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의 원대한 꿈은 기독교 신앙의 확산을 통해 아시아를 통합하고, 공산주의와 같은 악(惡)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불굴의 영적(靈的) 방어막’을 만드는 것
1964년 4월 5일, 미국의 위대한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가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맥아더가 사망하자 10년 전, 그와 비공개 비밀 인터뷰를 했던 짐 루카스 기자는 그와 했던 인터뷰 내용을 공개했다. 짐 루카스 기자의 맥아더 인터뷰 관련 내용은 임병직 전 외무부 장관의 회고록 <임정에서 인도까지>의 384~388쪽에 소개되어 있다.
인터뷰에서 맥아더는 자신이 도쿄에서 한국전을 지휘하고 있을 때 그가 구상하고 실천하려 했던 군사상의 모든 전략을 미 합참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때마다 미 고위 수뇌부와 영국에 침투해 있던 소련 간첩망에게 관련 내용이 시시각각으로 넘어가 중공에 상세하게 알려져 군사작전이 번번이 실패했다고 아쉬워했다. 루카스 기자의 보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맥아더 장군은 그가 워싱턴에 보낸 메시지와 워싱턴이 그에게 보낸 메시지는 모조리 국무성에 의해 영국에도 제시되었으며, 그러면 영국은 인도를 경유하거나 런던 주재 소련 대사관을 통해 이런 메시지가 영국에 의하여 중공에 48시간 이내에 전해졌다.
따라서 중공은 맥아더 장군이 취하라고 제의한 조치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미리 알고 있었으며, 중공은 맥아더가 손발이 묶여 효과적으로 항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영국으로부터 확인받고서 한국전쟁에 참전키로 한 것이다.”
짐 루카스 기자의 맥아더 비밀 인터뷰
루카스 기자는 1950년 10월 맥아더와 트루먼 대통령과의 웨이크 섬 회담에 관한 내용도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맥아더 원수는 만일 중공이 외국에 개입한다면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게 한 다음 중공군 뒤의 교량들을 파괴하여 보급로를 차단시키고 격멸당하기 전에 아사(餓死)케 만들겠다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말했다.”
또 맥아더 장군은 미국이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는 방사능 코발트를 폭 5마일로 압록강을 따라 한·중 국경지대에 뿌려 항구적으로 한반도를 중공 땅으로부터 폐쇄시키려 했다는 사실을 보도하면서 이렇게 썼다.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자 공군에 압록강 다리를 폭격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 있으나, 4시간 후, 그러니까 항공기들이 폭격 임무로 출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의 명령은 당시의 국무장관인 조지 마샬 장군에 의하여 독단적으로 취소되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압록강 발전소(수풍 발전소)를 폭격하려던 계획도 국무성 내포 세력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마샬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와 관련, 미국의 저널리스트 앤 코울터는 “루스벨트와 트루먼 시절에 미국은 적국에 충성하는 민간인 부대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라고 주장한다. 1940년대와 1950년대 미국 행정부 안에 수백 명의 소련 간첩들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진을 치고 있으면서 원자탄, 군사문제, 레이더, 항공, 로켓 프로그램 등 모든 기술적 정보를 닥치는 대로 훔쳐 소련으로 퍼 날랐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인물이 ‘세기의 간첩’이라 불리는 영국인 킴 필비다. 이른바 ‘케임브리지 5인방’이라 불린 소련 간첩 킴 필비는 한국전쟁 때는 미국에 파견된 영국 정보기관의 현지 책임자로 워싱턴에서 활동했다.
그는 미 CIA와 영국 외무성을 오고가는 연락관으로서 CIA 국장 등 간부들과 접촉하여 두 기관의 상호 정보 교환에 개입했다. 그가 CIA로부터 얻은 한국전쟁 관련 최고급 정보들은 영국 정보기관 MI6 본부 내의 소련 간첩이었던 도널드 매클린(영국 외무성 미국담당관)을 통해 실시간으로 소련에 넘어갔다.
▲ 지구상에서 공산주의를 말살하려 했던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의 확산을 우려한 트루 먼대통령과의 충돌로 현직에서 해임됐다. |
트루먼, 맥아더 해임
그 무렵 ‘케임브리지 5인방’ 간첩 중의 한 명이었던 도널드 매클린은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관의 원자력정책 담당관이었으며, 가이 버제스는 2등서기관이었다. 이들 두 외교관은 워싱턴 주재 영국 정보책임자로 와 있던 킴 필비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맥아더에게 만주 지역을 폭격하지 못하도록 지시한 사실, 맥아더를 해임한 이유가 소련 간첩들의 활동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이제부터 더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숙제다.
맥아더는 이처럼 미국의 최고위층에 침투한 소련 간첩들 덕분에 자신의 뜻대로 전쟁을 지휘할 수 없었고, 애오라지 ‘제한전’을 주장하는 트루먼 대통령과 감정 충돌을 벌이다 현직에서 해임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1951년 4월 11일, 백악관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들 앞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맥아더 장군이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미국과 유엔의 방침을 전면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한국전쟁이야말로 제한전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즉 군인들의 귀중한 생명을 보호하고 우리나라와 자유를 사랑하는 국가들의 안보가 무모한 행동으로 인하여 위험 속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3차 대전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는 맥아더 장군이 이러한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많은 사건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맥아더 장군을 해임시키는 것이 당연하며, 그 결과 우리 정책의 목적에는 아무런 의심과 혼동이 없게 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왔습니다….”
이날 트루먼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로서 한국전을 총지휘하고 있던 유엔군 사령관 겸 미 극동군 사령관, 주일 연합군 사령관, 극동 미 육군 사령관을 겸직하고 있던 맥아더 장군을 현직에서 해임하여 소환하고 후임에 미 8군 사령관(주한미군 사령관 겸직) 리지웨이를 임명한다는 성명을 전격 발표했다.
맥아더의 해임 과정은 정상적인 절차를 따랐다고 보기는 힘들다. 본인에게 정식 루트를 통해 해임을 통보한 것이 아니라 맥아더 해임 정보가 언론에 새 나가자 백악관은 상식과 예의, 절차를 무시하고 새벽 1시에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열어 대통령이 해임 성명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전장에 있던 최고 지휘관의 목을 쳐버린 것이다.
美 국민의 66%가 맥아더 해임 반대
맥아더는 도쿄에서 라디오 방송을 들은 부관을 통해 자신의 해임 소식을 들었다. 후에 맥아더는 “하인도 이런 식으로 해고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불쾌해 했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앤 코울터는 2008년 <반역>(경덕출판사)이란 저서를 출간했는데, 이 책에서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전쟁을 지휘하고 있던 현직 지휘관을 해임한 사건에 대해 미국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미국인은 맥아더의 해임에 대해 분노했다. 트루먼의 패배적 정책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전국에서 트루먼 허수아비를 불태웠다. 국제부두노조는 맥아더의 해임에 항의하여 조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맥아더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을 때 50만 인파가 공항에서 도심까지 도열해서 조국으로 돌아오는 영웅을 열렬히 환영했다. 뉴욕에서는 700만의 시민들이 맥아더를 위해 종이 꽃가루를 뿌렸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귀국하던 아이젠하워를 환영했던 시민보다 배가 많은 숫자였다.
전국의 여론조사는 국민의 66%가 맥아더의 해임에 반대하는 것을 보여줬다. 공화당은 맥아더를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도록 초청했다. 많은 사람들은 트루먼을 탄핵하라고 요구했다.
매카시 상원의원은 맥아더의 과시적 태도를 싫어했지만 트루먼이 전쟁을 이기는 장군을 해임하는 결정에 대해서는 더욱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트루먼이 한밤중에 달콤한 술에 취해서 그런 결정을 했다”고 비난했다.’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은 국제전쟁으로 비화된 한국전을 중국 지역으로 확전할 것인가, 아니면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치르는 제한전으로 축소할 것인가를 놓고 벌인 군 통수권자와 군사작전 지휘관의 충돌이었다.
맥아더가 추구하려던 전쟁 목표는 한반도 내의 적군 섬멸과 한국을 민주 정부로 통일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 소련까지 전선을 확대하여 공산주의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붉은 사조의 역사적인 퇴조를 기록할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3차 세계대전을 각오한 전면전을 벌여 지구상에서 공산주의를 말살해야 한다는 굳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트루먼은 미국의 국익 입장에서 한반도보다 유럽이 훨씬 중요한데, 병력을 동아시아에 쏟아 넣고 있을 때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면 유럽을 지키기 힘들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트루먼의 전쟁 목표는 한국에서 공산주의 침략을 저지하되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고 3차 대전을 예방하는 ‘제한전’이었다.
“트루먼 그 사람은 우리에게서 맥아더 장군과 함께 희망을 빼앗아 가”
충격적인 맥아더 해임 소식이 전해진 4월 11일, 부산 임시 경무대에서 긴급 각료회의가 소집됐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결연한 의지를 국무위원들에게 밝혔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맥아더를 잃음으로 해서 중대한 고비에 당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같이 일을 당하고 보니, 그의 군인으로서의 위대함과 그의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과 이해심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한층 느끼게 됩니다.
트루먼 그 사람은 우리에게서 맥아더 장군과 함께 희망을 빼앗아 갔습니다. 트루먼 그 사람은 세계 민주주의의 중심이요, 인류 정의의 수호자인 미합중국의 대통령이면서도 어찌하여 이 같은 짓을 했는가. 공산 침략군에 무릎을 꿇겠다는 것인가. 백기를 들겠다는 것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트루먼 그 사람은 이 전쟁을 적당히 끝내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또 하나의 38선이 생겨 또다시 삼천리강산이 두 동강나고, 3000만 민족이 영영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해서 국무총리 그리고 장관 여러분….
나는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비록 유엔군의 원조를 받고 있으나 우리 국토, 우리 민족을 갈라놓게 되는 어떠한 조치도 수용할 수 없으며, 이 전쟁을 적당히 그만두려 한다면 승리 아니면 죽음을 각오하여 결사반대를 할 것입니다.”
현직에서 해임되어 귀국한 맥아더는 1951년 4월 19일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고별 연설을 했다.
“한국만이 지금까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워온 유일한 나라입니다. 한국 국민들이 보여준 대단한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노예 상태를 택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무릅쓰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내게 한 마지막 말은 ‘태평양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전투 중인 여러분의 아들들을 한국에 두고 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모든 시련을 견뎌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이 모든 면에서 정말 훌륭하다고 주저 없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호하고 이 야만적인 분쟁을 명예롭게, 그리고 시간 손실과 인명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끝내고자 끝없이 노력했습니다. 점차 심각해지는 유혈 참사는 저를 깊은 고뇌와 근심 속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이 용감한 젊은이들은 저의 마음 속에, 그리고 항상 저의 기도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군에 입대할 때, 20세기가 시작되기도 전이었습니다만, 그것은 제 소년 시절의 모든 희망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제가 웨스트포인트 연병장에서 임관하던 그 날 이후로 세상은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저의 희망과 꿈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저는 그 시절 가장 즐겨 부르던 어느 군가의 후렴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노래는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노래 속의 노병처럼 이제 저는 제 군 생활을 마감하고 사라지려 합니다. 신께서 의무에 대한 깨달음을 주신 바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애쓴 한 노병으로 말입니다.”
반공주의와 기독교, 민주주의 신봉자
맥아더를 특징짓는 키워드는 반공주의와 기독교다. 맥아더는 켐벨 가문 출신이었는데, 켐벨 가문은 십자군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템플 기사단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확산이 아시아를 통합하고 공산주의와 같은 악(惡)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불굴의 영적(靈的) 방어막’을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자신은 교황 비오 12세(라틴어로는 피우스 12세)와 함께 공산주의라는 무신론자들에 대해 공동의 전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맥아더는 기독교 정신과 민주주의, 애국심을 하나의 가치로 높게 평가했다. 이러한 반공주의와 기독교는 이승만의 입장과 정확하게 일치하여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건국, 6·25 때 공산군과 싸우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승만은 일관되게 맥아더 지향 정책을 펼쳤다. 이와 관련하여 윤치영은 “이 박사의 맥아더 지향 정책은 이 박사와 프린체스카 여사의 시종여일한 우정의 호소로 지속되었다. 이 박사는 도쿄를 경유하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반드시 맥아더 사령부를 찾아가 그의 관심과 안부 인사를 전하게 했으며, 부단히 친필 서신 공세를 펴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철저한 친(親)맥아더 정책은 대미(對美) 외교에 적지 않은 역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미국 군부 내에는 유럽을 우선시하는 마샬-애치슨 파와 아시아를 중시하는 맥아더 파의 대립과 갈등이 심했다. 휘트니 장군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무성에서의 맥아더 장군에 대한 질투는 매우 심했다. 사사건건 그의 충고나 조언을 무시하고 멸시했는데, 한국이 독립되어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국무성으로 그 관할이 이관되자 한국에 대한 경시도 노골화되었다.”
1961년 5·16 혁명 후 김종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맥아더 장군과 대화를 나눴다. 당시 김종오 총장이 전한 맥아더의 의견이다.
“한국은 위대한 찬스를 놓쳤다. 나의 계획으로는 첫째, 한국전을 한국 내에만 국한시켜서는 승리할 수 없으니 전쟁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만주를 폭격하고 중공을 봉쇄하는 한편, 국부군의 본토 상륙전을 감행하여 장개석 씨로 하여금 북경을 차지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극동에서 분쟁의 씨를 영원히 뽑아버리고 한국은 압록강까지 찾아서 통일을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당시의 중공군은 수는 많았지만 장비는 유치했으며, 소련도 그 당시까지는 실전용 원자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의 계획은 실행만 했으면 반드시 성공했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으며 극동뿐 아니라 세계의 역사까지도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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