에서는 6·25전쟁을 ‘조선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를 2단계로 나눠 1950년 10월 중공군이 참전하기 전까지를 ‘조선전쟁’이라고 부르고, 그 이후를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른바 항미원조전쟁을 위해 출병한 ‘중국인민의용군’이 서울과 그 이남지역을 점령한 약 1개월 후인 1951년 2월 서방국가들은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유엔총회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국인들은 항미원조전쟁을 중국이 미국에 대항해 북한 정권을 멸망에서 구해 내고 중국을 일거에 세계의 군사강국으로 만든 마오(毛)의 역사적 결단이었다고 생각한다.

하긴, 김일성 정권이 멸망해 한반도가 미국의 우방인 한국에 의해 통일된다면 중국은 안보상 큰 부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지정학적(地政學的) 관점에서 본다면, 6년 전 시진핑(習近平) 당시 중국 부주석의 항미원조전쟁 관련 언급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진핑 말처럼 중국의 항미원조전쟁이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 되려면 우선 중국 자신이 침략자 편에 서지 않았어야 한다.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한 후 공개된 비밀외교문서에 의하면 6·25전쟁은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세 사람의 합작품이었고, 마오는 1950년 11월 이후 중공군의 2차 공세 때 참전의 목적을 기왕의 북한정권 구하기에서 한반도 전역의 해방으로 바꾼 사실이 밝혀졌다. 

첫째, 마오는 남침 준비를 하고 있던 김일성에게 3개 사단의 대규모 병력을 제공해 북한군이 일거에 한국군을 무너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49년 5월 중공군에 배속되어 있는 조선족 3개 사단 병력을 북한에 넘겨달라는 김일성의 특사 김일의 요구를 흔쾌히 수락했다. 

이에 따라 조선족 2개 사단은 그해 7월, 나머지 1개 사단은 1950년 3~4월에 북한 인민군에 이양되었다. 마오의 6·25전쟁 개입 제1단계 조치였다. 이들 병력은 6·25 때 북한군의 최정예 부대로 활동했다. 중국 정부는 북한의 남침작전 개시 후인 1950년 7월 초에는 동북군구 소속의 조선족 장교 200명을 북한으로 보내 인민군 간부의 전투능력 향상 교육을 맡게 했다. 

둘째, 마오는 김일성에게 남침작전 때 외부세력이 개입할 경우 북한을 병력으로 지원할 것을 사전 보장해 그에게 자신감을 줬다. 스탈린은 1950년 3월 말부터 4월 초 사이에 모스크바를 비밀 방문한 김일성에게 그의 남침계획을 승인하면서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북한과 중국이 함께 내려야 하며, 중국 지도부가 이를 찬성할 때만 작전이 개시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그는 김일성이 소련의 무력지원을 기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런 책략을 쓴 것이다. 

김일성은 이에 따라 5월 중순 베이징으로 마오를 찾아가 그의 남조선 해방전쟁에 외국세력이 개입하는 경우 중국이 병력을 동원해서 북한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미 1949년 5월 북한의 김일 특사에게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스탈린의 승인 등을 조건으로 찬성했던 마오는 이 날 스탈린이 승인한 남침계획을 설명 받고 이에 전적으로 찬동했다. 

이 계획은 북한이 제1단계에서 병력을 38선 부근에 집중 배치하고, 제2단계에서 북한 측이 남한 측에 대해 평화통일협상을 제의하며, 제3단계에서 이 제안들이 거부당한 다음 북측이 군사작전을 개시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때 마오가 김일성에게 지원을 사전 약속하지 않았거나 그의 작전계획에 이의를 달았더라면 김일성의 남침은 무기연기 되었을 것이다. 

마오는 이날 김일성에게 군사고문 역할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김일성에게 군사작전에 대비해 북한군의 준비 태세를 철저히 하고, 장교와 병사들에게 각각의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아울러 인민군이 신속한 행동을 전개할 것과 남한의 대도시들을 점령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우회해 적의 군사력을 파괴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마오는 또한 만약 미국이 개입하는 경우 소련은 38선상의 군사분계선에 관한 미국과의 협정 때문에 전투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중국은 그 같은 의무에 묶여 있지 않으므로 쉽사리 북한을 도울 수 있다고 김일성을 안심시켰다. 

중국은 그 동안 이 중대한 ‘베이징 밀약’을 철저히 숨겼다. 이 같은 은폐정책 때문에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옥스퍼드대학, 1998년)을 쓴 상하이 푸단대학 출신인 데이비드 추이(중국명 쉬쩌롱·徐澤榮) 박사는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11년 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2011년 특사로 석방된 직후 이렇게 말했다. 

▲ 중국의 마오쩌둥은 6·25 직전인 1950년 5월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외국세력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 중국이 참전해 지원하겠다는 베이징 밀약을 했다. 사진은 압록강을 건너오는 중공군.

‘베이징 밀약’ 철저히 은폐 

“마오의 개인적 사정과 소련으로부터의 원조 등 조선전쟁 참전은 당시 중국 입장에선 불가피했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양국이 역사적인 형제 관계를 회복하려면 한국 국민에게 끼친 상처에 대해 사과하고 보상해야 한다. 그게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마오는 1950년 2월부터 일찌감치 병력 44만여 명을 동북지방에 집결시켰다. 추이 박사에 의하면 마오는 당시 한반도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 지역에 이미 주둔 중인 동북군구 소속 34만 명 이외에 추가로 제4야전군 소속 10여만 명을 배치해, 나중에 한반도에 파병된 동북변방군이라는 새 부대를 만들었다. 이 부대는 미군 참전 직후 9개 사단이 증원되어 압록강을 넘을 때는 중국인민의용군이라 불렀다. 

넷째, 마오는 1950년 6월 말 미군의 파병 결정이 나자 조기 참전을 시도했다가 스탈린의 제지로 좌절되었다. 션즈화(沈志華, 화동사범대학) 교수와 김동길(金東吉, 베이징대) 교수가 최근 연구 결과를 밝힌 바에 의하면, 중국의 조기 파병 시도는 북한 측의 중공군 조기 파병 요청과 맞물려 여러 갈래로 진행되었다. 

7월 5일 미군 선발대인 스미스 부대가 오산에서 북한군과 교전하게 되자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티코프 주 북한 소련대사에게 소련 공군이 북한군을 엄호할 것과 서울에 소련 고문관을 상주시킬 것, 그리고 중국군의 파병도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며칠 후 중공군의 조기 파병 문제를 협의할 수 있는 중공군의 군단장 또는 사단장 이상의 고위 장교를 파견해 줄 것을 중국에 요청했다. 이 무렵 평양에 부임한 중국의 대리대사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시에 따라 7월 10일 김일성과 면담한 자리에서 중국 정부는 북한이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전했다. 그는 북한군 군복 견본과 한반도 지도를 요청했다. 중국 측은 북한이 요청하고 소련이 허가하면 중국군을 북한군으로 위장해서 파견할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마오는 7월 12일 무기와 탄약을 지원받기 위해 베이징에 도착한 김일성의 특사 이상조 부참모총장을 접견하고 이를 승인하면서 “만일 북한 측이 호소해 온다면 군대를 파견할 수 있으며, 이에 대비해 32만 명 4개 군단이 준비되어 있다”고 밝히고 8월 10일까지 김일성의 의견을 알려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발언은 마오가 조기 파병 의향을 밝힌 최초의 발언이다. 

만약 중공군이 7월에 개입했다면… 

7월 13일 김일성은 다시 스티코프 대사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중국 등을 포함하는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의 파병을 요청했다. 북한 측은 인민군의 대전 점령 직전인 7월 19일에도 다시 스티코프에게 중국이 파병 용의가 있으며 이를 위해 4개 군단, 32만 명이 준비되어 있다는 마오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6·25전쟁을 한국 민족간의 내전으로 가장하기 위해 일체 이런 요구를 묵살하다가 8월 말에서야 거부 의사를 밝혔다. 

다섯째, 마오는 중공군이 1950년 11월 인해전술로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를 좌절시키고 남진을 계속해 1950년 말 제2차 공세에 들어갔을 때 그의 본심을 드러냈다. 그는 중공군 지휘관들에게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한국군 5개 사단을 전멸시킨다면 “조선반도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우리 군에 최상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해 중국의 개입 목적이 한반도 통일에 있음을 처음으로 밝혔다. 

중공군은 이듬해 1월 중순에는 37도선까지 내려왔으나 리지웨이 장군 지휘 하의 유엔군의 선전(善戰)으로 이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마오에게는 큰 유감이었을 것이다. 

중국 정부는 2010년 시진핑 당시 부주석의 ‘정의로운 항미원조전쟁’ 발언이 국제적으로 물의를 빚자 그의 주장이 중국 정부의 정론(正論)이라고 해명하면서도 미국을 의식해 차츰 이 용어 사용을 자제하는 듯 했다.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6·25전쟁을 지칭할 때 중립적인 조선전쟁이라는 용어로 대신하는가 하면 항미원조를 소재로 하는 영화나 TV드라마도 일체 억제했다. 

그런데 이번 5월 28일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중국 방송 역사상 최초의 항미원조 주제의 38부작 TV 드라마 ‘싼바센’(三八線)이 중국의 중요 텔레비전들에서 방영되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6·25전쟁 초기 미군 공군기의 폭격에 피해를 입은 압록강 연안의 중국 어부들이 자진해서 참전해 온갖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용감하게 싸워 승리한다는 내용이다. 

중국 정부의 방송 책임자는 이 작품을 ‘전쟁 드라마의 모범’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이 TV드라마는 첫 회 도입부의 내레이션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분열된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폭발해 미국의 공개적인 참전으로 조선반도의 내전이 국제(전쟁)화 했다”는 설명을 자막(사진)으로 넣었다. 

이것은 브루스 커밍스 류의 6·25전쟁 2단계 엉터리 이론이다. 이런 설명은 6·25 바로 그날 한국군의 북침으로 인민군이 반격전에 나섰다는 북한 측 거짓 발표에서 약간 진화한 것이지만, 역시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계속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13억 중국 국민을 속이는 것이다. 

환추시보는 6월 5일자 영문 인터넷 판에서 “엄격한 검열을 거쳐 상영되는 영화와 TV 작품은 중국에서 정치바람이 어떻게 불고 있는지를 잘 말해 주는 좋은 지표”라고 보도했다. 

최근 10여 년 간 금기시 된 항미원조전쟁 주제 영상 작품이 이번에 처음 등장한 배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미중 갈등관계의 심화 속에서 중국 정부가 미국에 대해 강경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중 대립관계의 최대 피해국이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참으로 걱정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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