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이나 정부, 공공기관은 경비 엄중하니까 만만한 시민들이 모이는 공항·백화점·지하철역·마트 등을 노려
지난 3월 22일 오전 8시경, 수백 명의 이용객으로 붐비던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의 자벤텀 공항 출국장에서 두 건의 폭발이 일어나 10명이 숨졌다. 40여 분 후에는 출근 시간을 맞아 승객들이 몰렸던 브뤼셀 시내 말베이크 역에서도 폭발물이 터져 시민 21명이 사망했다. 이 역은 유럽연합(EU) 본부와 가까운 곳이었다.
다수의 시민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로 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됐고, 벨기에 정부는 즉시 항공·기차·버스·트램·지하철 등 모든 대중교통의 운행을 전면 중단했다.
테러가 발생한 지 몇 시간이 지나자 이슬람 무장단체 IS는 “벨기에 테러는 우리들의 소행”이라는 공식 성명을 냈다. 브뤼셀은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가 있는 국제 도시인만큼 테러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큰 지역이었다.
벨기에 수사 당국에 따르면 이번 테러는 벨기에 국적의 브라힘 엘바크라위와 칼리드 엘바크라위 형제의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이었다. 형 브라힘은 자벤텀 국제공항에서, 동생 칼리드는 말베이크 지하철역에서 폭탄을 터뜨리고 죽었다.
파리 테러를 포함해 최근 유럽 지역에서 발생한 일련의 테러 사건의 총책으로 알려진 폭탄 제조범 나짐 라크라위는 벨기에 테러에도 관여해 현장에서 도주했다가 벨기에 경찰에게 체포됐다.
▲ 군 부대나 공공 기관이 아닌 불특정 일반 시민을상대로 테러를 자행하겠다는 이슬람 무장단체 IS의 위협이 본격적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22일 오전 자살 폭탄 테러 직후의 벨기에 브뤼셀 공항의 모습. |
‘소프트 타깃’ 테러 본격화
벨기에 당국은 이번 테러가 IS의 테러 용의자들을 체포한 데 대한 보복이라고 분석한다. 벨기에 경찰은 지난해 11월 발생한 파리 테러의 마지막 주범인 살라 압데슬람을 최근 체포하고 잔당들을 추적하는 중이었다.
특히 살라 압데슬람이 체포된 후 경찰 조사에서 벨기에 브뤼셀에서 테러 모의를 하고 있다고 진술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IS가 계획 중이던 테러를 앞당겨 저질렀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IS가 압데슬람의 배신을 염려했다는 것이다.
벨기에 테러를 계기로 IS가 전 세계 민간인을 상대로 한 동시다발 테러전략을 본격화 하고 있다는 분석이 현실화 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일반 시민을 포함한 130명이 사망한 파리 테러를 전후로 전문가들은 IS가 미국 주도의 공습으로 인해 약화된 시리아·이라크에서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세계 각국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테러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강조했다. 공격이 어려운 군이나 정부, 공공기관 대신, 이른바 ‘소프트 타깃’ 테러가 정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벨기에의 동시다발 폭탄 테러는 다수의 민간인을 노렸던 파리 테러와 동일 유형이다. 파리 테러에선 IS 조직원들이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바타클랑 극장을 비롯해 축구경기장, 식당가 등에서 파리 시민들을 겨냥해 무차별 총격과 폭탄 테러를 자행했다.
유럽의 안보 전문가들은 IS가 이미 최소 400명의 테러 전사를 훈련시켜 유럽에 침투시켰다고 경고하고 있다. 서방 국가에 대한 공격 훈련을 전담하는 특별 캠프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세계 각국의 유명 관광지를 집중 공격한 것은 시민들도 자신들의 공격 대상이라는 경고 메시지였다. 올해만 해도 지난 1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시내 중심가에서 IS의 폭탄 테러로 7명이 사망했고, 2월에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 도심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28명이 사망했다. 자카르타 테러 발생 지역은 쇼핑몰과 서방 기업, 유엔 사무소 등이 위치한 시내 중심가였다.
전문가들은 IS가 시민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심어줌으로써 서방 국가의 대(對) IS 공세의 약화를 노리고 있다고 분석한다. 공항·백화점·지하철역·마트 등 언제 어디서든 폭탄이 터져 누구라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을 확산해 사회 전체를 마비시키겠다는 것이다.
15년 만에 통과된 테러 방지법
문제는 IS의 경고가 더 이상 다른 나라 일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 2월 15일 IS가 유튜브에 공개한 살해 위협 동영상엔 한국인 20명의 명단이 포함됐다. IS는 영상을 통해 한국인 공무원 11명과 기업 홍보팀 직원 9명의 이름과 e메일 주소를 공개하며 “이들을 발견하면 살해하라”고 했다. 자생적 IS 조직원들에게 지령을 내린 것이다. 수사 당국은 국내 외국인 가운데 IS 관련자들을 일부 파악한 상태로 알려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對)테러 기능은 이제야 겨우 자리를 잡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3월 2일 국회에서 테러방지법이 통과됨으로써 대(對)테러 정보활동 및 법 집행의 컨트롤타워가 구축됐고, 외국인 테러 단체 조직원에 대한 처벌 근거도 마련됐다.
지난 2002년 미국 9·11 테러 이후 김대중 정부가 테러방지법을 국회에 발의한 지 무려 15년 만이다. 이번 국회에서도 친노 운동권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테러방지법 통과를 극렬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19대 국회 회기 막바지에는 테러방지법 통과를 방해하기 위해 필리버스터라는 의사진행방해 작전을 벌여 무려 38명의 야권 의원들이 192시간 25분 동안 연설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한 끝에 가까스로 통과됐다.
지금까지는 외국인 테러 조직원을 검거해도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강제퇴거 조치밖에 할 수 없었다. 테러 모의를 하다 지난해 12월 구속 기소된 인도네시아인은 IS 계열의 ‘알 누스라’라는 테러단체에 자금을 송금했는데도 불법 체류 등의 혐의를 적용하는 데 그쳤다.
이와 관련, 벨기에가 IS 테러분자들의 온상이 된 것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이 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벨기에가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거점이 된 배경으로 벨기에의 고질적인 정치권 갈등과 관료주의, 부처 간 소통 부재, 정보당국의 인력 부족 등을 꼽았다.
벨기에 출신 IS 요원은 500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많다. 이 신문에 따르면 벨기에 브뤼셀 수도권 지역 경찰도 언어 등에 따라 193개 구역으로 분리돼 정보 공유가 되지 않고, 테러에 대한 경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벨기에 정치권은 정작 지난해 정보 예산의 삭감을 고려한 바 있다.
테러방지법의 국회 통과를 막기 위해 9일간에 걸쳐 필리버스터를 진행한 의원들이 기특하다면서 감사의 편지와 건강보조식품(황진단액)을 선물로 보낸 사람이 김종인 더불어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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