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웅 미래한국 객원기자
영국이 시진핑을 극진히 환대한 것은 ‘돈’ 때문. 그러나 美英 동맹은 굳건
지난 10월 19일(현지시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영국 방문이 시작됐다. 5일간의 일정 동안 시진핑은 영국 왕실과 정부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시진핑은 이에 화답하듯 400억 파운드(한화 약 70조 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했다.
시진핑은 영국 상하원 합동연설에서는 기립박수 한 번도 못 받는 괄시를 당했지만, 영국 왕실은 그에게 버킹엄궁에서의 1박과 황금마차 행진을 제공하는 등 극진히 대접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정상회담 후 펍에서 맥주를 대접하기도 했다.
시진핑은 환대에 만족한 듯 “영국은 서방 국가들 가운데 선견지명이 있다”면서 “앞으로 영국에 ‘황금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영국 왕실과 정부가 중국의 최고지도자를 극진하게 대접하며 ‘친중(親中)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과연 ‘황금시대’를 가져올까.
시진핑이 이번 영국 방문 기간 동안 풀어놓은 돈 보따리는 400억 파운드 규모다. 이 가운데 헝클리 원전에 60억 파운드, 시즈웰 원전 지분 20%, 브래드웰 원전 지분 66.5%를 투자하는 등 영국 원전에 100억 파운드 정도의 투자를 약속했다.
환대 받은 시진핑
중국은 또 영국 고속철도(HS2)에 수십억 파운드의 투자를 약속했으며 보건의료보험, 항공기 제조, 에너지 개발, 부동산, 금융에서도 영국과 협력하기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총 투자액은 400억 파운드가 넘는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영국은 중국과 비자 간소화를 추진 중이며, 영국 정부는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도 서방 국가 가운데서는 가장 먼저 가입했다.
중국과 영국 간의 ‘끈끈한 관계’를 본 한국 언론들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적대적이었던 양국 관계가 이번 시진핑의 영국 방문으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보도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시진핑의 영국 방문을 ‘점혈(點穴)외교’라고 부르며 영국 왕실과 정부가 그를 극진히 환대한 것을 ‘외교적 성과’라고 선전하고 있다.
캐머런 총리와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비롯한 왕실 관계자들의 극진한 대접을 보면 영·중(英中) 관계가 끈끈해 보인다. 하지만 서방 언론들은 영국이 국내 상황 때문에 중국의 돈 주머니를 노린 행동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영국 왕실과 정부가 시진핑을 극진히 환대한 것은 ‘돈’ 때문이라는 것이다.
▲ 영구의 친중외교는 중국의 돈을 빼먹고 ‘특수관계’인 미국과의 친선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 |
한국에서는 시진핑이 영국 왕실과 정부의 환대를 받은 것이 영국 정부의 ‘친미(親美)전략에서의 이탈 혹은 수정’이라고 보는 견해들이 있다.
이것은 현실성이 결여된 판단이다. 지난 5월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이 압승을 거뒀다. 2010년 총선에서도 압승을 거뒀던 보수당은 총선 승리 직후 자신들의 전략과 정책을 과감히 밀어붙이겠다는 뜻을 선명하게 밝혔다.
보수당은 영국 사회가 ‘자칭 진보주의자’들의 정책 때문에 법질서, 계층 간 공존, 전통적 가치, 진짜 영국인을 위한 복지 등이 망가졌다고 판단했다. 보수당은 이를 고치기 위해 과감한 정책을 펴고 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불법 체류자 강제추방 및 재산 몰수다. 1980년대 대처 정권이 끝난 뒤 계속 집권해 온 노동당의 정책 때문에 영국 곳곳에 외국인 불법 체류자들이 들끓고, 이들이 영국이 추구해 온 문화와 사회적 가치를 억압하며, ‘진짜 영국인’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주고 있다고 본 것이다.
최근 시리아 난민 수용 문제에 대해서도 영국 보수당 정권은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와는 다른 입장이다. 난민 일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수용하겠지만, 유럽연합(EU)이 강제로 난민 수용을 할당하는 데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밝혔다.
다음으로 추진 중인 정책이 EU 탈퇴다.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권은 독일, 프랑스와 함께 EU의 힘을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캐머런의 보수당 정권은 ‘국제자선사업’과 ‘진보적 가치’에 몰두하는 독일, 프랑스 때문에 EU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점차 무너져가고 있고, 이로 인한 안보 위협이 영국으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노동당과 확연히 다른 보수당 정책
캐머런 총리가 EU 탈퇴를 추진하겠다고 공식화 한 시점은 그리스 사태에서 EU의 무기력함이 드러난 직후다. 이는 EU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독일, 프랑스 ‘진보 정권’의 온정주의가 ‘무책임한 저개발국’들의 방만함을 낳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국이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영국 국민들도 보수당 정권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영국 국민들은 과거 노동당 정권이 벌인 정책으로 인해 “영국인이 영국 땅에서 자국민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일자리도 잃어버린 상황”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다. 보수당 정권 집권 후 갈수록 호전되는 경제 상황이 영국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영국은 EU에 가입했지만 통화는 파운드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침체되어 가던 영국 경제는 2010년부터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2013년부터는 금리를 인하하고 파운드화 유통을 대폭 늘리면서 꾸준히 성장하는 추세다. 그 결과 2014년 말에는 30년 만에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4위의 경제 강국으로 올라섰다.
보수당 정권은 자국민 중심 정책을 펼치면서 노동당 정권 때와는 다른 외교 전략으로 움직이고 있다.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권 때는 ‘부시의 푸들’이라 불릴 정도로 미국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했지만, 캐머런은 “미국과 우리는 특별한 관계이면서도 다른 나라”라는 점을 강조한다. 시리아 내전 개입 요청을 의회 표결을 통해 거절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보수당 정권은 ‘007 제임스 본드’와 같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개입하는 것에 앞서 자국의 힘을 기르는 것을 우선 과제로 보고 있다. 보수당 정권이 영국 왕실을 움직여 시진핑을 극진히 대접하고, AIIB에 가입하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면 그 속내를 알 수 있다.
중국은 영국의 AIIB 가입과 시진핑 환대, 투자 유치 등을 자신들과 ‘새로운 전략적 동맹’을 맺으려는 의도로 판단, 자신들이 미·영(美英) 동맹에 균열을 만든 것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중국의 이런 판단 착오는 중국 경제의 경착륙을 정부 개입으로 늦추면서 조급해진 까닭에 제대로 된 전략을 짜내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중국은 강력한 권력의 힘으로 언론과 인터넷을 통제하여 중국 경제의 심각한 침체 상황을 대외적으로 숨기고 있다. 하지만 중국 경제의 파열음은 곳곳에서 감지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급격한 외환보유고 감소다.
2015년 4월, 국내 언론들은 “중국 외환보유고 4분기 연속 감소” 소식을 전했다. 1년 동안 줄어든 중국 외환보유고는 무려 2000억 달러. 2015년 9월 7일에는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지난달에만 외환보유고가 939억 달러 줄어들었다”고 밝혀 충격을 줬다.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무려 4000억 달러의 외환이 사라진 것이다.
중국은 “외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투자를 다변화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중국 내부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전혀 다르다. 중국 경제를 이끌어온 건설 경기 침체와 외국계 기업의 철수, 시진핑의 ‘부패와의 전쟁’으로 인한 공산당 간부들의 외화 밀반출 등이 겹쳐 일어난 위기라는 것이다.
지니계수가 0.7(소득분배의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수치. 0과 1 사이의 수치로 표기되는데,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도가 높다. 0.4를 넘으면 소득분배가 상당히 불평등한 상태-편집자 주)에 육박하는 빈부격차, 건설경기 침체로 인한 농민공 수억 명의 실직과 불만, 자신의 집권을 도운 공산주의청년단(共靑)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시진핑은 거대한 건설 프로젝트와 해외 협력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바로 ‘징진지(京津冀) 프로젝트’와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사업, AIIB 출범 등이다.
베이징(北京), 텐진(天津), 허베이성(河北省) 전체를 하나의 거대 도시로 묶어 개발한다는 ‘징진지 프로젝트’는 42조 위안(한화 약 7400조 원)이 투입되는 초대형 건설 프로젝트다. 베이징 내에 있는 공장들을 모두 허베이성 외곽으로 옮기고, 원활한 물류를 위해 고속철과 경전철을 촘촘히 건설하는 이 프로젝트는 시진핑의 운명이 걸린 사업으로 불린다.
AIIB 출범과 일대일로 사업은 중국의 패권전략이다. 동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미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AIIB, 상하이협력기구(SCO) 회원국, 러시아 등과 함께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중국과 러시아가 대륙의 패권을 장악한다는 전략이 일대일로다.
이런 사업에 영국 정부가 참여를 선언하자 중국은 천군만마를 얻은 상황이 됐다. 53개 나라로 구성된 영연방(Common Wealth)의 지도국이자, 미국과 ‘특수 관계’의 동맹국, 미국과 맞먹을 정도의 군사기술을 보유한 세계 4위의 경제 강국이 중국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시진핑과 중국은 ‘신형 대국관계’를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국의 현실 외교
영국의 태도도 과거와는 달랐다. 윌리엄 왕세손이 중국으로 가서 시진핑에게 국빈 방문 초청장을 전달했고, 미국의 우려에는 아랑곳 않고 “영중(英中) 관계는 미래의 전략적 관계”라며 예우했다. 영국 의회가 시진핑의 상하원 합동연설 당시 중국의 인권 탄압 문제를 거론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왕실은 중국의 해킹 문제, 인권 문제에 대해 침묵했다.
중국 매체들은 영국이 일대일로 사업에서 유럽의 발판 역할을 자처한 것, 중국 위안화의 국제통화기금(IMF) 특별인출권(SDR) 통화 바스켓 편입 지지, EU-중국 FTA 지지 표명 등을 ‘점혈외교’의 최대 성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언론을 통해 소개된 영국 정부와 왕실의 태도, 미국과 영국 우파 언론들의 보수당 정권 비난 등을 보면, 중국 매체들의 주장대로 미영 간의 ‘특수관계’는 막을 내릴 것처럼 보인다.
영국 정부는 2007년 4월 중국이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수백억 달러를 런던 금융시장에서 대량 투매,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일으킨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국은 중국 금융 전략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이 시진핑의 방문을 계기로 대규모 자금을 영국에 투자하면, 영국 정부는 중국의 자금전략과 수단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된다.
현재 미국의 오바마 정권은 ‘특별한 동맹국’과 보조를 제대로 못 맞추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16년 대선에서 ‘특별한 동맹국’과 보조를 맞추고, 국가전략을 바로잡으면 영국의 ‘친중 외교’는 중국의 ‘돈’을 빼먹은 뒤 사그라질 가능성이 높다. 영국이 이렇게 벌어들인 돈과 주요 정보는 미국과 호주, 영국, 캐나다가 공유하며, 중국이 바라는 ‘신형 대국관계’가 현실이 되는 것을 막는 데 사용된다는 뜻이다.
현재 한국은 정치권, 언론, 학계가 중국의 눈치를 보며 미국과의 관계에서 헛발질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바뀌면 국가전략까지 휘청거리는 데 반해 미국과 ‘특별한 동맹국 ABC(호주, 영국, 캐나다)’는 대통령이 누가 되든 간에 국가전략은 방향성을 유지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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