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우파가 좌익에 밀려 소수가 된 이유는 이론 무장에 게을렀기 때문. 즉 공부를 안 해서 무식했기 때문
과문의 탓인지 몰라도 ‘보수주의’에 대해 직접 설명해 주는 책들은 그리 많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보수주의’의 속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보수주의’는 마르크스주의처럼 세상을 디자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먹물들이 ‘발명’해 낸 사상이 아니다. 개인이나 집단의 삶의 체험이 농축된 결과이다.
그래서 보수주의에는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을 제외하면,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공산당선언> 같은 바이블이 없다. 자유주의에는 하이예크나 미제스라도 있지만, 보수주의에는 그것도 없다.
미국에서는 1950년대 이후 보수주의, 혹은 신보수주의 계통의 이론투쟁이 있었고, 그 결과 보수주의 지침서 같은 책들이 나왔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것도 찾아보기 힘들다. ‘보수주의’가 그다지 인기 있는 사상이 아니기 때문인 모양이다.
필자가 여기에 소개하는 책들 중에서도 ‘보수주의란 이런 것이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책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필자가 읽어본 책들 중에서 ‘아, 이런 게 보수주의구나’ ‘이래서 보수주의를 해야 하는구나’ ‘이래서 급진적 혁명은 안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 10권을 소개한다.
1. 보수주의의 바이블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 에드먼드 버크 著, 한길사(2008)
두 말이 필요 없는 ‘보수주의의 바이블’이다. 저자는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정치인이자 정치철학자다. 프랑스혁명 초창기에 그 혁명이 무정부 상태와 군사독재로 귀결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영국 헌정을 예찬했다.
“변화할 수단을 갖지 않은 국가는 보존할 수단도 없는 법이다. 국가가 그러한 수단이 없다면 독실한 마음으로 보존하기를 원했던 헌정의 부분을 상실하는 위험에조차 빠질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보수’가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꼴통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선조를 결코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은 후손도 내다보려 하지 않는다”와 같은 경구들이 책 곳곳에 깔려 있다. 기독교 신자라면 성경을 꼭 읽어봐야 하듯이, 보수주의자라면, 보수주의에 대해 알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장담컨대, 결코 어렵지 않다.
2. ‘사회심리학’의 개척자가 말하는 혁명의 비극
<혁명의 심리학>, 귀스타브 르 봉 著, 부글(2013)
19세기말~20세기초 군중심리학, 사회심리학 분야를 개척한 저자는 혁명이 가져오는 지옥도를 그려 보임으로써, 왜 ‘보수주의’를 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특히 “법령에 의한 갑작스런 개혁에 대한 갈망은 자코뱅 정신이 남긴 가장 불길한 생각 중 하나이자 프랑스혁명이 남긴 무서운 유산의 하나”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규제들이 아니라 개인들과 그들의 방법들이 한 민족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아직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효과적인 개혁은 혁명적인 개혁이 아니라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 매일 축적되는 사소한 개선들이다. 중대한 사회적 변화는 중대한 지질학적 변화처럼 사소한 원인들이 매일 축적되어 일어난다.”
이게 보수주의의 핵심철학이 아니고 무엇인가?
3. 혁명이 만들어낸 디스토피아에 대한 경고
<한낮의 어둠>, 아서 쾨슬러 著, 후마니타스(2010)
스탈린의 대숙청을 소재로 해서 사회주의 디스토피아의 현실을 고발한 소설.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저자는 이 책에서 부하린을 모델로 한 N.S 루바쇼프라는 ‘올드 볼셰비키’가 대숙청의 와중에서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당 활동은 목표를 향해 태연히 굴러갔고, 지나는 길의 굽이에서 익사자가 생기면 그 시체를 치워버렸다.” “우리는 인류의 낡은 살가죽을 벗겨 내고, 거기에 새 가죽을 입히고 있다네. 이건 신경 약한 사람들을 위한 일이 아니야.” “매년 수백만 명이 전염병이나 그 밖의 자연재해로 무의미하게 죽고 있지. 그런데 역사에서 가장 전망 있는 실험을 위해 수십만 명이 희생되는 것을 우리가 피해야 하는가?” 같은 대목들은 섬뜩하다.
‘보수주의’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우리가 ‘왜 혁명을 거부하고, 이 체제를 보수(保守)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4. ‘철의 여인’이 말하는 오늘의 세계
<국가경영>, 마거릿 대처 著, 경영정신(2003년)
영국을 대표하는 자유주의자이자 보수주의자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은퇴 후인 2002년 펴낸 책. 냉전을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미국, 러시아, 중국, 아시아, 불량국가와 테러리즘, 인권, 유럽연합(EU) 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보수주의자가 보는 오늘의 세계’라고 할 만한 책이다.
당시 한창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진행되고 있던 와중이었는데, 대처는 이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지적한다. “북한에 대해 ‘혹시나’하는 생각을 품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 “미국은 북한과 접촉할 때 안보 문제가 인도적인 문제와 똑같이 중요하다는 점을 동맹국인 남한이 반드시 인식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북한이 주민들에게 행하고 있는 소름끼치는 만행이라는 이슈를 살금살금 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에서 ‘철의 여인’의 냉철한 현실 인식을 엿볼 수 있다.
5. 변혁의 물결에 맞서야 했던 보수정치인의 고뇌
<헨리 키신저의 회복된 세계>, 헨리 키신저 著, 북앤피플(2014)
나폴레옹 몰락 이후 들어선 이른바 ‘메테르니히 체제’를 우리는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려 한 ‘반동적 체제’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이 체제는 크림전쟁, 보불전쟁 등 국지전을 제외하면,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100년간 유럽의 평화를 보장한 질서였다.
헨리 키신저의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이 책은 바로 그 ‘메테르니히 체제’를 만들어 낸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와 영국의 외상 캐슬레이에 대한 이야기다. 강대국들이 국제질서를 어떻게 만들고, 그 와중에 약소국들이 어떻게 희생되어 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11장 ‘메테르니히와 보수주의적 양난’에는 위로는 중세적 관념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군주를 모시면서 변혁의 물결에 맞서야 했던 보수정치인 메테르니히의 고민이 잘 나타나 있다. “나에게 자유라는 단어는 목표를 가리키는 것이었지, 한 번도 출발점을 의미한 적이 없다. 출발점은 질서이며, 이것만이 자유를 만들 수 있다”는 메테르니히의 말이 인상적이다.
6. 영국 보수당, 400년 생존의 비결
<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강원택 著, 동아시아(2008)
우리나라로 치면 숙종과 장희빈의 시대였던 1680년경 등장한 토리, 즉 보수당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영국의 집권당으로 건재하다. 그 비결이 어디 있을까?
저자는 보수당의 가장 큰 특질로 “보수당은 이념적 원칙이나 순수성보다 권력 장악이라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정당”이라는 점을 든다. 때문에 보수당은 정책적인 측면에서 놀라울 정도의 유연성을 보이면서, 곡물법 폐지, 선거법 개정, 근로조건 개선 등 개혁을 주도했다.
그렇다고 보수당이 시류에 아첨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위기 속에서도 자신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 신념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45년 총선에서 노동당에게 참패한 직후, 보수당의 중진 퀸틴 호그는 유명한 ‘펭귄문고’ 문고판으로 <보수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썼다. 보수당 정치센터를 신설하고 청년보수운동을 새로 시작했다. 마거릿 대처, 존 메이저 등이 청년보수운동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이 책대로라면 4·13총선 이후 새누리당에 보수이념 강화를 주문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래도 보수정치의 나아갈 바를 고민하는 이들이 참고할 만한 책이다.
7. 한국 보수주의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보수세력연구>, 남시욱 著, 청미디어(2011)
한국은 망국과 대한민국 건국, 6·25전쟁, 4·19와 5·16, 386의 1980년대 등을 거치면서 과거를 청산하기만 해 왔다. 때문에 한국의 보수는 늘 ‘보수, 보수 하지만, 한국의 보수가 무엇을 보수한단 말이냐’는 말을 들어왔다. 원로 언론인인 저자는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내세우면서, 그 뿌리를 구한말 개화사상에서 찾는다. 보수세력의 형성과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본 한국 근현대사책으로 읽어도 좋다.
8. 보수 지식인이 진단하는 오늘의 한국
<나는 보수다>, 조우석 著, 동아시아 (2011)
보수지식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조우석 KBS 이사의 한국사회 진단. ‘진보에 홀린 나라 대한민국을 망치는 5가지 코드’로 ▲지식인들의 ‘리버럴 강박증’과 이로 인한 지식인 사회의 붕괴위기 ▲‘리버럴 강박증’에 사로잡힌 지식인들이 전파(傳播)한 ‘역사허무주의’ ▲강한 평등주의 심리와 여기서 기형적으로 갈라져 나온 반(反)기업 심리, 부(富)에 대한 적대감 ▲이념갈등의 내출혈 ▲우리 안의 ‘근본주의 DNA’를 꼽는다.
저자는 “2010년대 초입의 대한민국은 붕괴된 문명들이 보여줬던 몰락의 두 징후인 정체상태와 역류현상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면서 “이대로라면, 나는 이 나라의 앞날이 두렵다”고 말한다. 보수세력이 우리 체제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대상이 단순히 좌파세력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문화에 깊이 뿌리 내린 낡은 의식임을 깨닫게 하는 책이다.
9. 한 권으로 읽는 외국 보수주의 양서들
<Ex-Communist의 보수주의 여행>, 황성준 著, 미래한국미디어(2014)
‘Ex-Communist’, 즉 ‘전(前)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는 저자가 보수주의 관련 서적 46권을 소개한 책. 공산주의자에서 보수주의자로 변신한 저자의 지적(知的) 편력을 보여주는 책이다. 미국의 현대보수주의, 좌파의 풀뿌리 공동체 운동 전술, 현대사 인식, 냉전 및 탈(脫)냉전시대 미국의 국제전략, 중국의 부상(浮上)과 미국의 대응전략, 중동사태·우크라이나 사태 등 그 내용도 다양하다.
저자가 소개하는 책 대부분은 아직 국내에서 번역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번역될 가망성이 별로 없는 책들이다. 때문에 이 책을 통해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 보수주의 이론가, 국제전략가들의 생각을 접할 수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특히 미국 현대보수주의의 한 축(軸)인 철학적 보수주의나, 미국 보수주의 운동가들의 조직·모금활동 실전(實戰)매뉴얼 등을 소개하는 부분들이 눈길을 끈다. 책 곳곳에 실린 저자의 운동권 시절이나 소련 및 종군기자 시절의 체험담들이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이 책의 전작 격인 <한 Ex-Communist의 책과 세상 읽기-유령과의 역사투쟁>(2012)도 역시 해외 보수주의 관련 서적을 소개한 것으로, 함께 읽으면 영미 보수주의 이론의 지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10. 작은 울림, 큰 반향
<사일런트 마이노리티>, 시오노 나나미 著, 한길사(1998)
<로마인이야기>로 유명한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 에세이. 그의 역사물들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현실주의자, 보수주의자로서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주세페 프레치올리니라는 사상가의 말들을 인용한 ‘참된 보수주의자’라는 글은 ‘보수주의자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보수주의자는 장기간에 걸쳐 사회에서 통용되어 온 제도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여기고 있다” 같은 보수주의의 ABC에 해당하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참된 보수주의자는 자신이 ‘내일의 인간’은 되지 못해도, ‘모레의 인간’은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같은 재치 있는 문구도 있다. 모두 보수주의자라면 가슴에 새겨둘 만한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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