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돈 한 푼, 물건 하나 절약하는 것도 애국하는 일 아니냐”(프란체스카 여사)
이승만이 평소 즐겨 불렀던 애창곡은 ‘희망가’와 ‘메기의 추억’, 찬송가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새 찬송가 580장)이었다.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독립운동가 남궁억이 작사한 것이다.
‘희망가’의 가사는 목사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임학찬이 지었고, 곡조는 구전되어 온 것으로 누가 지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희망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인가/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서 곰곰이 생각하면/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다시 꿈같구나.’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이 애독했던 성경 구절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는 구절이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였던 고재봉에 의하면 당시 대통령 비서실은 직제도 없었고 임명과 사직에 발령장 같은 것도 없이 구두로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가고 했다. 직제가 없었기 때문에 서로를 부를 때 ‘선생’이나 ‘씨’로 호칭했다. 비서들의 월급이 적어 대부분의 비서들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생활했다.
이승만의 비서들
어느 날 비서들이 가지고 온 도시락에서 김치 냄새가 나자 프란체스카 여서가 “다음부터는 김치는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한 일도 있었다. 이승만은 김치처럼 냄새가 많이 나는 한식 반찬은 들지 않았는데, 부인이 김치는 물론 된장, 멸치젓 등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담배 연기도 대단히 싫어하여 비서 가운데 담배를 많이 피운다고 여사에게 꾸지람을 들은 사람도 있었다. 여사는 “담배를 많이 피워 손가락이 노란 사람은 출세를 못 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한복을 애용했으나 대님 매는 것이 불편하다 하여 대님을 치지 않고 양복 식으로 개조해서 입었다. 그는 “국민들도 간편하게 입도록 하라”고 의견을 내기도 했다.
비서실은 경무대 비서실과 중앙청 비서실로 나누어져 있었다. 경무대에는 고재봉 임철호 황규면 김광섭이 근무했고, 중앙청에는 이기붕 최정우 김석진 이종호 이중춘 김상래 등이 근무했다. 나중에 최정우가 사직하고 전인성이 근무했다. 담당 업무는 다음과 같다.
▲이기붕: 섭외 ▲고재봉: 면회와 섭외, 장·차관 연락, 대통령 수행 ▲임철호: 결재서류, 국회관계, 대통령 수행 ▲황규면: 경무대 주방, 기관실 등 살림살이 총괄 및 대통령 수행, 외교관계 연락 ▲김광섭: 대통령 담화문, 연설문과 공보처 및 보도기관 업무와 대통령 수행.
서울대 교수로 있다가 비서실에 들어온 최정우는 중앙청에 있으면서 경무대에 파견되어 영문 관계, 김석진과 이종호는 중앙청에서 진정서, 탄원서 등 민원관계 서류를 취급했다. 1949년 5월 최정우가 사임하고 하와이 교포인 전인성이 영문 관계를 맡았다.
그리고 미국인 레이디 씨가 대통령 고문으로 일했다. 레이디는 이 대통령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고, 6·25 사변이 발발하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중춘은 예산과 금전출납 등 총무비서로 일했다. 이 밖에 여자 비서로 미국인 2명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총애했던 곽영숙, 강신자 씨 등이 문서 타자원으로 일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사(國事)를 보는 틈틈이 체조와 산보를 즐겼고, 경무대 안에 있는 연못에서 고기밥 주는 것이 낙이었다. 또 정원의 나무를 다듬고, 매일 오후 경무대 뒷산에 올라가 30여 분 간 큰 나무를 톱으로 자르곤 했다. 이승만은 드라이버, 망치 같은 연장을 선물로 받는 것을 좋아했다.
▲ 격무에 시달리던 이승만 대통령은 피로할 때면 산책을 하며 머리를 식혔다. 사진은 이 대통령 내외가 경무대 연못에 있는 모습. |
산책, 낚시, 정원 손질이 취미
이 대통령은 격무에 시달려 피로할 때는 산책을 하며 머리를 식히며 사색했다. 낚시도 즐겼는데, 중대한 일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닥쳐 깊은 구상을 해야 할 때 낚시를 나가곤 했다. 시간이 넉넉할 때는 휴양을 겸해 진해 별장에서 낚시를 했으나 그렇지 못할 때는 경회루나 비원에서 낚싯줄을 늘어뜨리고 조용히 구상에 잠겼다.
이승만의 비서 고재봉의 증언에 의하면 이 대통령은 건강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마담(비서들이 프란체스카 여사를 지칭하는 용어-필자 주)의 보살핌이 극진했다고 한다. 매일 오후 5시 이후가 되면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대통령을 모시고 경무대 뒷산을 함께 산책하곤 했다. 비가 오면 마담이 우산을 손수 받쳐 들고 부부가 함께 산책을 했다.
일 때문에 밖으로 출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일 한 시간씩 규칙적으로 산책했다. 산책을 하다가 삭은 나무 가지를 잘라내고 썩은 고목 덩굴을 도끼질 하든가 톱질을 했다. 산책을 할 때면 무얼 할지 모르니 비서들은 늘 도끼, 톱 등 연장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마담은 인삼이나 녹용 같은 한약은 질색이었다. 한번은 강원도에서 촌로가 귀한 산삼을 가져와서 달여 드리려 했는데 마담이 “안 된다”면서 펄펄 뛰었다. 이 대통령이 돈암장과 이화장 시절 생활비를 댔던 기업가 백낙승이 가져온 녹용을 김홍식 비서가 달여서 술에 타 마시도록 하려다가 마담에게 혼이 났다.
마담의 생활 철학은 “이 집안 살림은 내가 하는 것”이란 것이었다. 한국인 비서들이 “산삼이나 녹용은 한국인에겐 보약”이라고 간곡히 설명했지만 “저 분은 한국에서 산 사람이 아니야, 위장이 서양 사람처럼 됐단 말이야” 하고 한약 복용을 극력 반대했다.
“물건 하나 절약하는 것도 애국”
이원장 전 육군소장(후에 국회의원 역임)은 연합참모본부(합동참모본부의 전신) 창설요원으로 경무대 별관에 근무하는 과정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볼 기회가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이승만이 스웨터만 걸치고 경호원 몇 사람과 함께 톱과 도끼를 가지고 별관 옆에 쌓인 나무토막을 자르고 도끼질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런데 스웨터와 바지의 여러 군데가 깁고 꿰매져 있었다고 한다.
이원장이 육군본부 인사국장 재직 시절의 일이다. 이승만은 달러를 대단히 아껴 도미(渡美) 유학을 다녀온 장교단이 귀국하면 경무대에서 쓰고 남은 여비를 반납하라는 통지서를 보내곤 했다. 이원장의 회고다.
‘어느 날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경무대에 급히 불려갔다. 비서의 안내로 프란체스카 여사님을 만나 뵌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오래 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수수한 옷차림으로 친절히 맞아주시는 여사님은 자리를 권하시면서 두툼한 서류를 내놓으셨다. 바로 도미 유학 장교단의 여비 청구서였다.
내 소관은 아니었지만, 말씀인즉 여비가 1.3배나 과다 청구되었으니 다시 검토해보자면서 미국 관광안내서를 펴 보이셨다. 그리고는 일일이 헌 편지봉투를 뒤집은 종이 위에 계산하며 설명하시는 것이었다. 끝으로 우리가 돈 한 푼, 물건 하나 절약하는 것도 애국하는 일 아니냐면서 오해 말아달라고 하실 때, 나는 순간 감전이나 된 듯 몸이 굳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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