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실패는 사회적 갈등을 부르고,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실패를 야기
몰려오는 경제위기의 먹구름 속에서 19대 국회가 산적한 경제 활성화와 민생 법안들을 정쟁(政爭)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마감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허탈하고 분노스럽기만 하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아예 처음부터 없었거니와, 그나마 과반수를 차지한 새누리당의 지도력을 기대한 시민들은 국회선진화법으로 식물화 된 국회와,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외치는 야당의 지리멸렬, 그리고 원칙 없는 여당의 야당과 ‘법안 맞교환’에 넌더리를 내야 했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 불신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정치 불신의 골이 갈수록 심각해져 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2014년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에 따르면,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의회와 정당에 대한 신뢰도는 10%대에 머물고 있다. 이는 일본의 절반, 미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2012년 사회통합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사회 각 기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는 금융기관이 가장 높은 28%를 기록했고, 국회는 가장 낮은 5%를 기록했다. 2013년 동아시아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에서 신뢰를 받는 파워그룹은 대기업이 10점 만점에 5.7점으로 가장 높았고, 정당이 3.5점으로 가장 낮았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에서 정치의 영역은 ‘쓰레기’라는 말이 합당할 정도가 아닐 수 없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현대 민주국가에서 정치 불신은 우리나라만 겪고 있는 현상은 아니다. 하버드대 연구팀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들이 정부에 대해 갖는 신뢰도는 1960년대에 70%에 이르렀지만, 1990년대 중반에는 25% 수준으로 하락했다. 이렇게 하락한 미국인들의 정치 불신은 여전히 30%대를 맴돌고 있다.
‘전통주의에 대한 회의’가 정치 불신 불러
가장 정의롭고 민주적이라는, 그리고 세계 최강의 국가 미국에서 이렇듯 정치 불신이 높다는 사실은 현대 의회주의 정치가 실패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면도 있다. 이러한 점은 정치학자들에게도 상당히 곤혹스러운 문제다.
이 문제를 연구해 온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정치학자 게리 오렌은 독특한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오렌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현대 민주국가에서 정치 불신은 어느 날 생긴 것이 아니라 장기적, 단기적 요인들에 의해 축적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장기적 요인으로서는 ‘전통주의에 대한 회의’를 들 수 있다.
현대 사회가 후기 산업사회화 되면서 탈중심, 탈권위의 과정을 심화시켰고, 이 과정에서 정치적 권위를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태도들이 현저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다원적 가치의 확산으로 국민들이 정부나 정치권에 과거처럼 일관성 있는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와 함께 과거 정치권에 흡수되던 엘리트들이 현재는 비정치권의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면서 정치 엘리트들이 비정치권 엘리트들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문제도 지적된다.
과거의 정치 엘리트들 수준이 1987년 민주화 체제 이후 급속하게 다른 분야의 엘리트들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흔히 ‘3김(金)체제’로 약칭되던 포스트 민주화의 1990년대는 정치 불신이 극도로 치닫던 시대였다. 구시대적 질서는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는 등장하지 않던 시기에 구심적 지도력이 없던 노태우 정부는 국민들의 격렬한 정치 불만과 마주해야 했다.
이후 우리 국민들의 정치 불신은 주로 정치인들의 부정부패와 선거부정, 난장판을 빚는 파행적 국회에 그 초점이 맞춰져 왔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탄핵 정국’으로 등장한 본격적인 이념 갈등이 ‘1국가 2국민’ 체제를 방불케 하는 이념적 갈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김대중 정부의 등장과 함께 약화되어 가던 지역 갈등이 본격적인 이념 간, 세대 간, 계층 간 갈등으로 확산되는 양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사건은 진보와 보수 진영 간에 그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을 180도 양극화 시키면서 ‘1국가 2국민’ 체제를 고착화했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양극화 갈등은 국회 내에서 야권의 선명성 노선 경쟁을 통해 더욱 여권과 이념 갈등으로 치달았다.
이에 따라 정치에 대한 불신이 가중되는 근본적 원인이 ‘대결적 정치 구조’와 국민과의 ‘소통 부재’에 있다는 주장은 증명이 필요 없는 공리(公理)의 지위를 얻게 된다. 이는 정치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구태에 젖어 싸움만 한다’는 국민 인식의 토대가 된다.
▲ 한국 사회는 현재 극심한 이념갈등을 겪으면서 ‘1국가 2국민 체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갈등을 치유하고 봉합시켜야 할 책임은 정치에 있다. ⓒ미래한국 고재영 |
갈등의 만연
2013년 갤럽의 ‘데일리 오피니언’ 조사의 국회 역할 수행 평가 결과를 보면 ‘잘하고 있다’는 10% 내외,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70% 수준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었다. 부정 평가 이유로 정쟁/소통부재가 40%, 무능 30%, 기득권/당리당략 몰두가 20% 수준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이는 노무현 정부 이후 대한민국의 국회가 과도하게 ‘정치 대결’ 국면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대결적 정치의 반복과 심화는 사회 갈등, 계층 갈등, 지역 갈등을 초래하고 궁극적으로 그러한 갈등 비용으로 인해 경제가 희망을 잃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인식에 이의를 제기할 국민은 없어 보인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의 한 보고서는 이 점에 대해 “심각한 문제는 이렇듯 첨예하고 적대적인 상황에서 각 정당들이 이 균열을 통합하려는 제도적 노력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균열을 활용한다는 점”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정치권이 야기하는 우리 사회의 갈등은 어느 정도일까.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우리나라의 사회갈등 수준(갈등지수 0.72)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27개국 중 2위다. 종교분쟁을 겪고 있는 터키(1.27)가 1위라는 점, OECD 평균인 0.44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이 연간 최소 82조 원에서 최고 246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한국의 갈등지수가 평균 수준으로만 개선되어도 GDP는 최대 21%까지 증가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남의 죄만 있는 세상’
문화일보가 실시한 창사 20주년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갈등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계층갈등(40%), 지역갈등(22.7%), 세대갈등(17.8%), 이념갈등(15.1%) 순으로 나타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계층갈등 다음으로는 지역갈등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치경제학 분야의 수많은 서구 연구자들은 한 국가의 경제적 존망은 그 국가가 어떻게 사회갈등을 운영,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 분야의 대표적 연구자인 로드릭(D. Rodrik)은 국가경제연구소의 한 논문에서 1970년대 중반 이후 경험하게 되는 수많은 국가들의 경제적 몰락은 여타 다른 요인보다 사회갈등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갈등 없는 사회는 없지만, 갈등이 한 사회의 정치공동체를 와해시킬 정도에 이르면 국가는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우리 국민들은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만 결국 이 모든 갈등을 불러오는 정치의 선택 문제로 돌아가면 여전히 자신의 지역적, 학연적, 그리고 연고적 관계가 정치인의 이념적, 정책적 거리보다 가까운 것이 현실이다. 그러한 문제가 정치 지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작가 이문열은 1990년, ‘남의 죄만 있는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한 일간지에 칼럼을 썼다.
“불길한 예감과는 달리 결국은 무슨 대단한 폭발도, 어떤 시원스런 해결도 없이 한 주일이 지나갔다. 모든 것은 여전히 진행 중일 뿐이고 결말은 미래의 시간에 떠맡겨졌다. 그러나 ‘내 죄’가 없는 시대, 자기 반성을 모르는 사회가 만들 수 있는 결말은 뻔하다. 지키려는 쪽이건, 부수고 고치려는 쪽이건 그 지도자에게 들려줄 것은 다시 예레미아의 외침뿐이다. (1990. 5.23. 동아일보 <객석에서 보는 정치>)
이문열의 예언자적 칼럼은 7년 뒤 IMF 사태로 현실화됐다. 무책임한 정치, 혼란의 정국이 결국 사회적 갈등을 방치하고 확산시킴으로써 조기에 수습할 수 있었던 노동개혁과 같은 문제들을 실기했던 것이다. 그 결과 경제에서 실패가 왔다. 이러한 역사적 경로는 2015년이 저무는 19대 국회에서도 다시 벌어지고 있다.
모두가 현재의 시점에서 한국에 거대한 경제위기가 닥치리라는 것은 단지 정치실패 때문이 아니라, 정치의 실패가 가져오는 사회적 갈등과 그로 인한 국가의 실패가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안과 처방은 없는가.
민주주의의 타락에 대해 가장 먼저 그 가능성을 걱정한 이는 바로 플라톤이었다. 그는 민주주의(democracy)가 타락하면 중우(衆愚)정치(ohlocarcy)가 된다는 점을 그의 국가론(Politeia)에서 고찰했다. 이때 플라톤이 말한 demos는 일반 대중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공동체에 책임을 갖는 시민이었다. 그러한 시민들이 ‘덕의 의무’를 잃게 되면 ‘떼거리(ochlos)’가 된다고 플라톤은 본 것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국가의 통치자에게는 탁월함(arete)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탁월함은 대중들의 여론에 좌우되지 않고 도덕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현명함과 용기를 뜻했다. 다시 말해 올바른 정치철학의 부재가 정치 불신의 근본적 원인임을 플라톤은 지적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공자(孔子)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공자는 덕치(德治)를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다. 위정이덕(爲政以德), 즉 모든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듯이 정치를 덕(德)으로서 하면 백성들은 감화를 받아 저절로 따른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정치인들의 언행과 태도, 그리고 도덕적 모범이 일반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이미 싱가포르의 리콴유를 통해 알고 있다. 그리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정치철학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최근 미국인들이 레이건 대통령을 새롭게 추억하는 이유도 레이건이 가졌던 정치철학과 소통의 미덕이 국민들에게 희망을 줬기 때문이다.
리콴유가 싱가포르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것은 ‘제3세계 토양에 바탕 한 일류국가’였다. 그것은 싱가포르적 풍요로움과 선진성이었다. 레이건은 미국인들에게 ‘언덕위에 빛나는 도성(都城)’을 약속했다. 그것은 미국인들이 소망하는 ‘타락에서 벗어나 신(神)이 부여한 질서에 복종하는 거룩한 제국’이었다.
국민 영혼을 정화하고 비전을 품게 하라
이처럼 탁월한 정치인들에게는 국민의 영혼을 정화하고 비전을 품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올바른 정치철학, 즉 전체와 미래를 보는 안목이 지도자에게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좋은 제도를 도입해도 결국 정치인들이 현실정치를 뛰어 넘을 수 있는 도덕적 결단력이 부족하면 소용이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이러한 점에서 고전주의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정치철학적 질문은 의미가 깊다. 우리는 각자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선(善)이자 정의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그것이 좋은 것(good)인지, 나쁜 것(bad)인지는 따져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옳고 그름의 가치에서 벗어나 좋고 싫음의 선호로 자신의 주장을 선이자, 정의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더 나은 것(The Better)’을 주장하려면 일단 그것은 좋아야(Must be good) 한다. 스트라우스는 그러한 판단에 있어서 ‘지켜져야 할 가치’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한 사회의 가치는 특수한 역사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불변적, 보편적 가치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법학자 한스켈젠은 ‘당위성의 근본규범(Ground Norm)’이라 정의했다. 즉 한 정치 공동체에는 공자가 말한 ‘북극성’과 같은 초월적이고 불변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법철학과 의회정치론에 굵은 족적을 남긴 독일의 칼 슈미트는 정치공동체란 동질적 가치를 가진 이들을 말하며, 민주주의는 그러한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 간에 이질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의미하기에 ‘의회는 공론장이지, 표결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합의주의적 해석으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칼 슈미트에 의하면 동질성을 가진 이들이 보편성에 즐거이 복종하는 토론적 합의를 통해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다수결의 표 대결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슈미트의 민주주의론은 우리에게 ‘합의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그러나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정치적 공동체로서 갖는 ‘동질성’이다. 따라서 칼 슈미트가 ‘정치의 기본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어떤 점에서는 타당하다.
특히 대한민국의 오늘처럼 체제 이념으로 합의가 되지 않는 1국가 2국민 체제라면 네이션 빌딩(국가 건설)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문제는 슈미트가 말한 바, ‘결단’하지 않으면 돌이키기 어려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 심히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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