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통령 이승만의 땀과 눈물이 서려 있는
역사적 흔적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여러분에게 하와이는 어떤 의미인가? 아마도 와이키키 해변, 호놀룰루 공항, 산호가 펼쳐진 바다 위에서의 스노쿨링 등이 휴양지 하와이의 전형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그리고 “아, 독재하다가 망명한 이승만 대통령이 간 곳이지” 라는 어렴풋한 역사 상식 하나가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청년세대에 만연해 있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기’를 학생운동 목표 중 하나로 지향하는 필자에게도 하와이에 대한 인식은 일반인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휴양지, 건국 대통령께서 여생을 보내신 곳, 그리고 해외 독립운동 기지 중 한 곳. 필자에게는 평생 인연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하와이였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 서거 50주기 행사에 대학생 대표 자격으로 갈 기회가 주어졌다. 당연히 그 순간부터 필자에게 ‘하와이=이승만’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으로 하와이를 바라보니 하와이는 너무나도 아프고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필자는 하와이 오하우 섬 일대에서 이 대통령과 그의 동료들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우리 한민족에 대한 사랑과 조선 독립의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정직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13년 하와이로 이주해 25년을 살았다. 아니, 투쟁했다. 그리고 대통령 직에서 하야한 후 5년의 여생도 하와이에서 보냈으니 도합 30년을 하와이에서 보낸 셈이다. 한성감옥에서 기독교도로 개종한 청년 이승만은 기독교 세계관과 함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장착했다.
▲ 한인기독교회 내 이승만 대통령 동상. |
하와이에서 독립 운동 25년, 여생 5년 보낸 이 대통령
하와이로 이주한 이 대통령은 한인 동포사회의 지도자가 된다. 이후 학교를 설립하고, <한국교회 핍박>을 집필하여 일본을 한국의 기독교를 탄압하는 사탄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또 한인들이게 근대 시민의식과 독립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태평양 잡지>를 발간했고, 독립운동 기금을 모아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특히 미국의 협력자들과 독립의 길을 모색했다.
하와이 동지회관을 매각하고 하와이 한인 교민들이 모금한 기금을 기부 받아 인천에 인하공대를 설립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가 합쳐져 지금의 인하대학교가 만들어졌다.
이승만 박사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교육’이다. 청년 이승만은 한인의 교육에 독립의 길이 있다고 봤다. 교회 내 여성을 위한 기숙사를 짓다가 쫓겨나다시피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광화문 모양을 본 딴 교회(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고, 그 앞에 여성 기숙사를 지었다.
필자의 학교가 여대라서 그런지 그 건물 앞에서 국민 교육, 나아가 우리 국민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애착이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졌다. 특히 그 시대에 남녀평등교육은 결코 보편적인 일이 아니었다.
<태평양 잡지>의 발행도 교육의 일환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동지회에서 1913년부터 1930년까지 <태평양 잡지>를 발간했고, 주필로 근무하며 기독교 신앙과 애국 독립사상을 심어주는 일에 주력했다. 한성감옥에서 청년 이승만이 저술한 <독립정신>에서 강조한 상업의 중요성, 자유무역의 원리, 공부해야 하는 이유 등을 하와이 교민들에게도 설파한 것이다.
수많은 구한말 지식인들이 조선 백성들의 무지와 국민성을 나무랐다. 물론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였다. 내용은 “일본은 이렇게 깨끗하고 국민들이 부지런한데 우리 조선인들은 너무나도 미개하다”는 자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수많은 저술 활동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우리 조선인들의 국민성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똑똑하고, 부지런하지만 근대적으로 사는 방법을 모르는 ‘우리 국민들’이었다. 모두가 깨물면 아픈 손가락이었다. 최고지도자의 역량은 국민 모두를 ‘사랑하는 힘’이 아닐까. 내 국민에 대한 사랑, 나라에 대한 사랑…. 그래야 국민과, 대한민국을 위한 좋은 정책도 나온다.
내가 하와이에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느낀 또 하나는 ‘아픔’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 거주하던 터전 일대. 뒤로는 첩첩산중, 앞으로는 5분 정도 차를 타고 나가면 바다가 나온다. 관광지로서는 아름답지만, 거주지로서는 막막한 공간이다. 너무나도 이국적인 이곳에서, 열대의 꽃과 나무들을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 생각이 내 마음을 자주 미어지게 했다.
▲ 세를 들어 입주해 있던 하와이 옛 총영사관 건물. |
마지막 순간까지 통일을 걱정한 이승만 대통령
이런 곳에서 90년 인생 중 30년을 보내셨다. 여기서 해외동포들을 교육하고, 자금을 모았으며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 우리 한국인은 알아야 한다. 민족이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보낼 때 그 중심에 하와이가 있었음을. 그리고 ‘그’가 꿈꾼 세상에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얼마 전 6·25를 하루 앞두고 보도된 KBS의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으로 망명’ 운운하는 선동 기사는 한 마디로 ‘싸가지’ 없는 행동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사실만 나열해도 그가 일본을, 일본의 군국주의로 대표되는 전체주의를 얼마나 혐오했는지 알 수 있다.
한편 문제의 선동 기사를 보도한 KBS의 석혜원 기자가 참조한 야마구치현의 역사서에는 독도가 일본령으로 되어 있다. 얼마나 창피한 자승자박이란 말인가? 역사에 대한 염치를 가져야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염치없는’ 우리에 의해, 그가 세운 나라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이승만 대통령. 그는 한국에서 손님이 올 때마다 물었다고 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누가 통일을 준비하는가? 말로만 통일을 말하면 안 되는데….”
동지회나 총영사관 건물 등 독립운동 기지들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땀과 눈물이 서려 있는 곳들 대부분이 현지인들에게 팔리고, 흔적들이 없어지고 있다. 안내자는 말한다.
“‘이 자리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얼마 안 남았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흔적도 없어요.”
역사는 돌고 돈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 우리 민족이 당했던 수모의 역사에 대해 분노하라는 것이 아니다. 왜 우리가 그런 수모를 당해야 했는가, 우리는 왜 나라를 지킬 힘이 없었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왔는지를 배울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돌아와 이제는 나에게 다시금 머나먼 땅이 된 하와이를 생각한다. 그 안에서 사라져가는 독립 투쟁의 흔적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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