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다. 하지만 법을 경시하고 오용하는 사례가 빈발하는 요즘 현실을 보면 우리가 제대로 된 법치를 운용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법 없이 살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그곳은 바로 유토피아다.
하지만 현실의 삶은 온갖 법률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국가와 사회를 규율하는 합리적인 법률을 어떻게 만들고 운용할 것인가가 당면 과제다.
플라톤은 지성(nous)을 갖춘 입법자가 만든 ‘최선의 법률’(aristoi nomoi)에 통치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복종할 때 이상적 법치가 구현될 수 있다고 봤다. 그가 법률은 ‘지성의 배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플라톤은 통치자들을 ‘법률에 대한 봉사자(hyperetes)’로 규정했다.
플라톤이 추구한 ‘법의 지배’(rule of law)는 그 지배의 대상들에게 강제적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설득과 이해를 구하는 방식으로 다가갈 것이 요구된다. 플라톤은 강제성(ananke)과 설득(peitho)을 혼화(混和)하여 법률을 제정해야 하며, 민중에 대한 교육(paideia)을 통해 사전에 충분히 소통할 것을 강조했다.
‘법의 지배’는 법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의미한다. 법이 궁극적 목적이 되고, 통치자와 모든 사람은 그 법 아래에 놓인다. 따라서 통치자가 법을 자의적 전제권력의 수단으로 활용하여 지배하는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법에 의한 지배’는 전제정치, 전체주의와 친화적이고, ‘법의 지배’는 민주정치와 사법부의 독립 등 삼권 분립의 철학과 보다 잘 어울린다.
이런 점에서 ‘법치’란 동일한 이름과 외양에도 불구하고 동서양이 추구해 온 개념은 극명하게 다르다. 한비자 등 중국의 법가사상은 ‘법에 의한 지배’로써 황제의 전제권력을 공고히 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법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군주의 위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군주 일인에 의한 자의적 인치(人治)가 아닌 ‘지성의 배분’으로 확립된 ‘최선의 법률’에 의한 철인 통치를 희구했던 것이다.
플라톤은 ‘훌륭한 법질서’(eunomia)를 위해 시민들 간에 자유(eleutheria)와 우애(philia), 그리고 지성(nous)의 공유(koinonia)가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덕(arete)을 쌓기 위해 지혜와 절제가 요구되었고, 자연히 이를 함양시키기 위한 시민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플라톤의 <법률>에서 제시한 입법안은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이념과 가치 그리고 국가 질서의 틀을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 있다.
플라톤의 <법률>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 국가’가 아닌 ‘훌륭한 법질서’를 통한 차선의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를 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법치(rule of law)의 초석을 다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의 법률은 ‘지성의 배분’의 의해 만들어진 ‘훌륭한 법질서’일까? 통치자들은 ‘법률에 대한 봉사자’란 인식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국가는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질서를 존중하는 자유시민 교육을 방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 국회는 국가를 부흥시킬 ‘지성의 배분(법률)’을 창안해 내기는커녕 민생법안에 목말라하는 국민의 요구를 외면하기 일쑤다. 플라톤의 입법 철학을 살피며 우리의 현실을 성찰해 볼 대목이 꼬리를 문다. 훌륭한 법질서를 통한 ‘차선의 이상 국가’를 만드는 첫걸음은 입법자들의 지성의 함양과 자기 혁신이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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